‘신내사거리’에서 56번 국도로 들어선다.
‘대진교’를 건너면서 물가에 뗏목을 타고 수영을 하고 다슬기를 잡는 여름 물놀이 풍경을 본다.
다리를 건너 좌우로 펼쳐진 ‘대평뜰’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화촌중학교’ 앞 둔덕으로 오른다. 길이 푸른 뜰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길가의 울타리를 따라 피어난 꽃들에서 가을의 향기를 느낀다.
올 봄에 뿌린 우렁이가 긴 더듬이를 내밀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동산’ 아래 자리를 잡았던 ‘일감재’터가 유독 넓어 보인다.
‘화촌중학교’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포화의 잿더미를 일구고 뿌리를 내린 이래 개교 54년을 맞은 현재 5.65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2009년 현재 1학년 2명을 포함하여 전교생이 32명인 작고 아담한 학교다.
정직(正直), 근면(勤勉)을 교훈삼아 철쭉처럼 화사하고 소나무처럼 푸르게 생활하는 화촌인을 지향한다.
그러나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신입생 감소 현상으로 초등학교의 통폐합에 이어 최근에는 중학교의 통폐합을 요구하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지만 학교를 지키기 위한 마땅한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오늘날 산업사회가 몰고 온 도시집중화현상이 농촌의 중, 소도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귀농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시점에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할 문제다.
‘동산’을 감싸고도는 너른 뜰의 중심에 자리 잡은 ‘화촌중학교’는 단연 ‘삼포(대평마을과 내삼포, 산초울마을)’의 중심이었다.
‘내삼포’는 크게 ‘구렁말’, ‘노내골’, ‘사창골’, ‘가망골’, ‘복골’, ‘동회울’, ‘마산밑’을 아우른다.
‘신내’에서 지나온 길은 ‘외삼포 대평뜰’이고, 화촌중학교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지는 뜰은 ‘내삼포’다.
‘삼포’ 속의 ‘삼포’, ‘내삼포’다. ‘내삼포’와 ‘외삼포’는 삼포의 옛 지명인 ‘삼정포’의 한마을이었다. ‘삼정포’란 마을 앞에서 ‘벌력천(화양강의 옛이름)’과 ‘군업천’이 대진교 아래 아우라지에서 합수를 이루며 삼각주를 이룬다하여 붙여졌다. ‘삼정포’에는 포구가 세군데 있었는데 ‘성산’과 ‘건금리’를 건너들던 ‘성포나루’와 ‘일건’에서 ‘대평’으로 건너다니던 ‘삼포나루’, ‘구성포’에서 ‘대평(장거리)’으로 넘나들던 ‘대진나루(구성포에서는 돈도루배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울이 얕아 배보다는 돌다리나 섶다리 혹은 맨발로 건너다녔다함 )’ 세 곳이었다.
‘내삼포’라 부르게 된 데는 ‘대감터’에서 살았던 대감의 의지가 반영된 듯하다. 대감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감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자 ‘삼정포’를 ‘내삼포’와 ‘외삼포’로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럼에도 이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마음을 나누며 산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화촌 초등학교’와 ‘화촌중학교’를 다니면서 새긴 유년의 정이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리라. ‘내삼포’를 둘러보기 위해서 ‘구렁말’ 앞 농로를 따라 ‘노내골(논엣골, 논냇골)’ 어귀 ‘마산’으로 올라가기로 하고 ‘노내골’로 들어섰다. 마산(馬山)’은 말의 형상을 닮았다. ‘마산’뒤로는 염소목장으로 이어지는 ‘가망골’이 있다. 땀 흘리지 않고 길을 내주는 산이 있을까? 높지도 않은데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산이라기보다 나지막한 봉우리다.
‘마산’에서 바라보는 ‘내삼포’는 삼태기를 닮았다.
동산이 어깨를 감싸듯 둘러서고 왼쪽으로는 ‘토산(일감재 뒤편 아래의 산)’으로 이어지는 뫼 뿌리가, 오른쪽으로는 ‘덕고개’에서 이어지는 ‘산수골’이 마을을 품는다. 앞으로는 너른 뜰이 펼쳐지고 앞으로 ‘군업천’이 흐른다.
강을 건너면 ‘노내골’과 ‘복골’, ‘가망골’이 마주한다. 산세를 닮아 사람들이 순박하고 성품이 착하다. 마을 전체가 한마을이라 특별히 부르는 소지명이 많지 않다.
소나무가 밭을 이루었던 ‘동산(외삼포와 내삼포 경계를 이루는 능선)’을 따라 고속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노내골’로 들어선만큼 골막까지 올라간다.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들의 마당가에서는 해바라기가 반긴다.
어느 농가에서 옥수수를 삶나보다. 골짜기에서는 시골에 놀러온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는다. 누가 가재를 잡았나보다. 탄성이 나온다.
‘노내골’은 논이 많다하는데 논은 볼 수 없다. 그러나 골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작은 골짜기가 어찌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가리는 ‘홀통골’을 지나 ‘작은공작산’, ‘삼각우물터’까지 이어진다. ‘노내골’의 물이 시작되는 ‘삼각우물터’는 봄 나물철과 가을 송이철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였다고 한다.
더러는 ‘군업 검은골’까지, 더러는 ‘굴운 큰골’로 가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의 말대로 쭉 내깔렸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송이를 따러 같이 갔다가도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인데, 그곳에 독새(혼자만이 알고 있는 송이밭)밭이 있다고 하여 뒤 보러 가는 척하며 사라지는 곳이라 한다. 산이 밀려왔다.
굴속에서 울려나는 웅숭깊은 소리다.
광산굴에서 새들이 몰려나온다.
아니 벌말골에서 쇠기재골을 넘는 바람이다.
바람을 몰고 오는 새는 얼마나 큰 날개를 가졌는가
깃털 몇 개가 빠져 덕밭골을 간다.
귀틀집 뒷문을 빠져나온 연기가 돌연 푸른 그늘에 스민다. 가는골 어귀에서 안개가 산문을 닫자
기도원 평상에 누었던 그늘을 쓸어내리며 십자가 외등을 켠다.
사시래골에서 누가 살았더라
무당개구리가 저녁울음을 쏟아낸다.
농박골에도 장마가 지나가고 둠벙마다 덤벙덤벙 뛰어들어 허리잡기를 하더니 꼬리잡기를 한다. 무성골이 좋다 좋아도 나는 죽어도 못 들어간다.
소가 뻗대고 뿔을 흔든다.
알았다 늙은 최영감은 홀통골로 고삐를 끌고 들어간다.
소식없다 했더니, 토끼쥐방굴 안씨네 대문에는 여섯째 딸의 금줄이 걸리고 큰딸은 부엌에서 멱국을 끓인다.
굴아우 어귀에서 가재를 잡던 셋째딸은 갈받골 이씨네 맏아들을 꼬득여 성냥과 냄비와 밀가루를 퍼내오는 동안 소꿉놀이 살림을 차린다.
하느재에 걸쳐있던 초승달이 한 개울 약수터에 풍덩 뛰어든다.
어이 시원하다.
졸시- 노내골 풀이

‘노내골’과 ‘가망골’, ‘복골’을 잇는 다리가 놓이고 길도 넓어졌다.
골짜기를 오르면서 본 황토집으로 들어갔다. 시골의 정을 되살리며 살아보자고 부부가 손수 지은 황토집이다. 다른 민박집과 별다를 것 없지만 손맛이 남다르다.
차 한잔의 여유랄까? 매미가 두차례나 울다갔다. 이왕 저녁 먹고 쉬었다가리라. 노을이 깊다. 집 앞의 은사시나무가 푸른 그림자를 늘인다. 바람이 눈발처럼 차다.
한겨울 눈이 내리면 꼭 찾아오겠다며 예약해 놓고 ‘노내골’ 내치기로 나왔다. ‘마산밑’으로 이어지는 길과 개울을 건너 ‘동회울’로 이어지는 길이 네거리를 이룬다. ‘마산밑’으로는 ‘가망골’과 ‘복골’ 어귀까지 길이 닿아있다.
‘가망골’은 ‘마산’ 뒤편으로 이어지는 골이다. 넓은 염소목장이 아름답다. 어귀에 들어서면 골짜기가 아래, 위로 갈라진다.
‘복골’은 복주머니를 닮았다. 그러나 이곳에 살던 총각이 열심히 장작을 해다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까닭에 ‘장자울산(장작골)’이라 부르는 작은 봉우리가 있다. 그 위쪽에 ‘작은복골’도 있다.
‘동회울’에는 ‘맹호부대’의 사격장이 있었다.
‘맹호부대’는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별칭이다.
1953년 9월에는 용맹성과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맹호를 부대표지로 제정하였으며, 1965년 8월 국방부로부터 파월전투사단으로 지명되고, 사단명칭이 맹호부대로 명명되어 1965년 11월 초까지 예하 각 부대를 베트남의 전술책임지역에 배치·완료하였다.
베트남에서의 임무를 완수한 맹호부대는 1973년 2월3일부터 3월10일에 걸쳐 파월 7년 5개월 만에 완전 귀국하였으며, 같은 해 3월 21일 부대명칭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바뀌었다. ‘강재구 소령(수도사단 1연대 3대대 중대장)’도 맹호부대 소속이었다.
‘동회울’ 바우벼랑을 따라 내려가면 ‘굴운 동막골’로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 ‘구렁말’로 이어지는 농로를 걷는다. 넓은 들녘에서는 ‘홍천 삼포 탑라이스’가 싱싱하게 자라고 들녘의 쉼터 농막은 느티나무 푸른 그늘이 드리워 시원해 보인다. ‘탑 라이스’는 쌀 혁명 프로젝트로 탄생한 순수 우리 품종의 쌀이다. 고품질 목표를 정하여 생산·유통 단계별 기술체계에 따라 엄선된 쌀로써 소비자가 전국 어디서나 그 품질을 신뢰하여 구입할 수 있는 전국 단위 브랜드 명칭이다.
또한 수입쌀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고품질로 소비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농촌진흥청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생산 유통 된다.
따라서 ‘탑 라이스’의 재배 및 관리, 생산 과정은 까다롭다. 그 첫 단계는 품종혼입 방지를 위하여 지역별로 한 품종(DNA검사)만 재배한다.
생육환경에 알맞도록 파종량을 줄이고 적정 포기수를 심을 뿐만 아니라 최적기에 모내기를 실천하고 토양과 수질을 분석하여 꼭 필요한 비료량(질소 7Kg/10a 이하)만 준다.
친환경적으로 재배하고 병해충 방제를 최소화하며 품질향상을 위한 물 관리, 무효분얼 억제, 잡초를 제거한다.
그러함에도 엄격한 품질검사기준에 합격된 쌀만 공급하는데 자체와 농촌진흥청에서 년 간 3~4회 실시하고, 햅쌀 같은 밥맛을 위해 수확 후 자연통풍순환건조 등 적온에서 건조(45~50℃)하고 쌀 품질유지를 위해 15℃이하 저온저장하며 도정 후 1개월 이내에 판매(리콜제 실시) 한다. 도정ㆍ유통단계에서도 주기적으로 품질을 검증한 후에야 소비자가 믿고 구매할 수 있도록 생산 이력을 공개한다.
‘내삼포’의 들녘에서 ‘탑라이스’가 재배되는 것은 축복이다. 청정 홍천의 깨끗한 공기와 토양, 풍부한 일조량, 잘 정리된 수리시설로 공급되는 홍천강의 1급수 맑은 물은 자연이 주는 혜택으로 좋은 쌀 생산에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4년 연속 ‘탑라이스’ 생산단지에 선정되어 대한민국 쌀의 대표 품질브랜드 ‘탑라이스’를 생산하고 있다. 넉넉한 인심을 바탕으로 ‘탑라이스’ 생산 매뉴얼 재배기술을 4년차 습득하여 세계 최고 밥맛의 쌀생산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내 최초로 GAP 인증을 받은 ‘홍천강수라쌀 탑라이스’는 이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이다.
‘평화(平和)’란 모든 사람이 쌀을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일이다. 공동체적 삶을 이끌어나가는 ‘수라상마을(내삼포의 마을브랜드)’은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전통테마마을 사업 추진에 따른 발전기반 시설 정비다. 주말농장을 이용한 나무 가꾸기 운동과 어린이 농촌체험행사, 마을 주민 및 자녀 초청 교류 행사 등 다양한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통하여 홍천을 대표하는 마을 휴양 관광지로 가꾸는 사업이다. 삶은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웃음을 나누는 일이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오감으로 터져 나오도록 해야 한다. 푸른 들녘에 부는 바람처럼 삶 또한 싱싱한 정기를 나누기를 바라면서 ‘수라상마을 체험관’으로 들어서는데 옥수수 냄새가 풍긴다. 우선 시원한 옥수수차를 건네며 솥에서 삶은 옥수수를 맛보라며 내놓는다. 옥수수 한 토새기를 다 먹고 둘러보니 소나무가 한밭 가득 푸르다.
‘소나무’는 한민족의 혼이 담긴 나무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다.
소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린 집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쳐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걸 막았다. 소나무 장작불로 지은 밥을 해 먹었으며, 그 불로 온돌을 따뜻하게 데워서 살았다.송판(松販)으로 가구를 만들었으며, 솔가리로 불쏘시개를 했고, 송편을 해 먹었고, 솔잎주를 담아 마셨다. 소나무 꽃가루로 송화주(松花酒)를 빚고, 소나무 새순을 넣고 빚은 술인 송순주(松筍酒)를 즐겨 마셨다. 구황이 들 때는 소나무 송기(松肌)를 벗겨서 떡도 만들고 죽도 쑤어서 먹었고, 송화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먹고, 솔잎으로 차를 다려 마시기도 했다.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고, 송이버섯은 향과 맛에서 소나무가 길러낸 최고의 선물이다.
또, 소나무 껍질에 홈을 파서 송진을 모아 썼으며, 소나무 뿌리를 건류(乾溜)하여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고,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송연(松烟)으로 먹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여승들은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송낙을 쓰고 다녔으며, 양반들은 송진이 뭉친 호박으로 마고자 단추를 해 달았고, 산림처사들은 송도(松禱)와 송운(松韻) 즉,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운치 있는 맑은 소리를 즐겼으며 선비들은 소나무의 푸른 빛깔 송취(松翠)와 소나무 그림 병풍을 펼쳐 두고 즐겼다.
생을 마친 뒤에는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나무와 함께 하고, 소나무에게 신세를 졌다. ‘내삼포’의 ‘중간말’ 길가에 심어진 소나무는 이희봉 박사(한국나무종합병원㈜ 원장)의 시범재배포장이다. 소나무는 쓰임새에 따라, 자라는 지역에 따라, 뻗은 줄기에 따라, 잎의 모양에 따라 이름이 달랐던 만큼 이름도 적송(赤松), 춘양목(春陽木), 황장목(潢腸木), 미인송(美人松), 금강송(金剛松), 육송(陸松), 해송(곰솔), 반송, 황금송, 백송, 리키다소나무, 테에다소나무, 남복송(男輻松),여복송(女輻松), 처진소나무, 다행송, 일엽송, 다닥다닥소나무, 용소나무,도깨비방망이소나무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내삼포’는 ‘외삼포’의 품안에 들어있어 고개가 많다. ‘삼포초등학교’ 뒷편의 골짜기는 ‘사창골’이다. 옛날에 죄수를 가두었다 하는데, ‘사창골’을 따라 동산을 넘는 ‘사창고개(덕고개)’는 ‘건금리 버덩말’로 이어진다.
‘꼬불랑고개’는 ‘건금리 버덩말 밤나무골’로 넘던 고개다. ‘건금리’의 아이들이 ‘삼포초등학교’를 빨리 가기위해 개척한 고개다.
‘서낭고개’는 서낭당을 지나 버덩말로 넘던 고개다.
서낭당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터를 ‘서낭터’로 부른다. 이희봉 박사의 ‘소나무 생장관리 시험포’는 ‘꼬불랑고개’와 ‘서낭당고개’사이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고 마을회관과 수라상 체험관이 자리한다.
이 터는 한국전쟁 때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터라하여 '부대마당'이라 불렀다.
‘서낭터’아래는 ‘떼버덩’이다.
‘구렁말’은 ‘토끼울’을 넘어 화촌중학교 울타리를 따라 이어지는 길 안쪽 구렁이다. ‘구렁말’에서 국도를 건너 ‘노내골길’을 따라 걷다가 느티나무 농막에서 교회쪽을 바라보면 작은 '토산'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곳을 ‘대감터’라고 하는데 대감이 누구였는지 알 수는 없다. 향교지에는 ‘내삼포’에 ‘홍천향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지만 고령의 어르신들도 기억에 없다고 한다. 아마 성산에 있던 향교를 두고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
강에는 ‘경소(정가소)’가 있었다. ‘큰경소’,‘작은경소’가 있었지만 하천을 정비하면서 함께 사라졌다.
다시 ‘일감재’를 돌아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경당에서 읊조리는 소리인가 들녘을 건너오는 바람소리인가?
아니 강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같다.
햇살이 반짝이며 흐르는 ‘화양강’은 화서 이선생이 꿈을 펼쳐 보이기 위하여 부르던 강이 아니던가!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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