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의 삶과 고속도로의 삶이 교차하는 곳 - ‘군업’이다.
  군업은 홍천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선사시대 유민들의 오랜 삶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1986년 5월23일 강원도 기념물 제 56호로 지정된 강원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608-1 너븐들에 16기의 지석묘가 보호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장수 발자국바위라고 하는 바위도 있었지만 찾아 볼 수 없고. 길 오른편에 한곳 왼편에 한 곳 등 두 군데  고인돌이 남아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뚜껑돌을 덮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홍천군 화촌면 군업 2리 지석묘는 형태상 바둑판식이지만 받침돌이 없어 개석식으로 재분류된다.
  지석묘 주변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어 이 지역에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은 ‘괴여 있는 돌’이란 뜻으로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는데 ‘지석묘’의 명칭은 ‘고인돌(支石)’이 있는 ‘무덤(墓)’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하고, 켈트어(북아일랜드 언어)로는 탁자란 뜻인 ‘Dol’과 돌이란 뜻인 ‘Men’이 합쳐져 ‘돌멘(Dolmen)’, 영어로는 ‘Table Stone’이라고 한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6만기 정도가 분포하며, 숫자상으로 한국에 남·북한을 합쳐 4만기 정도가 있다. 그 중 군업 너븐들에 50여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군업천 강가에 자리를 잡은 군업2리 너븐들 지석묘군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불과 30년도 안 된다.
  ‘너븐들’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다는 고인돌들은 농사짓는데 걸림돌이 되어 논둑을 쌓거나 방천으로 쓰이고 더러는 군부대에서 가져가 돌담을 쌓느라고 가져갔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더군다나 경지정리를 하면서 더러는 땅속에 묻히고 지금 묘지가 있는 곳에 모여 있던 고인돌들은 묘지 덕분에 훼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돌을 둘러보며 나는 선사시대의 삶을 살았던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고인돌 아래 매장되었다는 유물은 ‘춘천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곳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절차가 좀 까다로워 어렵게 만났다. 민무늬 토기(무문토기)였다.
  군업 너븐뜰에 살던 선사시대 인들은 무덤 속에 왜 그 삶의 도구를  남기지 않았을까?
  또한 아무런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청동기 시대라고 시기를 정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가 선석기 시대와 다른 사회로 돌입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신석기 시대의 무덤은 특별히 크거나 많은 부장품을 갖고 있는 무덤이 없다. 이로 보아 공동체 성원 사이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신분적 차이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무덤은 사람들의 관계가 불평등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십 명,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곧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의 출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유물을 두고 추측해 낼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끝이 없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느 군왕이 업을 이루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양정’에서 마을을 둘러본다. 
  군업은 사통팔달의 중앙에 자리한다. 큰 강을 끼고 있고, 강 유역에는 퇴적층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농토와 농사가 활발했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화전(火田)이 그리 많지 않다. 너븐들 뒷산 마을은  ‘안산’이라 부르는데 골이 없고 산뒤로 ‘검은골’과 ‘독적골’을 넘나드는 고개가 있었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라 여겨진다.
  지금은 ‘양지말’ 뒷산인 ‘더럭등’을 따라 동서고속도로가 건설 중이다. 더럭등의 상상봉은 ‘갈매봉’이다.
  갈매봉으로 이어지는 ‘큰골’ 어귀에는 서당이 있었다.  초은 이계선 선생이 훈학을 하던 곳이다.
  몇년전까지 엿가공 공장이 있어 군업의 자랑이었다.
  지금은 뻘겋게 녹슨 굴뚝만이 엿공장이었음을 말할 뿐이다.
  엿공장이 들어서기전에도 집집마다 엿을 고아 장을 보러갔다. 엿고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했다.
  ‘엿’은 곡식으로 밥을 지어 엿기름으로 삭힌 뒤 겻불로 밥이 물처럼 되도록 끓이고, 그것을 자루에 넣어 짜낸 다음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고아 만든 달고 끈적끈적한 음식이다.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는 검은엿과 흰엿이 처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는 ‘재료는 쌀 소두 1말, 엿기름 1되 3홉, 더운물 1동이 반이다. 쌀을 잘 씻어서 물에 충분히 불려서 시루에 앉혀서 쪄놓고, 더운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항아리 속에 엿기름가루 2줌을 놓고 뜨거운 지에밥을 그 위에 넣고, 손 담그기에 알맞은 정도의 더운물을 붓고 엿기름가루 남은 것은 축축하게 물을 뿌려놓았다가 밥 위에 방망이로 잘 저어서 덮어 두었다가, 7~8시간 후에 보면 맑은 물이 떠오를 것이니, 주머니에 퍼 담아 주물러 짜서 식기 전에 솥에 붓고 끓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엿의 원료는 찹쌀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그 밖에 멥쌀·옥수수·조·고구마 녹말이 많이 쓰인다. 각 지방에 따라 유명한 엿은 전라도의 고구마엿, 충청도의 무엿, 강원도·경상도의 황골엿 일명 옥수수엿·강냉이엿, 제주도에는 꿩엿·닭엿·돼지고기엿·하늘애기엿·호박엿 등이 있다.
  엿은 우리의 생활 중에 ‘엿을 먹으면 시험에 붙는다’고 하여 시험을 치르러 가는 사람에게 꼭 합격하라고 선물하기도 하고 당일 아침에 엿을 입에 물고 가기도 하며, 혼례 때에는 엿을 보내면 시집살이가 덜 심하다고도 하며, 시집식구들이 엿을 입에 물고 먹는 동안 새 며느리 흉을 잡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한다는 등의 풍습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삼일근친의 이바지음식으로 엿을 보내기도 한다.
  또한 엿은 한자로 ‘이당(飴糖)’이라하고 한방에서는 ‘교이’라 하여 어린아이에게 쓰이는 여러 처방 중 가장 으뜸이 되며 대표적 처방인 ‘소건중탕(小建中蕩)’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너무 중요한 약재라고 한다. 여기서 ‘건중(健中)’이라 할 때 중(中)은 오장육부 중 가장 중심인 위장을 말하는 것으로 소건중탕에 들어가 있는 여러 약재 중에서도 교이의 효능을 의미하여 지어진 이름이라한다.
  엿에는 엿기름을 넣어야한다. 엿기름이란 보리에 물을 부어 싹이 트게 한 다음에 말린 것을 말하며 빻아 가루를 낸 것이 엿기름가루다. 어머니들은 질금가루라고 하신다. 사투리다.
  엿기름은 녹말을 당분으로  바꾸는 효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식혜나 엿을 만드는 데에 쓴다. 홍천의 앉은뱅이 술을 만드는데도 엿기름을 쓴다.     
  과거 궁중에서 조청이 자주 쓰였다고 하는데, 특히 무정과(무를 잘게 썰어 삶은 후에 조청에 조린 것)와 강정(조청에 콩을 버무려 만든 것)은 왕자들의 두뇌발  달을 돕기 위해서 쓰였던 음식이니만큼 아이들의 영양상태 개선과 두뇌발달에 조청을 권해볼만한 음식이라 하겠다.
  홍천 엿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집은 이완섭씨 댁이다. 전통의 방법 그대로 큰 가마솥에는 홍천 찰옥수수와 엿기름을 버무려 끓인 엿밥이 가득했다. 베자루에 넣고 맷돌을 얹어놓고 엿물을 짜내는 수고로움은 기계가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장작불로 조청을 고아내고 있다한다.
  옛날 생각이 난다.  할머니가 가마솥에 엿물을 졸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입은 즐거웠다. 달달한 엿물도 얻어 마시고 거품을 낼 때면 숟가락으로 엿누룽지를 긁어 먹었다. 이불 거품이 일면 불을 빼고 적당히 식기를 기다려 행사 때 쓸 만큼 넉넉히 항아리에 떠 놓고 쌀 튀밥, 뻥튀기, 콩을 볶아 강정을 만들어 주셨다. 
추억이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풍족하고 넉넉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다는 시간이 마음속에 남아있어 행복하다.
  엿을 먹으려면 오래도록 기다려야 했기에 밤새도록 숨바꼭질도 하고 마을길도 여러 바퀴 돌았으리라.
  군업 양지말은 남향의 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군업천이 흐르고 뒤로는 나직나직한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아양정’이 자리잡은 ‘무수매기’와 ‘우뭇골’을 지나면 ‘큰골’이다. 큰골 어귀는 ‘용호뜰’이다. 용과 호랑이의 형상이라 명당이라 한다. 따라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 서 있으며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초은(憔隱) 이계선 훈장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있는 원주이씨 사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후에 김순익씨가 정각(亭閣:정자)을 지었으나 폭격으로 무너지고 후에 원주이씨 종친회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면서 아양정(峨佯亭)이란 현액(懸額)을 걸었다.
  ‘용호뜰’ 안으로 들어서면 ‘호롱골’, ‘애막골’ , ‘복곡골’, ‘은골’이 있고 막치미에서 ‘갈매봉’으로 오른다. ‘큰골’이란 이름에 걸맞게 송이도 많이 나고 복령도 많이 캔다고 한다. 
  ‘삼밭골’, ‘논골’ 어귀에는 고속도로 건설사무소가 들어서 있으며 ‘뒷골’을 지나 ‘더럭구미’를 돌아가면 ‘무레이’ 어귀에 닿는다. 
  양지말 앞 군업천은 군업의 젖줄이다. 구비를 이루며 둔덕을 이룬 땅에는 보를 막아 물길을 냈다. 가장 큰 보는 ‘귀새보’다. 너븐뜰을 다 적실만큼 큰 물을 실어 나른다.
  또한, 군업 다리 위쪽의 밑보도 너븐뜰로 흘러든다. 아양정이라 물이 맴돌다 가는 ‘구멍소’는 메기굴이 있다 할 만큼  메기가 잘 낚였으며 큰골 앞 ‘늑시보’와 논골 앞의 ‘서울박씨네보’는 ‘더르래미(더래이)’로 흘러든다. 또한, 뒷골 어귀의 ‘물안보’도 ‘더르래미’로 흘러드는 물고다.
  더드래미는 외삼포 2리 ‘옻남여울(칠탄)’이다. 옻남여울은 ‘더르래미’와 ‘무랭이’, ‘독적골(독짓골,더치골,독점골)’을 아우른다.
  ‘옻남여울’은 옻나무 약수가 솟아나는데 기인한다.  
  옻남여울은 지금도 찾는 이가 더러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산으로 나다니다보면 풀독도 오르고 옻도 올라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는데, 이곳 옻남여울의 약수를 마시고 목욕을 하면 깨끗하게 나았다.
  처음에 이곳을 찾는데 약수터 앞 시각장애인의 안내를 받았다.
첫  마디가 ‘옻이 올라서 왔소?’하는 물음이었다. 짐짓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면 잘 왔다며 효험을 볼 거라고 했다. 
  옻남 약수는 군업 다리를 건너 방죽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장이 끝나는 집 뒷길로 들어가면 밭 가운데 풀 섶이 뒤덮인 나무속에 있다. 여전에는 큰 옻나무가 있었다하는데 고사하고 지금은 둥치가 굵은 느릅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
  약수는 두 군데서 나왔다. 위쪽의 약수는 마시는 물이고 아래쪽의 약수는 몸을 씻는 약수라 한다. 
  약수는 뚜껑이 덮여 있고 오래전에 누가 놓고 갔는지 물 대접과 물바가지가 낙엽이 쌓여있다.
  낙엽을 치우고 뚜껑을 열자 맑은 샘물이 고여 있다. 우선 손을 씻고 땀띠가 돋은 목덜미를 축이고 마시는 물 한바가지를 떠 마셨다. 속병도 깨끗이 씻어내 주십사하는 축원도 잊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모 방송국에서 외삼포 산초울마을을 소개할 때 방송에 나간 이후로 찾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군업강과 옻남약수는 다른 마을이 갖지 못한 좋은 소재이다. 이정표도 세워 찾는 이들이 쉽게 다녀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옻나무 약수는 날마다 맑은 약수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약수를 마시고 ‘독적골’로 올랐다. 골 안막까지 고추밭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는데 독적골, 독점골 ,독짓골, 더치골, 독점골 등 발음이 분명치 않다. 독사가 많아서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독적골 어귀에는 골짜기 물을 받아 돌리던 물레방아가 있었다.
  골 내치기에서 골 안으로 올라가면 ‘재피골’, ‘언덕골’, ‘배나무골’을 지나 ‘검은골’로 넘던 고개가 나오고 안막을 따라 올라가면 ‘공작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독적골에서 나와 큰길에 돌아보니  아래 집들이 정겹다.
  ‘큰귀새골’, ‘작은귀새골’어귀에는 공동묘지가 있어 군업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데 무서워했는데  특히, 짓궂은 사내들이 이곳에 숨어 놀려주기도 하여 독적골을 넘어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 다리를 건너면 ‘무레이’ 어귀다. ‘더럭등’ 뒤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인데 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몇몇 골짜기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무레이는 골이 깊고 장마기 지면 주음치 아이들이 이길을 넘어다니기도 했다. 어귀에서 들어가면서 ‘불당골’, ‘배나무골’, ‘고메굴’을 지나면 ‘바람부리’고 다시 ‘콩밭골’을 지나면 ‘작은무레이’다. 갈림길인데 ‘주음치’로 넘어갈 수도 있고 ‘바른골’을 따라 ‘술음재’로 갈 수도 있다.
  ‘무레이’를 지나면 삼거리다. ‘사창고개’를 넘어 건금리 -성산으로 가고, 내처 달리면 ‘삼포초등학교’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는지 아이들이 주르르 수돗가로 달려가 머리에 물을 뒤집어쓴다. 저 생의 역동성- 그 환한 웃음.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그래.
  미래는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보다는 고인돌의 길을 걷는 자의 세상이 될 것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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