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지’다.
‘장평 피난터’에서 발원한 물과 ‘도광동 큰아홉마지기 백가터’에서 발원한 물이 합수를 이루는 곳이다. 물줄기는 모두 매봉산 줄기지만 ‘도광동’에서 흘러온 물줄기는 공작산 줄기의 물도 받아 흐른다.
‘조하대’에서 ‘공작동’을 잇는 길이 열리면서 공작산 산행 들머리도 고갯마루에서 시작된다. 고갯마루 아래에는 공작산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를 돌아나가면 444번 지방도에 닿는다.
‘아우라지’는 합수목이다. 대표적인 아우라지는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5리의 아우라지로 ‘골지천’과 ‘송천’이 합쳐져 한강의 본류를 이루는 곳이다.
‘아우라지’는 어우러진다는 뜻으로서,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한 강을 이루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군업’의 ‘아우라지’도 만만치 않다.
‘장평’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잔잔하고 부드러운 여성성이라면, ‘도광터 피나무구비’를 지나 ‘당무’를 흘러내린 물줄기는 사내의 기상을 닮았다. 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으니 그 터전은 부드럽고 땅은 기름졌다.
‘아우라지’를 건너 ‘답연밭’으로 들어선다.
‘답연전(田)’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물이 휘돌아 굽이굽이 여울을 만든다. 따라서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녔다 하여 ‘답(踏)연밭’, 또는 논이 귀하던 시절 물이 휘돌아가며 이룬 연이은 둔덕에 논이 있었다 하여 ‘답연(沓連)밭’이라 부른다. 踏이든 沓이든 논물을 보러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우라지’에서 부드럽고 거친 물줄기가 몸을 섞어 ‘군업천’을 이루고 처음 맞이하는 ‘웃답연밭’은 앞뒤로 산이 둘러서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조용하고 한적하다. 많은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진 않았지만 옥토를 이루어 농사를 크게 짓던 곳이다. 길이 없어 돌다리를 건너다녀야 했지만 다리가 놓이고선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돌다리가 놓여있었다. 널다리를 놓기도 했으며 섶다리를 놓기도 했지만 잔잔한 물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다리는 돌다리였다. 큰물이 지나가고 나면 개울은 잔잔한 여울을 이룬다. 돌다리만 제대로 놓는다면 별다른 손이 필요치 않았다.
돌다리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인연의 끈이었다.
그 돌다리는 ‘웃답연밭’에서 ‘아랫답연밭’으로 가는 개울에 놓여있고 또 ‘아랫답연밭’에서 군업 ‘양지뜰’로 ‘양지뜰’에서 다시 ‘음지뜰(응달뜰)’에도 놓여 건너다녔다.
다리가 놓이고 나서 ‘웃답연밭’은 펜션이 자리를 잡는다.
‘웃답연밭’에서 제법 큰 골짜기는 ‘망상골(부성골)’이다. 개울을 내려다보며 역시 펜션이 자리한다. 고개를 넘으면 ‘말골’로 이어지는데 ‘당무’로 뽕을 따러 다니던 길이었다. ‘부성골’ 어귀에서 강가로 이어지는 길옆에는 민박이며 매점, 식당이 들어서 있고 산굽이를 돌아가면 너른 들이 나온다.
산굽이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지금도 ‘서낭바위’가 놓여있다. 지금은 제를 올리지 않지만 예전에는 제법 큰 제를 올리기도 했다.
서낭당 앞개울에는 물이 머물다가는 ‘서낭당소’가 있었다.
‘답연밭 피난터골’ 능선마루의 약수는 효험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졌다. 능선마루 바위등강의 작은 굴에서 나오는 약수인데 약이 귀했던 시절 만병통치약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셨다.
어느 도반이 암자를 짓고 도량을 닦기도 했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웃담연밭’ 구석구미에는 ‘비둑치’와 ‘장작팬골’이 개울에 닿는다.
돌다리를 건너 ‘아랫답연밭(건넌말)’로 들어선다. 뒤로는 산이요 앞으로는 들과 강이 감고 돈다. 배산임수의 좋은 터다.
멀리 조립식 건물 한 채와 빈집이 눈에 띄고 강가로 둥글게 이어지는 제방 둑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방천처럼 서있다. 김명수씨와 남궁씨네가 살았던 마을이다. 오랜 친구들이라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이맘때쯤 놀러가서 옥수수, 감자를 삶아먹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맘껏 웃으며 멱을 감고 놀던 때였다.
지금은 제방공사를 하고 돌다리를 놓았지만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지대다.
돌다리 가운데 서서 ‘상허 이태준’ 선생의 ‘돌다리’를 떠올린다.
본질적 가치보다 금전적 가치를 중시하는 요즘의 사회를 비판하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세대간의 가치관과 삶의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이 소설은 서울에서 이름난 의사인 아들이 병원 확장을 위해 아버지에게 땅을 팔자고 권유하러 내려오지만, 아버지의 땅에 대한 애착과 농부로서의 신념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꿈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고쳐 놓은 돌다리를 건너 저녁차를 타러 가버리고, 저녁에 잠도 달게 오지 않아 젊어서 서당에서 읽던 백낙천(白樂天)의 시 늙은 제비 한 쌍을 두고 지은 노래를 떠올리는 아버지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제 뱃속이 고픈 것을 참아 가며 입에 얻어 문 것은 새끼들부터 먹여 길렀으나, 새끼들은 자라서 나래에 힘을 얻자 어디로인지 저희 좋을 대로 다 날아가 버리어, 야위고 늙은 어버이 제비 한 쌍만 가을 바람 소슬한 추녀끝에 쭈그리고 앉았는 광경을 묘사하였고, 나중에는, 그 늙은 어버이 제비들을 가리켜, 새끼들만 원망하지 말고, 너희들이 새끼 적에 역시 그러했음도 깨달으라는 풍자(諷刺)의 시였다.(‘돌다리’ 중에서)
분명 자식된 사람에겐 효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지만, 나이 많은 사람에겐 자식의 불효 앞에서 어쩌면 그것이 천지자연의 이치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하여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람이란 하눌 밑에 사는 날까진 하루라도 천리(天理)에 방심을 해선 안 되는 거다 …….’(‘돌다리’ 중에서)라며 마지막 구절에서 땅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신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돌다리를 건너 제방에 올라보니 밭에는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텅 빈 충만’이라고 할까?
‘선바위’의 전설과 청정 홍천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다만 돌다리를 건너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그래서 청정지역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홍천군은 서울대 시스템면역의학연구소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아랫답연밭’이 예정지다.
이 일대 5만여평 부지에 2,600평의 규모로 연구소가 건설되며, 서울대는 부지확보와 시설물 건축을 계획하고, 홍천군은 연구단지와 연결된 인프라 구축, 인·허가 대행 등 행·재정적 지원을 담당하기로 하고, 2010년 9월 개소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연구소를 중심으로 의료관련 기업과 주거단지, 배후 지원시설 등이 건설돼 의료관련 R&D 클러스터가 조성될 전망이다.
또 연관기업 유치에 따른 고용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지역 의과대학 및 바이오 벤처 회사들 간의 체계적인 산학협력을 통한 의료관련 산업 발전, 서울대 의대와 연계한 지역민들의 의료시혜 향상 등도 기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길 닦아주고, 부지 내주고, 접근조차 까다로운 고귀하신 교수님들의 휴양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철저한 감독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아래담연밭(건넌말)’ 구석구미에는 ‘국정골’이 이어지고 ‘선바위’가 서있다. 숲이 우거져 바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건넌말’에서 개울을 건너면 다시 버덩이 나오는데 ‘안말 양지뜰’이다. 다리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이다. ‘안말 음지뜰’까지 돌다리를 놓았지만 ‘아랫답연밭’으로 가는 길은 신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너야 한다. 그러나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공작산폭포’를 오른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햇살은 작렬했다. 자주 내린 비로 가지 못했던 ‘공작산폭포’를 보러 떠났다. 비로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한 ‘쇠바랑께비’ 개울을 건너 ‘음지뜰’에서 수로를 따라 ‘뜸메기골’로 들어섰다. 계곡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흘러왔지만 살 냄새에 굶주린 날파리가 귀찮으리만큼 따라붙었다.
차가 다닐 만큼 길이 넓다. ‘봉앞’이다. ‘터골’, ‘뜸메기골(뜸목골)’ 어귀이면서 ‘선바위’로 올라가는 갈림길이다. ‘공작산(궁적산)’의 봉우리 앞이라 하여 붙여진 ‘봉앞’에는 안서방네가 살았다.
‘봉앞’을 지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이정표는 ‘밤나무골(터골)’과 정상오르는 길(뜸메기골)을 가리킨다. ‘터골’로 들어서면 숯쟁이 지씨네가 살았던 ‘숯가마골’이 나온다. 공작폭포로 가는 ‘뜸메기골’로 접어든다. 이제부터 길은 오소리 길만큼 좁다. 그러나 물소리가 다르다.
‘뜸메기(뜰메기, 뜸목골)’의 합수점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들어서면 ‘작은너래바위’가 나오고 조금더 올라서면 폭포의 물소리가 들린다. ‘너래바위’다. 마을사람들은 제사를 지낸 다음날 놋그릇을 이고지고 이곳으로 왔다. 아이들은 각재(가재)를 잡고 어른들은 금모래로 그릇을 닦았다. 뭔 흙인지 모르지만 금빛이 났고 그릇이 잘 닦였다.
‘너래바위’ 물소리를 따라 오르면 정말 비단 같은 물줄기가 바위 위로 흘러내린다. 폭포위로 올라가다 미끄러졌다. 이왕지사 쉬었다 가자. 너른 암반의 물미끄럼을 타며 더운 몸을 식혔다.
산골짜기의 맑은 물결이 잔잔하게 흐른다. 다시 계곡으로 이어지는 너래바위와 소를 지나니 꼭 공작새 울음 같은 물소리가 들려왔다.
폭포다. 폭넓게 펼쳐진 삼단 암반 위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에 물안개가 피어난다.
폭포는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청량제와 같다. 산이 빚어낸 오묘함 뿐만 아니라 산행의 노독과 고독을 달래준다.
정상에 오르는 지름길도 있다. 폭포 하단부 오른쪽 능선인 북동릉을 타고 오르면 계곡보다 조금은 빨리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다시 일어나 길을 간다. 돌무더기의 집터가 보인다. 나물이 많아 동네 아낙들은 이곳 계곡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흔적이 남아있는 집터는 공작산 금광을 캐던 인부들을 따라 들어온 들병이들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주막 겸 밥집인 셈이다.
좀 더 올라가면 공작산에서 금을 캐던 금광굴이 있다. 박쥐가 많이 살아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에 푸드득 날아 나오는 박쥐들이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금광굴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비로소 한 마리의 공작이 된다.
늘 돌아서는 길은 아쉽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머물 수 없다. 산을 내려오는 이유다.
‘뜸메기골’과 ‘터골’ 어귀에서 내친 걸음에 ‘선바위’까지 둘러보기로 하고 강을 따라 올라간다.
‘선바위뜰’이다. 세 다랑구지의 긴 논이 이어진다. 할머니 혼자서 장마에 터진 둑을 손질한다. 전봇대가 서있고 녹슨 콘테이너가 놓여있다.
개울 건너편 ‘양지뜰’로 수로가 이어지고, ‘선바위’ 기슭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은 물이 깊어 ‘아랫답연밭’까지 갈 수 없다. 결국 ‘선바위’는 가까이서 보지 못하고 ‘아랫답연밭’과 ‘선바위뜰’에서 바라만 보다가 다시 돌아서 ‘음지뜰’로 내려왔다.
‘터골’ 어귀에서 벼랑을 따라 ‘안말’ 쪽으로 내려오면 ‘닥밭양지’다. 닥나무를 심어 종이를 뜨던 최순응씨네가 살던 집이다. 다시 벼랑을 따라 내려오면 ‘성골’이다. 골 안으로 들어서면 ‘진성골’과 ‘큰성골’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이번 비에 무너져 내렸는지 수로가 주저앉았다.
요즘 고야가 제맛이다. 서리를 맞아야 익는 서리고야와 누렇게 익는 밀고야를 오랜만에 보았다. 예전에는 참 귀했던 여름철 먹거리였는데 지금은 그냥 떨어져 문내를 풍긴다.
바지를 벗고 또는 돌다리를 밟고 강을 건너야 만나는 ‘아랫담연밭’, ‘선바위뜰’, ‘양지뜰’ 그리고 ‘음지뜰’.
둥그러니 산이 감싸는 섬 같은 마을이다.
사람이 떠나고 자연이 이루어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음지뜰’에는 안기환씨네가 살고 있고, ‘지치박골’ 어귀에는 연화사란 암자가 있다.
예전에는 ‘공작폭포’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두시간은 족히 걸었는데 ‘쇳바람께비(쇠바랑께비, 쇠벼랑구비)’를 지나 ‘음지뜰’에서 다시 벼랑을 끼고 돌아갔다. 이 벼랑길은 ‘선바위’를 돌아 ‘아랫담연밭’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길에 수로가 놓여있어 공작산 산행길이 되고 있다.
‘웃답연밭’부터 ‘쇠바랑께비’까지 이어지는 물굽이는 산과 어울려 군업천이 이루는 아기자기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선명해진다.
그림 속에 나올법한 산과 산 아래 작은 농가, 길가에 핀 꽃들은 한적한 시골의 한때를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산으로 이어지는 ‘지치바위골’과 ‘큰성골’ 개울건너 ‘웃뭇골’과 ‘큰골’ 사이의 개울은 산과 하늘을 품고 마냥 맴돈다. 구름이 지나가고 잠자리가 꼬리치고 간다.
다시 돌다리를 건너면 ‘쇠바랑께비’다. 바랑은 벼랑이고 낭떨어지기다. 그 아래를 흐르는 물은 ‘부엉바위’를 내비춘다.
김영희 시인은 시인의 고향 ‘군업’을 눈에 보이는 듯 향토적 언어로 묘사하고 식구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허기와 기다림의 시간을 더듬고 있다.

햇살에 모래알 자글자글 끓어오르던 군업갱변
점심바위를 지나
참새 걸음으로 귀새보 돌아 안말 들어서니
정문 집 바깥마당 보리바심 키질도 끝나갑니다
먹통바위 젖은 몸 뒤적이는 머시마덜
매미소리보다 시끄럽습니다
나도 식은 옥시기 한토새기 물고 쇠빠레께미 금모래밭을 달려보지만
궁적산 산그림자 응달뜰 부터 허겁스레 삼키고
게으른 여름 해 바쁜 걸음 어둠을 끌러 가도
거문골 곤드레 뜯으러간 울 엄니 여직 아니 오시고
어스름 새벽 산뽕따러 뜸메기 들어간 고모도
봉앞까지 마중 갔다는 근삼이 아재도 아니 오고
산사태 나던 해 우뭇골 들어간 작은 아재 영영 아니 옵니다
내 울음 따라 뻐꾸기 목 쉰 소리 뻐뻐국
양지뜰 개구리도 꼬르륵 꼬르륵
바글바글 끓어오르다 잦아드는,
노을처럼 붉은 열댓 살의 나이롱 치마가 물결집니다
-김영희의 ‘고모네 보리밥’-

김 시인은 ‘군업’에서 태어나 읍내로 시집왔다. ‘응달말’은 자신이 태어난 집터고 ‘먹통바위’가 있던 개울 건너는 ‘양지말’이다.
푸른 추억이란 초록의 바람과 물빛을 만나면 금새 눈시울이 젖는 형상기억장치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마약 같아서 눈을 감으면 푸른 추억의 서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문명의 속도는 빠르고 간편하고 편리하고 화려하지만 마음의 속도는 시간을 거슬러 추억이 깊은 서정에 닿는 것이다.
동행해주신 김영희 시인과 신경숙씨께 감사드린다.
글·사진 허 림(시인)

* 기사 내용 중 인명(人名)은 김영희 시인의 화촌중학교 동창생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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