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마음이 아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래도 눈물이 난다. 눈물이란 산자의 견딤이다.
길을 나서는 마음이 편치 않다.
‘마현(馬峴)’을 넘어 야시대로 들어선다. ‘마현’- 4차선 도로가 나기 전에는 참 높은 고개였지만 지금은 많이 낮아졌다. 아직까지 고갯마루에는 집이 건재하다. 한때는 휴게소였고 가끔씩 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고개가 낮아진 만큼 집은 그만큼 높아졌다. 그 시간의 간극에는 얼마나 많은 집을 지었을까?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삶의 조율이 느껴진다.
‘말고개’라 하지 않고 ‘마현’이라 한데는 이 고개에 대한 지명이 ‘대동여지도’에도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남겨진 길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해 보았을 뿐이다.
‘말고개’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산메’라 한다. ‘산메’ 뿌리는 ‘누치소’에 닿고 옹기를 굽던 ‘점말’이 있었다.
고개를 내려와 ‘야시대’로 들어가는 길 어귀의 삼거리에서 ‘점말’로 가려고 길을 물었다. 예전에는 산 밑을 돌아 다녔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또 길이 없어 갈 수 없다고 한다. 없는 길도 찾아 다녔는데 일단 가 본다며 들어섰지만 길은 강에서 끊기고 산 밑으로는 바위벼랑이라 돌아설 수밖에 없다.
고개들머리의 마을은 ‘새말’이다. ‘새말’이라는 지명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생긴 지명이고 원래는 ‘산메’다. ‘산메’에는 골짜기가 두개 있다. 골은 깊다. 고개를 내려오면서 만나는 첫 골짜기는 ‘망령골’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도는 곳인지는 몰라도 으스스하다.
구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사당이 보여 들어서니 무안박씨 문중의 숭모각이다. 누각 앞으로 차들이 다닌 바퀴자국이 있어 길을 따라 올라서니 자그마한 저수지가 나온다. 일명 ‘산메골저수지’다. 낚시꾼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쓰레기로 남아있다.
저수지 위로 들어서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해당화골’이다. 이미자의 노래가사에 해당화가 나온다.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노래던가. 바닷가도 아닌데 ‘해당화골’이라니 혹시 ‘산당화(명자나무)’가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며 흥얼대며 산길을 따라 산봉우리에 올랐다. 산당화도 해당화도 보이지 않고 기대를 걸었던 ‘성산(城山)’의 흔적은 없다. 성터는 물론 성벽에 대한 기대가 큰 탓일까? 다만 돌무덤을 보았을 뿐이다.
다시 내려와 저수지 안막으로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산메골’ 원골짜기다. 중턱쯤 올라가자 무안박씨의 산소가 보이고 한가운데 멋들어진 소나무가 안내판 뒤로 서있다. 삶에 지친 듯이 버팀목에 가지를 의지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수령433년, 높이 7m, 둘레 260㎝이며 마을 풍치목으로 일명 ‘방석소나무’로 불리며 보호수로 지정하였다고 적혀있다.
‘산메골’에서 내려와 ‘야시대’로 들어섰다.
‘새말’과 ‘원평’을 가르는 다릿발사이를 지나면 길은 논 가운데로 똑바로 나있다. 어디쯤에서 ‘원평’이 끝나고 어디쯤에서 ‘야시대’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길을 갈뿐 경계를 긋고 싶지는 않다.
일단 ‘야시대’ 골짜기를 둘러보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행인교’, ‘어여골’을 지나고 ‘무명용사 탑’을 지나 ‘벌말’, ‘안골’에서 ‘절골’, ‘멱재’를 지나자 ‘무래이’로 오르는 골짜기가 나온다. ‘무래이’도 지나쳐 길을 따라 안을 들어간다. 야시대 버스종점이다. ‘더래이’를 지나 비포장도로로 남아있는 ‘무지기’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변가터’와 ‘품걸리’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부터의 길은 춘천 땅이고 개울 건너편은 홍천 땅이다. 계곡 따라 이어지는 길은 ‘고약골’을 지나 ‘늘목’으로 들어선다. 늘목 ‘식목골’을 지나면 홍천의 끝자락이자 가리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광산골’이다. 다리를 건너면 춘천시 북산면 ‘품걸리’다.
‘품걸리’는 춘천 땅이지만 삶은 홍천에 닿아있다. 소양댐이 생기면서 육지속의 섬이 되었다.
최근에 ‘품걸리’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가리산의 눈먼 벌치기’(홍기 지음 성바오로)란 책과 KBS-TV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한 시각장애자가 산골 오지에서 토종벌을 치며 살아가는 모습을 방송한 후로 여겨진다. 삶의 끝자락에는 희망이 남아있다는 강한 감동을 받은 책이었고, 생명을 기르고 세상을 보는 눈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방송으로 기억한다.
‘야시대’를 지나 ‘품걸리 늘목고개’를 넘어 ‘소양호’에 닿으면 내가 지나온 길은 현세를 걷는 길이 아니라 과거 어느 왕조의 산골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지를 찾는 여행자도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시계바늘이 천천히 돈다.
마음이 바쁘고 몸이 바쁜 사람들은 이곳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천천히 느릿느릿 온다. 아침 해도 늦게 들고, 우체부도 오후 늦게 온다.
다만 저녁은 빨리 온다. 별이 일찍 찾아왔다가 계면쩍게 저 혼자 반짝인다.
느림은 빠름의 반대가 아니다. 느림은 추억을 생성한다. 문명의 속도로 달려가는 삶의 속도가 아니라 내 발걸음의 보폭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연의 동반자다. 더디게 온듯하지만 벌써 여름의 문턱을 넘어섰다. 시간에 순응하며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맡기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고개를 넘다보면 내 삶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가를 느낀다. 느림의 미덕은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아름답게 펼쳐놓는다.
‘늘목고개’ 마루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품걸분교’터를 지나 ‘웃광산골’을 지나 홍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가리산교’를 건넌다. 가리산의 ‘석간수(가리산 약수)’에서 발원한 홍천강의 지류를 ‘아랫광산골’에서 만난다.
물이 땅을 적시듯 길은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가리산으로 이어지는 ‘아랫광산골’ 어귀의 둔덕에는 아담한 산막집이 있다. 저녁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는 사내를 기다리며 아낙네가 경운기 뒷자리에 앉아있다. ‘높은터’에서 태어나 ‘품걸분교’를 다녔다는 아낙네는 산정이 들어 떠날 수 없어 지금까지 이곳에 산다고 했다.
‘높은터’에서 안막은 ‘터골’이고 막창은 ‘작은광산골’과 만난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내려오다 보면 왼편으로 ‘식목골’이 보인다. 사는 사람이 없고 골안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있다. 임도는 ‘사실고개’를 넘어 ‘무래이’로 이어진다.
‘사실고개’는 ‘사슬고개’에서 유래되었다. 사람마다 ‘살실고개’, ‘사실치(士實峙)’, ‘사실재’ 등 부르는 이름이 다르지만 굽이가 많아서 사슬과 같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지금은 심마니나 나물꾼들이 넘나들 뿐이다.
‘높은터’에서 부터 이어지는 길과 계곡과 산.
사람이 살지 않는 숲의 터널이 이어진다. 계곡은 작은 폭포를 이루고 골짜기는 길에 맞대어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을 벌린다.
길은 삶의 주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는 핏줄이다. 길을 연 것은 짐승들이었고 그 뒤로 사람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능선을 넘으면 고개가 되었다. 고개에는 아슴아슴한 사연이 남아있다. 사람이 무섭다는 사람은 도시적인 이야기다.
고갯길을 가면서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반가운가. 천천히 한 구비를 돌고 또 내려오면서 나무와 풀과 새들과 생명의 호흡을 나누다보면 내안의 삶도 자연처럼 느껴진다.
‘야시대’와 ‘품걸리’의 ‘늘목’은 이 다리까지이다.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말들이 쉬어갔다고 하여 ‘말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식목골’에서 다리를 건넌다. ‘무지개교’다. ‘무지개교’는 ‘무지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무지기’는 품걸교(야시대와 품걸리의 경계)를 건너 야시대로 들어서는 지명이다.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 안에 자리하고 있어 ‘무직항’이라고 했다.
지금은 포장이 안된채 남아있는 구간이다. 아마도 무지기가 여기부터인지 모른다.
‘고약골’로 이어지는 골짜기 어귀에 사방댐이 있고 사방댐 위로 임도가 연결된다. 산이 높은 까닭일까 임도가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이지역의 골 이름은 물어볼 데도 없다. 그러나 굳이 묻고 싶지 않다. 길은 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약골’과 ‘변가터’를 이루는 산등성이를 ‘꽃밭님아’라고 부른다. 양지바른 둔덕을 이루고 있어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는 꽃들이 밭을 이룬다고 한다. 더욱이 산나물이 지천이어서 미처 뜯어다 먹지 못해 쇠어 자빠진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임도를 이루는 ‘변가터’와 ‘고약골’, ‘식목골’에는 산나물을 뜯으러 들어오는 차들이 주말이면 줄을 선다. 단속을 하기보다 임도를 활용한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어떨까.
‘품걸교’를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임도는 ‘변가터’다. 계곡은 물론 오프로드 산행을 즐기는 매니아들에게는 잘 알려진 길이다. ‘변가터’로 들어서는 임도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참나무와 물푸레나무, 층층나무,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산길을 뒤덮은 시퍼런 그늘이다.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산림욕이다. 숲의 터널은 임도를 따라 ‘백이동’, ‘가락재’, ‘장가터’로 이어진다.
‘변가터’에서 내려와 다리를 건너 ‘무지기’로 들어선다. ‘무지기’에서 ‘더래이’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지르매재’라는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에는 야시대의 험준한 길을 말해주듯이 도깨비가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선바위’와 ‘학바위’가 있는 이 계곡은 마을사람들의 피서지이자 천렵터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있고 반딧불이가 여름밤을 밝힌다. 한여름 밤중에는 메기가 잘 잡힌다. 또한 일급수에서 서식하는 연준모치(산버드쟁이)와 갈겨니도 낚시에 물려나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포장이 되지 않아 자동차로 다니기에는 불편하지만 산골짜기의 바람과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오지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홍천과 춘천은 상생협력 발전협의회를 창립하고 서울~춘천 고속도로 조기준공 및 국도 5호선의 4차로 확장 조기착공 공조, 춘천~홍천간 버스 도착 정보시스템 구축, 무릉도원 관광단지 조성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야시대’와 ‘품걸리’를 잇는 비포장도로를 확장 및 포장하기로 했다.
‘더래이’를 지나면 버스종점이다. 버스종점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무래이’다. 무래이 어귀에는 ‘심산토봉원’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무래이’로 들어서는 왼편 능선은 ‘대틀목’이다. 굽이굽이 돌아 길을 오르다보면 개울 건너 빈터에 가득 놓인 토종벌통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외지에서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고 자연 속에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김연태’씨는 이곳 토박이로 토종벌을 치고 있다.
김연태씨는 소아마비 장애인이다.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지 못해 열살 무렵부터 벌치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벌에 관한한 날갯짓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요즘이 분봉 철이라 눈을 잠시도 뗄 수 없지만 자신이 터득한 방법으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앉힌다고 한다. 최근에는 강원도의 명품사업으로 지원금이 나와 강원도의 특화소득으로 자리매김을 한다고 한다. 특히 서울등지에서 찾아와 분양을 받아 위탁 관리를 맡겼다가 가을에 와 꿀을 따간다고 한다. 언제든지 자신의 벌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봉을 하면 그 옆에 받아 앉혀주어 인기가 많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산채특화작물인 장뇌삼을 심었는데 산에서 직접 장뇌삼도 캐서 자신의 벌꿀에 찍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무래이’에서 ‘곱돌고개’를 넘어 ‘철정 여내골’로 이어지고, 안막에서는 다시 ‘석장골’과 ‘찰무랭이’로 갈라진다. ‘석장골’은 ‘사실고개’를 넘어 ‘늘목 식목골’로 이어진다. 또한 ‘찰무랭이’에는 향이 좋은 참나물이 많이 나고 ‘차돌고개’를 넘어 ‘작은평내’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가리산 품안에 든 ‘무래이’는 물이 많고 맑다하여 ‘수왕동’,‘물골’,‘수골’ 등으로 불린다.
자연의 공간을 사람의 마음속에 옮겨놓은 마을처럼 느껴진다. 꿀을 뜰 철이 아니라서 대접이 소홀했다며 가을에 다시 들어오란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벌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돈다. 움직이면 쏘겠다는 자세다. 벌이 날아갈 때까지 머리를 파묻고 꼼짝 않고 앉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머리에 한방 쏘였다. 봉침을 맞은 셈이다.
‘무래이’를 돌아내려와 큰길로 나왔다. 개울건너편의 봉우리가 나를 내려다본다. ‘가마봉’이다. ‘가마봉’은 ‘갈공터’의 뒷산 봉우리다. ‘갈공터’를 가려면 ‘양지말’을 지나 ‘귓말’까지 가야한다.
‘양지말’은 야시대에서는 드물게 양지바른 곳이다. 그래서인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담하다. 양지말 뒷산을 이루는 너른 버덩은 ‘가마대기’라 한다. 드물게 곰취 밭이라 한다.
어느새 ‘귓말(구밑말)’까지 내려왔다. 길옆에 연못이 있다. 뉘엿뉘엿 지는 해거름을 따라 할머니가 아픈 다리를 끌고 개밥을 주러 가신다. 귀가 어두운지 잘 듣지 못한다.
개울건너 길을 가리키며 멱재를 넘으면 어디냐고 물으니 가보라는 듯 손짓만 하신다.
개울건너 양편에 별장 같은 집이 있고 그 사이로 가파른 고갯길이 나있다. 이렇게 가파른 길을 겨울에는 어떻게 다닐까.
서너 구비를 돌아서자 큰 능이 나온다. 일반 산소보다 스무 배는 더 커 보이는 산소다.
어느 왕조일까? 혹시 갈공의 묘역이 아닐까?
비문에는 평창이씨의 선조가 문중에 토지를 희사하여 가문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씨문중의 묘역을 지나면 양계장이 나온다. 입구에는 자동 소독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출입하는 모든 차들을 방역한다. 또한 사료 및 계란수거도 자동화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매일 아침마다 신선한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한다.
바로 양계장이 있는 터는 ‘멱골’이다. 곽(郭)씨들이 일가를 이루고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곳인데 곽씨 일가는 없고 양계장과 귀농한 한가구만이 살고 있다.
‘갈공터’는 ‘멱골’에서도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하늘아래 첫 동네랄까. 해발 800m가 넘는 이곳에서 하늘은 참 가깝게 내려와 닿는다. 오르는 길에는 산나물이 지천이다. 미역취며 미나리싹, 참취, 수리취 등이 포기를 이룬다.
이곳에 토박이는 5대째 살고 있는 박희춘(74)씨다. 한국전쟁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피난을 했다고 한다. 산속이면서 아늑한 둔덕을 이루고 있어 전쟁에서 돌아났다고 한다.
‘갈공터’는 ‘벌말’에서 보이는 산 윗동네다. 갈씨 성을 가진 공신의 유배지다. 끝내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하여 ‘갈공터’라 한다. 저녁이 오면 별들이 내려와 하루를 머물다 간다.
‘갈공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마봉’을 중심으로 ‘지당골’, ‘삼밭구랭이’, ‘떡갈보댕이’, ‘다락동’이 골짜기를 이룬다. ‘절골’과 이어지는 길은 노루길 같은 작은 산길인데다 가팔라서 다니는 사람이 없다.
마을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다시 돌아서 내려가려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미 해는 지고 서쪽하늘에 별이 떴다.
참 맑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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