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산을 돌아내려오면서 다시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은 곳이 있다. ‘작은평내’의 ‘농골’ 어귀 산중턱에 자리 잡은 ‘가리산 천도교 수련원’이다.
  조동원(84) 수도원장은 19살에 한의원을 하는 부군을 만나 결혼한다. 당시 부군은 동학을 하였는데 자연스럽게 동학에 입문하게 되고 지금까지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의 뜻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천도교(天道敎)’는 조선 말기 최제우가 1860년에 서학, 즉 천주교에 반대하여 창시한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을 세우고, 1905년에 3대 교조 손병희가 개칭한 종교이다.
  동학은 이 나라 이 땅(동쪽의 나라)에서 생겨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가르침이란 의미이고, 그 가르침은 풍수지리, 유, 불, 선의 교리를 아우르며, 조선시대 방황하는 백성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으로 집대성하였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반봉건, 혁명적인 사상으로 후일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운동’의 이념이 되었다.
  천도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한울님’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우리 민족이 아득한 옛날부터 ‘신(神)’을 일컬을 때 사용하던 말이다. 
  내 몸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 마음은 곧 인간본래의 마음이다. ‘사람마다 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천도교의 시천주(侍天主) 신앙은 여기서 출발하게 된다.
  천도교는 진리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깨우치는 수양이다.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려는데 선뜻 선물을 주신다. 천도교의 경전이다.
  문득 동학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풍암리 자작고개전투’가 떠올랐다. 
  ‘평내’를 나와 ‘향교골’ 어귀의 ‘지다치’를 걷는다. ‘지다치(之多峙)’는 길이 구불구불하고 고개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돌독고개’를 기억하는데 지금은 똑바른 길이라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철정검문소’를 지나면서 ‘지다치’ 어귀에는 ‘팜파스휴게소(홍천에서 인제방향)’가 있다.
  ‘팜파스’란 인디오 말로는 ‘평원’을 뜻하며 일반적으로는 브라질, 우르과이, 아르헨티나에 걸쳐있는 대평원을 가리킨다.
  ‘팜파스휴게소’는 ‘철정뜰’을 바라보는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 양남철, 이종호씨의 설계로 1994년 지어졌다.
  산으로 둘러진 평활한 대지 위에 주변을 흐르는 바람과 하천의 질서를 존중한 듯하고, 평지에서 솟아오른 타워와 펄럭이는 깃발들로 여정의 흥을 돋우게 될 열주, 맨땅에 15도만큼 기울어진 그네는 자연의 너울거림으로서 사람을 포함한 오브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 동적인 잠재성을 엿볼 수 있다. 
  휴게소 한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와 긴 의자는 평원의 그늘답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강둑의 소나무 사이로 그네에 실려 오는 바람과 구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움직여 훌쩍 그네에 올라 하늘을 날게 한다.
  뒤편의 강에서는 잠깐이나마 견지낚시를 즐길 수 있으며 물가의 모래밭에서는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1995년 ‘한국 건축문화’ 대상을 받으면서 가우디를 꿈꾸는 건축 지망생들의 답사코스가 되기도 했으며, 제2회 ‘강원도 아름다운 화장실’ 대상을 받기도 했다.
  팜파스 뒤쪽으로 내려와 강을 건넜다. ‘철정’에서 ‘놋점골’을 중심으로 한 이곳을 ‘본부락’이라 하고 ‘철정검문소’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한계’, 또는 ‘장터거리’라 한다.
  ‘본부락’은 철정에 홍천향교가 자리잡고 홍천의 현감청사가 있었던 데서 붙여지지 않았을까 하고 마을 사람들도 그 이유를 찾는다.
  ‘철정초등학교’도 처음에는 ‘놋점골’ 앞뜰에 세워졌다.
  ‘본부락’ ‘놋점골’과 ‘한세울’ 사이에는 ‘손주목다리’가 있다. 그런데 이 다리는 홍천군에서 발행한  ‘우리 고장 홍천’에는 ‘형제목다리’라고 나와 있지만 마을에서는 ‘손주목다리’라 하며 일부러 만든 게 아니냐며 반문한다.
  기록에 따르면 ‘형제목다리’가 생긴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두 아들을 두고 홀로된 과부가 건너 마을(본부락) 외간남자를 사랑하여 밤마다 강을 건너 남자를 만나러 다니는 것을 목격한 두 아들이 어머니가 찬 강물을 건너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나무다리를 놓았다 하여 형제목다리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말로는 바람을 피러 다니는 것인데 자식의 입장에서는 이를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이웃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손주목다리’로 바뀐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장터거리’로 들어섰다. 
  ‘장터거리’는 ‘철정’의 중심이다. 장터거리의 중심도로는 ‘말고개’다. ‘말고개’를 넘어 내촌-상남-기린-현리로 가는 길과 인제-설악산-동해안으로 가는 길목에 장터거리를 이룬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막이 들어서고 장이 서면서 장터거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철정검문소’와 ‘철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철정검문소’는 한국전쟁이후에 세워진 후 지금까지 존치되고 있다.
  ‘말고개’는 ‘큰말고개’와 ‘작은말고개’가 있다. ‘큰말고개’는 ‘안말’에서 ‘행인나들이’로 넘는 고개로 예전에는 차들이 넘나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임도처럼 흔적이 남아있다.
  ‘말고개’에는 아기장수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옛날 정씨네가 이곳 말고개 부근에다가 산소를 쓰고 나서 장사가 났다고 한다. 장사는 일곱 살때부터 조화를 부렸고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왕은 장사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장사를 죽이려 하였다. 장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는 듯 자신이 죽으면 ‘팥밭골’ 조상 들머리에 산소를 써 달라 하고 죽이는 방식을 일러주었다.
  부모는 장사가 일러준 대로 저룹당으로 겨드랑이 날개부근의 비늘을 세개 떼고 세번 때려서 죽였다. 그리고 팥밭골의 조상 들머리에 묘를 쓰고 하관을 하는데 호랑이가 나와 으르렁대고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 하관을 하다말고 쫓겨 내려왔다.
  잠시후 비가 멎고 해가 반짝나서 올라가보니 시체는 없고 회는 훌렁 뒤집혀 있었다. 결국 산소를 시체도 없이 쓰고 사흘이 지나자 용마가 나타나서 사흘 밤낮을 볶아치면서 날뛰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말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작은말고개’는 안말-꽃등재-부목골-원평으로 넘는 고개다. 지금은 ‘원평’에서 ‘꽃등재’로 이어지는 터널이 뚫리고 ‘화양강휴게소’와 ‘철정휴게소’가 양편으로 들어서 있다.
  이 고개에서 한국 전쟁사에 남은 ‘홍천 말고개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 탱크를 맨 몸으로 막아내는 육탄용사의 이야기가 담긴 초등학교 도덕교과서가 떠오른다.
  <육군1야전군사령부 정훈공보부>에서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25일 새벽, 전면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제2·7사단으로 하여금 춘천·홍천을 통과한 후 이천·수원선으로 우회, 국군의 주력을 차단해 궤멸시킨다는 이른바 초기 승부를 노린 ‘3일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북한군 의도대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지만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6사단의 강력한 방어로 초기 전투에서 차질을 빚었다. 6사단장(김종오 대령)은 6월24일 장병의 외출·외박·휴가를 전면 통제하고, 철저히 방어준비를 함으로써 6월28일까지 방어선을 지켜내는 투혼을 보였다. 6사단은 춘천에 7연대, 홍천 북동쪽에 2연대를 배치하고, 19연대를 예비로 하여 전방을 방어함으로써 북한군의 선제타격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7연대 57㎜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이었던 심일 소위는 6월25일 오후 소양강·북한강이 합류하는 옥산포(현재 춘천시 사농동) 도로변 소나무 숲에서 매복해 있다가 공격하는 적 2사단 SU-76 자주포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지면서 육탄 공격을 감행, 적 자주포 3문을 파괴하는 큰 전과를 세우고 춘천전투의 신화를 창조하며 ‘자주포 킬러’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춘천 방어는 물론 그 사이 춘천주민들이 무사히 피란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군은 2사단이 춘천전투에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자 홍천 방향으로 공격하던 7사단 예하 2개 연대를 춘천 쪽으로 보내게 되고 나머지 주력은 홍천으로 이동하게 됐다. 때를 맞춰 공격 방향을 춘천지역 원창고개 일대로 전환한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인제 남면을 거쳐 물밀듯이 쳐들어 왔으나 홍천을 지키던 국군 6사단 2연대는 ‘S’ 자형으로 굽어진 ‘말고개’에 진을 친 뒤 적을 막고 후방 성산에 포진한 제3포대가 철정리로 물밀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에 포격을 가했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말고개 진격은 국군6사단의 저항에 꼼짝없이 무너졌다. 그 후 북한군은 춘천 방어선을 뚫고 남진했으나 홍천을 점거하지 못하게 되자 말고개 일대를 융단 포격했다. 이때 제6사단 2연대 특공대원은 말고개의 ‘S’자 굽잇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7사단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고 전차 10여대를 파괴했으며, 제19연대가 가세해 6월30일 새벽까지 홍천을 사수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간 반면 춘천·홍천전투는 한국전쟁 초기 단계에서 한국군이 승리한 유일한 전투로서 그 의미가 대단하다. 지금의 ‘말고개’에는 6·25전쟁 당시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렇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고개’는 정말 오르기 힘든 ‘큰 고개’라는 의미보다 우리 선배 전우들의 애국애족의 멸사봉공 정신이 깃든 ‘역사적으로 살아 숨쉬는 웅대한 고개’이다.』
  이 ‘말고개전투’의 공신은 법정까지 가서야 판결이 나게 되지만 정작 ‘육탄용사 전적비’는 76사단 안에 있어 아무나 둘러보지 못한다. 
  실제 말고개 전투 현장은 화양강휴게소에서 바라볼 때 터널입구 골짜기인 ‘문자지미골’ 어귀가 된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 말고개 길은 ‘부목골’을 돌아 벼랑을 끼고 문자지미 골짜기 안을 휘돌아 화양강휴게소 앞을 다시 돌아가는 갈지(之)자 형이었다. 
  화양강휴게소는 ‘꽃밭재(꽃등재)’다. 꽃밭재 아래에는 ‘괴바위(고양이바위)’가 있고 절벽을 따라 철쭉이 꽃밭을 이루었다하여 붙여졌으며, 꽃밭재에서 바라보는 ‘청벽산’의 물골안 풍경과 철정뜰의 전경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꽃밭재를 감싸는 듯 에두른 봉우리 중 터널 위쪽의 봉우리는 ‘선녀봉’이라 한다. 선녀봉 위에는 굴이 있다고 하며, 봉우리들이 안말을 감싸 안는다. 안말에서 각 봉우리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작은문자지미골’, ‘쐐기골’, ‘작은장골’, ‘큰장골’이 있고, ‘큰말고개’를 넘어 야시대 ‘행인나들이’로 이어진다.
  안말에서 철정휴게소(서울방향)를 올라가는 모퉁이에 승냥간(대장간)이 있었고, 휴게소 아래쪽의 굴을 빠져나가면 화채집이 몇이 있었다. 지금도 ‘승냥간 모퉁이’, ‘화채거리’라 한다.
  ‘장터거리’는 지금의 ‘철정검문소’ 일대가 된다. 장꾼들이 많았고 지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조선 선조 때는 ‘중화점(中火粘)’을 세우고 길가는 나그네들이 도중에 점심을 먹도록 하였다. 그 자리가 철정초등학교 아래인 파출소라고 한다. 또한 철정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둔덕에는 ‘철은정(哲隱亭)’이 있었다하며 연못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철정’은 ‘선평’, ‘복골’, ‘본부락’, ‘한계’, ‘아오라지’, ‘북창’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그러나 ‘철은정’이 있었던 ‘한계’를 중심으로 부르는 지명이 되었다.
  철정은 원래 철은정이었다가 정자가 없어지자 은(隱)자를 빼고 철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한계리라 부르기도 한다.
  ‘한계’와 ‘여내골’은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 ‘여내골’은 한계의 안쪽 큰 골이다.
  철정초등학교는 1941년에 문을 열었다. 교정에는 사자동상이 많다. 장미와 잣나무처럼 아름답고 푸른 기상을 바탕으로 모든 일에 성실하며 사랑받는 사람이 되자는 교훈 아래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철정초등학교 안에는 비석이 서 있다. 현감비와 학교 설립에 공이 큰 지역 유지들의 비인데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여내골의 큰 골짜기는 ‘수작골’과 ‘장갈’, ‘뺄골’이다. 여내골에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들어가는 큰골짜기는 ‘수작골’이다. 어귀에 ‘한방건강장수마을’ 안내판이 서 있다. 홍천군의 한방건강증진 허브보건사업의 일환으로 선정되어 양질의 한방진료 서비스를 지원받고 있다. 이와 발맞추어 ‘수작골’ 어귀부터 ‘월정골’까지 마을뒷산의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산책로 겸 등산로를 개설하고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도 세웠다.
  길을 따라 골 안막으로 들어가면서 지형을 살펴보기로 했다. 수작골쪽으로는 두릅이 많이나는 ‘월정골’과 ‘곱돌고개’를 넘어 야시대 무레이로 가는 ‘물골’, 야시대 무레이 안막인 ‘찰무랭이’로 넘는 ‘박달골’, ‘장갈’이 있다.
  철정초교 뒷편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되미골’, ‘팥밭골’, ‘마당골’, ‘나무골’, ‘터덕골’을 지나 여내골 안막인 ‘뺄골’이 있다.
  ‘뺄골’과 ‘장갈’의 물이 합쳐지는 곳에는 토종벌을 치는 초막이 있고, 국유림관리소에서 설치한 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산사태 및 토사방지 사방댐을 막고, 그 공터에 연못과 야생화를 심어 마을쉼터를 마련하였지만 외따로 떨어져 이어 주민들의 정서와는 좀 멀게 느껴졌다.
  여내골 원골인 뺄골에는 ‘영락사’란 절이 있으며 ‘향교골’로 이어지는 산길이 나 있다. 
  여내골에서 ‘내촌다리’를 건너면 ‘국군 현리병원’이 ‘큰용회골(용호골)’ 둔덕에 자리하고 철정앞뜰에 물을 대던 ‘느릅나무수통’이 ‘작은용회골’에 있었다.
  지금은 길이 큰용회골을 따라 나 있었지만 길이나기 전에는 ‘댕댕이고개(왕댕댕이고개)’가 있었다. 지금은 ‘아오라지고개’다. 길이 멀지만 아오라지를 돌아 내촌으로 다녔다고한다.
  ‘아오라지’는 물이 합쳐지는 ‘아우라지’가 아니라 기러기들이 내려와 쉬었다 간다는 뜻의 ‘아호동(鵝湖洞)’이 ‘아오라지’가 됐다. 아오라지에는 북창다리 윗쪽에 물레방아가 있었으며 지금의 북창길 아래쪽은 물이 휘돌아가 자연스럽게 연못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제방을 쌓아 논밭이 되었다.
  아오라지 앞강은 ‘물골안유원지’였다. 모래밭과 맑은 물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놀러오기도 했지만 골재채취로 모래사장은 돌무더기만 널려있다. 또한 ‘삼형제봉’ 밑을 흐르는 ‘메기골’에는 철다리를 놓고 기도원과 펜션이 들어서면서 물골안유원지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주변에 널린 흉물스런 잔재들이 더이상 유원지가 아님을 말해준다. 
  제방을 쓸쓸히 걸어 북창으로 들어섰다. 15년이 지나도록 애물단지가 된 ‘북창휴양단지’의 취수탑이 눈에 들어온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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