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싸리고개 쉼터에서 ‘장양차’를 마신다. 하루를 뜨겁게 산 태양이 어둠의 서곡을 펼치듯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이 붉다. 단풍의 불길은 차츰차츰 마을로 내려가고 산마루의 노을은 어둠에 스민다. 어둠을 밟고 길을 내려온다. 진거리로 가려면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서야 한다.
는개(짙은 안개)가 내리고 이슬이 맺혔다. 다시 와야 삼거리를 지나 진거리에서 내렸다. 상남 가는 버스는 하루에 드문드문 있다. 오랜만에 첫차를 탄 것이다. 얼추 대여섯 명의 손님이 탔는데 철정-내촌-와야 삼거리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진거리’는 ‘와야 삼거리’와 ‘막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시멘트 포장에 오르막이다. 너무 이른 탓에 밖으로 나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딱히 갈 곳이 없어 길을 따라 걷는다. 논은 별로 보이지 않고 들깨를 베어 널어놓은 밭에서 깻잎냄새가 풍겨왔다. 더 시퍼래 보이는 고춧대에는 조롱조롱 달린 고추가 빨갛게 익는다. 누릿하게 마른 호박 넝쿨이 하우스를 뒤덮고 있다. 여린 바람에도 은행나무 잎새가 후두둑 떨어진다.
는개에 젖은 옷이 햇살에 마른다.
‘떼밭골’ 막치기를 지나 ‘입한골’ 어귀까지 올라왔다. 입한골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안막에서 광산굴로 오르던 샛길이 있었다. ‘수수밭골’에서 ‘지방터고개’를 넘으면 진거리 안막인 ‘절골’이다.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이다. 좁은데다가 빗물에 길이 패이고 가파르다. 고갯마루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광산굴’이다. 고개를 넘어 절골로 들어섰다. 절골은 ‘큰절골’과 ‘작은절골’로 갈라진다. 작은절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더 실하다.
산길을 따라 걷다보니 진거리에서 ‘여창이’로 들어선 것이다. 행정구역상 서로 다른 마을이지만 이 고을의 사람들은 고개를 서로 넘나들었다. 사람의 발길은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개울을 건너 입구에 서있는 갈림길 전봇대에는 ‘전싸네’ ‘全家네’란 이정표가 있다. 전싸네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작은 절골 안막에는 컨테이너 하나가 놓여 있다. 우체국에 다니던 전씨가 갖다 놓은 거란다. 그렇지, 누군가 장난한 듯하다.
나는 큰절골을 올라 여창이로 들어섰다. 여(呂)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하여 붙여졌다고 하기도 하고, 여창(呂昌) 마을이 呂자 혹은 昌자처럼 생긴데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꼭 호리병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큰절골로 들어가면 ‘작은여창이’가 나온다. 큰여창이는 두봉산이 감싸고 그 중턱에 ‘쌍계사(雙溪寺)’가 있다. 두봉산 아래 절골에 있던 사찰로 조선조 제17대 효종원년(1659)에 도전(道詮)이 창건하였다 하는데, 그 뒤 없어지고 다시 지었다.
쌍계사는 동해 지상사 철불좌상을 모신 태고종 강원교구 공찰이다.
쌍계사로 가려면 ‘사스목정(사슴의 목정)’을 넘어 큰절골을 한참 올라야 한다. 사스목정에는 ‘승냥간(대장간)’이 있었다.
한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쌍계사로 올랐다. 포크레인 소리가 들려왔다. 오르다보면 길옆에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석탑이 있다. 석탑 뒤쪽에는 절 쪽을 향하여 선 관음상이 서 있고 개울을 건너 왼쪽에 부도와 부도비가 서있다. 1기는 입구에 있고, 나머지 7기는 좀 더 안쪽에 일렬로 세워져 있다. 부도들은 모습이 각기 다양하나 기본적으로 석종형의 부도 모양이다. 글씨는 풍화되고 희미해져 알아볼 수 없지만 부도와 사리탑만으로 절의 규모가 얼마만했는지 짐작이 된다.
부도 중에는 창월당정리영주탑(唱月堂定籬靈珠塔)과 능봉당생탄영주탑(陵峯堂牲坦靈珠塔)만이 희미하나마 글씨를 알아볼 수 있고 나머지 부도는 명문을 알아볼 수 없다. 부도비로는 쌍봉당대선사사리탑비(雙峯堂大禪師舍利塔碑)가 있다. 삼층석탑도 있었는데 최근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쌍계사는 세개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과 신축중인 본당(지상사철불보호각) 그리고 종무소 겸 요사이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측백나무가 서 있고, 왼쪽에는 ‘청신 변우섭 기념비(淸信 邊又燮 紀念碑)’가 서 있다. 원래는 지금의 쌍계사에서 위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비의 뒷면에는 ‘강월하(姜月河)’라는 이름이 보인다. ‘태백의 읍면(강원일보사·1975)’에는 ‘강월하(姜月河)는 일제시대에 서울의 수종사에서 이곳으로 온 승려로 두 줄기 물 흐름을 보고 절의 명칭에서 쌍계사(雙鷄寺)에서 쌍계사(雙溪寺)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원래의 사지(寺地)를 짐작해보면 ‘샘골’과 ‘우뭇골’ 사이쯤이 될 듯하다. 그곳은 지금 불사를 이루는 비룡사의 천막이 쳐져있는 자리쯤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쌍계사 대웅전에는 석불을 모셨고, 신축중인 본당(지상사철불좌상보호각)에는 시도유형문화재126호 ‘동해 지상사 철불좌상’을 모셨다.
이 불상을 모셔오면서 쌍계사는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고, 홍천군에서는 보호각을 지었다. 그러나 이 불상이 이곳 쌍계사로 오게 된 연유는 어디에도 기록되어있지 않다.
‘지상사 철불좌상’은 원래 동해 지향사 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08년 지금의 동해 지상사에 모셔 놓은 전체 높이 1.1m의 불상이다.
‘지상사 철불좌상’은 왼손 전부가 파손된 것을 새로이 보수하였으며, 오른손 일부도 석고로 새로이 보수(補修)하였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 부분이 모두 파손된 것을 석고로 새로이 보수한 상태이며, 귀 부분도 일부 보수한 흔적이 있다. 나발(螺髮)과 육계(肉계)가 있는 머리 부분도 철로 된 원상태가 아니고 다른 재질로 보수한 것 같다.
철불의 형상은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는 흔적만 남아 있을 정도로 매우 작다. 얼굴은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눈썹과 눈은 길고, 코는 오뚝하고 입술은 얇아서 자비성을 상실하고 있다.
몸 전체의 균형은 비교적 잘 잡혀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와 무릎이 넓은 편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오른쪽 끝을 안으로 감아 넣었다. 두 손은 없어져서 새로이 만들었으나, 절단된 위치로 보아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보여지며,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은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로써의 가치는 고려 철불의 과도기적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쌍계사가 전통사찰로 지정되면서 보호각을 짓고 자연석 석축 및 배수로 설치와 법면 잔디를 심는 공사가 한창이다.
쌍계사를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물앙에뒷골(물안에뒷골)’이 나오고 왼편쪽으로 ‘샘골’이 나온다. 강파른 숲길을 올라서면 ‘웃뭇골’에서 흐르는 계곡을 건너 둔덕 위에 서있는 조립식 건물이 보인다. 불사가 한창인 ‘비룡사’다. 처음에 오를 때는 비포장도로였는데 지금은 군데군데 시멘트로 포장을 했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은 서곡대사가 이름을 지은 쌍계사(雙鷄寺)의 절터라 한다. 서곡대사는 절터를 보면서 계란을 묻어 아침에 깨치고 나와 울어야 명당이라고 했는데 밤중에 계란을 묻었더니 새벽에 닭 두 마리가 홰를 치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쌍계사(雙鷄寺)로 이름 지었다는데 ‘청신 변우섭 기념비’의 뒷면에 기록 되었듯이 서울 수정사에서 온 강월하 스님이 두 줄기의 물 흐름을 보고 쌍계사(雙溪寺)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서곡대사는 주민들의 병고를 덜어주고 풍흉을 예언해 왔다고 한다. 어느 날 촌부 한 사람이 대관령에서 대사를 만나자 ‘쌍계사에 가서 내 장례를 지내 달라’고 하여 돌아오는 길로 절에 가보니 시체가 있었다. 후하게 장례를 지낸 후 사람들은 ‘생불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서곡대사가 태어난 곳은 ‘안실’이다. ‘안실’에서 밧실을 넘는 ‘서낭고개’를 오르다보면 길 아래로 청녹색의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이야기도 구전으로 전해지는 기록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곡대사의 기록은 공작산 수타사의 서곡대사사리탑비명(瑞谷大師舍利塔碑銘)과 덕고산 봉복사의 부도탑이 전부이다.
서곡당대사의 법명은 찬연스님(粲淵:1702~1768)이다. 조선 영조 23년에 봉복사를 중건한 스님이다. 수타사와 봉복사에서 주석하였으며 수타사에서 입적하였다. 사리 2과가 나와 수타사와 봉복사에 하나씩 봉안하였다 한다.
수타사의 비문은 손상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비문은 김상복(金相福)이 짓고 김상숙(金相肅)이 글씨를 썼다. 숭정기원우삼을축년(崇禎紀元後三乙丑年-1769) 7월에 세워졌다.
‘서곡당대사(서곡대사)는 속성(俗姓)이 김(金)씨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업상(業尙)이고 어머니는 완산 이(完山 李)씨이다. 어머니가 49세 때 부부가 관음(觀音)에 기도하여 품속으로 별이 떨어지는 꿈을 꾼 후 임신하여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임오년(1702년) 3월17일 축시에 태어나 무자년(1768년) 11월3일 사시(巳時)에 홍천현 공작산 수타사에서 시숙(示叔)하였으니 이때가 승려가 된지 51년이 되는 해이다.’
다음 해 봄에 문도(門徒), 재명(再明)등 100여명의 승려 신도가 봉복사(鳳腹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이 절은 대사가 항상 기거하던 곳이다. 비의 후면에는 부도 건립에 참여한 인명(人名)이 새겨져 있다.
덕고산 봉복사의 부도는 원형당의 부도로 지대석 위에 6각의 지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을 놓고 그 위에 구형의 탑신을 올렸다. 중대석 하단에 서곡당탑(瑞谷堂塔)이라는 명문과 상대석은 6각으로 측면과 윗면에 연화문이 있다.
기록이 없다보니 떠도는 이야기가 많다.
서곡리 사람들은 서곡대사의 묘가 ‘거스르미재(큰여창이에서 도관리 거주포로 넘는 고개)’ 넘어 오른편 기슭에 있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비석과 망부석이 세워져 있는 묘가 바로 서곡대사의 묘라는 것이다. 또 불사를 이루는 비룡사 근처 계곡 쪽 바위에 음각한 명문이 있었다하는데 찾지 못했다.
비룡사는 지금 터 닦는 공사를 하는 중인데 바위덩어리를 탑처럼 쌓아 놓기도 하고 세워 놓기도 하는 등 석축을 쌓고 있다.
비룡사 앞을 지나 오르면 ‘토골’이 있고 ‘동호재’를 넘어 ‘밤가시’ 막창으로 넘어가 나물을 뜯기도 했다. ‘우뭇골’은 ‘두봉산’ 능선을 따라 오른다. 이 길을 따라 ‘고메등’으로 올라 ‘백암산’으로 가기도하고 괘석리 ‘황철골 느와터(영아터)’로 가기도 했다한다.
두봉산을 사이에 두고 고개가 둘이 있는데 지당골로 넘는 고개는 아랫고개이고 우뭇골로 넘는 고개는 웃고개이다.
스님께 절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으나 조용히 지내러 들어왔다며 말문을 닫는다.
합장을 하고 돌아나와 작은여창이로 돌아 들었다.
여창이로 들어서면서 꼭 봐야 할 것이 세개인데 그 중 하나가 ‘어우동 나무’라고 마을 사람들이 일러주었다.
작은여창이에서 큰여창이로 넘는 고개는 둘이다. 윗고개는 ‘호랑이가 나와 덫을 놓았다’고 하는 ‘덫거리’이고 아랫고개는 ‘공회당고개’다. 고개 사이에는 솔밭이다. 올라가보니 솔밭사이에 너른 밭이 있다.
율무를 심어 거둔 글거리가 가득했다. 이곳이 여창이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었고 공회당이 있었다. 꼭 봐야 할 나무는 산신각이 서 있는 그 옆에 서 있었다.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연리지(連理枝)나 연리목(連理木)으로 생각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달랐다.
3백년이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한줄기로 자라다가 5~6m 쯤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한 몸을 이루었다. 그 모양이 여음곡(女陰谷)을 연상케 했다.
사진을 찍고 큰여창이로 들어섰다. 사람을 찾아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는데, 밭에서 할머니와 아이는 고추를 따고 젊은 부부는 호박을 골라 상자에 담고 있었다.
여창이는 두봉산 줄기가 이어져 내리는 마을이다. ‘괘석골’과 ‘지당골’ ‘다만이뒷골’ ‘삼막골’이 마을까지 이어졌고 ‘막고개’를 넘어 ‘안실’로 가기도 했다. 이곳에 70여 호가 살았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여창이와 물안골의 경계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풍수상 심은 나무라 한다.
물안골로 내려오다가 개울 한가운데 서있는 바위와 길옆에 서있는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아 사진에 담고 돌아서는데, ‘돌산’ 어귀 밭에서 콩을 뽑는 부부를 만났다. 밭의 한구석에도 거석이 놓여있었다. 이곳에 ‘족두리바위’와 ‘호랑바위’가 있다는데 어디냐고 묻자 반쪽만 남은 바위를 가리킨다. 길이 나면서 다 깼다는 것인데 방금 사진에 담은 바위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는데 이제는 세월보다 무서운 것이 개발이라는 괴물인 듯하다. 돌산이 건너다보인다. 돌산 안막으로 오르면 ‘모종안’이고 고개를 넘으면 ‘진거리’가 나온다. ‘족두리(재상바위, 장군바위)바위’와 호랑이가 새끼를 쳐 나갔다는 ‘호랑바위’, ‘아가(아갈)바위’, ‘환도(칼)바위’가 어우러진 돌산어귀의 물안골은 길이 나면서 길속에 모든 것을 묻어버렸다. ‘고메굴(곰의 굴)’이라는 자연 동굴도 있었는데 다 무너졌다.
와야 삼거리의 이정표로 서있는 표지석도 이곳에서 실어왔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가야할 길을 가슴에 품고 서있을 뿐이다.
뛰는 걸음으로 산을 내려오니 큰길이다. 물안골 어귀를 지나와야 삼거리 쪽으로 오르면 ‘도방골’이 나온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와야 삼거리에 가서 할머니께 묻는다.
“도방골이 뭔뜻이래요?”
“화채집 이라우.”
더 예쁜 이름이다. ‘뭔 뜻이냐’고 또 물으니 빙긋이 웃는다.
웃기만 할뿐 말이 없다. 혼자 말인 듯 ‘나두 그걸 타구 영감 만나러 가야지’한다.
그 말 속에 답이 있을 것 같다. 뭘까?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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