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도 다 끝나가는 계절이다. 이때쯤이면 떡이 먹고 싶다. 강에 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먹는 얘기 좀 해야겠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들라면 우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꼭 필요한 것을 들라면 먹거리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떡을 해먹었다. 그 덕에 내 몸에는 떡의 맛이 배어들었다.
떡의 어원은 덕(德)에서 나왔다. 덕이란 어진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덕’은 단군시대에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의 기본으로 자리 잡은 ‘덕치(德治)’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라’라고 하는 덕담은 바로 단군왕검 같은 아들을 낳으라고 하는 말이다.
명절하면 뭐니뭐니해도 설이다. 음력 1월1일 새해 첫날이라 하여 1년 중 가장 큰 명절로 꼽는다. 차례상과 세배 손님을 위한 세찬이 준비되는데 떡국, 만두, 약식, 인절미, 빈대떡 등을 먹었다. 강원도에서는 떡과 만두를 넣은 ‘떡만두’를 먹었다.
음력 1월15일 정월대보름에는 1년 내내 부스럼이 없도록 부럼(잣, 호두, 밥, 땅콩)과 귀밝이술을 먹고, 전날인 14일에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먹는다. 음력 2월1일은 중화절이다. 이날은 머슴날이라 하여 노비에게 나이 수만큼 송편을 만들어주고 유밀과를 먹는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날은 삼짇날이다. 음력 3월3일이다. 진달래꽃을 찹쌀가루에 버무려 지진 화전과 진달래술등을 먹는다.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조상의 묘를 돌아보고 미리 만들어둔 찬 음식과 약주, 과일, 떡, 국수, 식혜 등을 먹는다. 석가탄신일인 초파일은 느티떡, 볶은 콩, 나물, 삶은 미나리를 먹는다. 단오날은 음력 5월5일이다.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뛰기, 씨름을 하는 풍습이 있는데 수리취떡, 준치국, 도미찜, 앵두화채 등을 먹는다. 유두날은 음력 6월15일이다. 한해 농사가 잘되라고 논에서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수단자, 밀전병, 유두면을 먹는다.
칠석날인 음력 7월7일은 은하 동쪽의 견우별과 서쪽의 직녀별이 만나는 날로 시루떡으로 칠석제를 지낸다.
추석은 음력 8월15일이다. 각종 햇곡식과 햇과일을 거두며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날로 송편, 토란탕, 배화채, 화양적 등을 먹는다. 국화꽃이 피는 시기인 중양절(음력 9월9일)에는 국화주, 국화전, 유자화채 등을 먹는다.
동지는 양력 12월22일이다. 팥죽을 문에 발라 나쁜 일을 막고 팥죽에 든 새알심을 나이 수만큼 먹는 풍습이 있다. 섣달그믐은 밤을 새우며 남은 음식을 모두 합해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인절미 등을 먹는다.
떡의 종류도 백가지가 넘을 정도이며 지방마다 해먹는 떡이 달랐다.
또한 범벅타령도 있다. 정월이라고 달떡범벅, 이월한식에는 시래기범벅, 삼월삼짇날은 쑥범벅, 사월에는 느티범벅, 오월에는 수리취범벅, 유월에는 밀범벅, 칠월에는 호박범벅, 팔월달에는 꿀범벅, 구월에는 귀리범벅, 시월에는 무시루범벅, 동짓달에는 동지범벅, 섣달엔 흰떡범벅 등을 해먹었다. 특히 홍천에서는 여름에 감자범벅과·강냉이범벅을 많이 해 먹었다.
이 맘 때면 감자떡과 인절미가 먹고 싶어진다.

다시 ‘장수원’을 돌아보고 ‘감두리’ 강가로 향했다. 이층집 주막이 있었던 삼거리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산했다. 나는 ‘소동개울’을 따라 내려오는 강까지 걸었다. 길은 길이 아니라 풀숲이다. 한여름 내내 한 길씩 자라난 달뿌리와 개역귀, 쑥부쟁이 환삼덩굴이 한 살림을 차리고 간 두렁이라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다. 바지가랭이에는 온갖 풀씨들이 달라붙어 있다. 보송송한 목덜미를 빼어든 달뿌리 수술이 바람에 흔들린다. 가을은 낭만적인 풍경이다. 어떤 모습으로도 다 어울린다.
강가에서 바지를 벗고 강을 건널까 망설이다가 강둑을 따라 다리를 건너 다시 강가로 돌아든다. 감두리 ‘구유소’가는 길.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인가? 사람들이 ‘구유소’에서 낚시를 드리웠다. 아낙네들은 다슬기를 줍기도 하고 아이들과 족대질을 하며 물놀이를 한다.
물이 찬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이다. 외지에 나가 산다는 이유만으로 고향을 찾는 일이 그리 녹록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고향의 물맛을 느낀다. 만나는 사람마다 ‘오랜만이네’라는 말이 인사가 되어버린 지금 자꾸만 낯설어지지 않도록 두 손을 꼭 잡는다.
또 미루어두었던 콩마답(타작)을 하는 풍경도 눈에 띤다. 아이들은 한 아름씩 콩무더기를 옮겨오고 할아버지는 투덕투덕 도리깨질을 한다. 아이도 한번 해 보겠다고 도리깨를 든다. 목덜미에 수건을 두른 얼굴에는 먼지와 땀이 흥건하다. 시골에 살며 몸에 뱄던 일들이라 어줍지 않다.
고향은 삶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창고이다.
감두리를 돌아 ‘깨뜰’로 들어선다. 강과 길은 서로 갈 길을 간다. 물걸리와 와야 삼거리를 잇는 길은 ‘수작골’ 어귀를 지나 ‘밀가루고개(수작골고개)’를 넘어 ‘망전(덕전)’으로 휘돌아가고, 강물은 ‘깨뜰’과 ‘돈두리’를 휘감으며 ‘비선동’으로 향한다.
장수원과 물걸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깨뜰이다. 깨뜰에서 물걸리로 가는 길에는 ‘지풍고개’가 있었다. 삼거리와 귀미터고개 사이이다. 지금은 고개의 흔적도 없이 평평한 길이지만 물걸리로 가는 길이 고개고개를 넘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음을 말해준다.
‘깨뜰’은 양지바른 둔덕 밭이다. 감두리에서 수작골 어귀를 휘돌아가는 길가의 마을이다. 띄엄띄엄 자리 잡은 집들 앞에는 마른 오이덩굴과 호박넝쿨이 하우스 대에서 마르고 있다. ‘깨뜰’ 구랭이는 ‘동막골’이다. 옛날에는 물걸리 동막골로 넘어다녔다고 한다.
수작골 어귀에서 다리를 건너면 ‘돈두리’다. 돌밭이었던 이곳을 어느 농부가 개간하여 부자가 되었다 하여 돈돌(돈두리)이라 한다. 그러나 농사짓기에도 가축을 키우기에도 어려움이 많아 지금은 밤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서있고 둔덕은 인삼밭이다.
‘돈두리’ 강가는 조용하고 깨끗하다. 깨끗한 모래밭과 자갈이 바위와 잘 어울려 천혜의 휴양지이다. ‘돈두리’에서 강가를 따라가면 ‘비선동’이 나온다. 그러나 ‘돈두리’는 개인 사유지라 들어갈 수 없다.
깨뜰과 망전을 잇는 고개는 밀가루고개(수작골고개)다. 밀가루공사로 길을 닦았다하여 그리 부른다. 오르막은 있고 내리막이 없는 고개다. 고개 마루를 이루는 ‘망전’은 너른 뜰을 이루고 있다. ‘연계동(염계동)’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은 관정을 파 물을 댄다.
고개를 돌아 내려와 ‘수작골’로 들어섰다. 골이 깊다. 골이 많아 보이는데 이름을 가진 골은 많지 않다.
수작골을 겹겹이 에두른 산들이 멀리 아홉싸리 고개까지 이어진다. ‘마내골’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골이다. 물걸리 동막골로 이어지는데 지금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다. 조금 더 들어가면 ‘중우터골’과 ‘우뭇골’이 나온다. ‘봉소대’로 이어지는 능선인데 ‘망전’과 등을 맞대고 있다. ‘지라재골’은 ‘연계동골’ 건너편이다.
골막에서 ‘염계동골(연계동/ 영계동)’과 ‘입문골(일문골)’로 이어진다. 수작골막치기인 ‘입문골’어귀에는 ‘돼지골’이 있고 좀 더 올라가면 상당한 규모의 돼지 농장이 있다.
수작골에서 내려와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갔다. 강을 건너지 않고 ‘봉소대’ 산 밑을 따라 들어섰다. 별장인 듯한 한옥에는 빨래가 널려있다. 길은 끊겨있고 좁은 봇물이 흐른다. 이 봇물은 ‘장수원 당재소’ 위쪽에서 시작되어 깨뜰과 봉소대 앞뜰의 논으로 흘러든다.
강을 따라 길이 없는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봇도랑으로 들어섰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다니던 길이었으나 지금은 다니지 않는 미명의 길이 된 것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고 하여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봇물이 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은 ‘봉소대봉’을 끼고 도는 옛길이다. ‘봉소대봉’은 ‘돈두리’와 마주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아기자기하며 강 쪽으로 문처럼 생긴 ‘문바위’가 있다. 바위벼랑을 끼고 봇물이 흘러가는 길은 좁고 위험하다. 한 눈을 팔거나 딴 짓을 하면 강으로 떨어진다.
강은 듬성듬성 놓인 바위에 부딪히는 물결과 물소리로 아름답다. ‘미강(美江)’이다.
‘봉소대’는 비탈진 양지바른 둔덕이다. 오이와 호박 덩굴을 올린 하우스 대에는 미처 따내지 못한 것들이 서리를 맞은 채 매달려있다.
물걸리로 드나들던 사람들은 ‘밧실’에서 ‘말무덤고개’로 해서 ‘봉소대(봉수대)’를 넘어 ‘깨뜰’로 다녔다. 말무덤고개‘나 ‘망전고개’를 넘기 싫은 사람들은 ‘밧실’에서 ‘선바위’를 지나 ‘망전 푯대봉 산밑’을 돌아서 다녔다. 먼 길이었지만 그 길이 강과 같이 흘러가는 길이다.
‘감두리’부터 ‘아래덕탄(德灘)’까지 산과 산 사이로 흐르는 강은 용처럼 구불텅구불텅 흘러간다. 봉소대 앞 강가의 ‘피나무소’ 바위는 여인을 품은 듯 살이 곱고, 너른 모래톱에 와 감기는 물소리는 바람처럼 귓속을 돌아든다. 갈지(之)자로 흐르는 강에 들어서자 물가에서 물고기를 노려보던 백로가 놀란 듯 날아간다. 백로가 날아간 강물에는 멀찍이 선 산봉우리들이 물속에 잠겨 물과 함께 춤을 춘다. 침묵하던 산도 마음을 물에 담그고 물결 춤을 춘다.
이제 다리를 건너면 비선동이고 산길을 따라 오르면 ‘한바위터’를 지나 망전으로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 ‘비선동’으로 들어간다. ‘비선동’은 긴 골짜기를 이루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냇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며 물에 비친 산 그림자에(山影)에 넋을 놓곤 하였는데 신선의 동자가 육구만달(심마니들의 은어로, 잎이 여섯 난 산삼을 이르는 말)을 희롱하여 그 지점에 올라가 확인해 보았지만 동자를 닮은 산삼은 찾지 못하였다고 하고, 또 시냇가 고목의 수양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비가 올때면 마치 신선이 하강하는 것 같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어느 날 백발노승이 시주를 청하러 왔다가 형세를 둘러보고 비선동(飛仙洞)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가 내릴 때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시작하겠다며 비선조우(飛仙早雨)라는 글을 짓고, 만일 마을의 고목을 없애면 불길한 일들이 생길 것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마을에는 아름드리 고목나무들이 많다.
전설상의 ‘비선동’은 ‘한바위터’ ‘봉소대’ ‘도둔터’를 아우르는 것 같다. 산을 끼고 흐르는 비선동 강변은 숨겨진 보물처럼 아름답다. 지금은 다리 건너 마을을 비선동이라 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는 출입금지 푯말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도둔터길’이라는 이정표가 서있다. 강과 나란히 가는 길은 산 아래 마을까지 이어진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과 강을 따라 산 밑을 돌아가는 길이 갈라진다. 강에서는 수관(水管)을 놓고 길을 닦고 있다. 길이 없는 곳에 집을 짓고 길을 내고 있는 것이다.
버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선동’에 버덩을 이룬 곳은 ‘솔모종’과 ‘장승배기’이다. 장승배기는 장승을 세웠던 마을 입구였는데 지금은 비탈밭을 이루고 있다. 솔모종은 다박솔밭을 이루던 곳이나 솔밭은 보이지 않고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말없이 마을을 지키고 서있다. 솔모종에서 ‘문현리’로 넘는 길은 ‘문고개’다. 문고개와 마주하는 골은 버덩을 이루고 있는 장승배기다. 장승배기로 들어서면 웃뭇골과 말구리골로 갈라진다.
골을 따라 마가리까지 올라갔다. 비선동 골막으로 들어가면 ‘더렁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그물처럼 에두른다. 골짜기가 깊으며 홍천에서 가장 먼저 산양을 키운 ‘조롱골목장’터이다. 지금은 산꾼들이나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조롱골’을 넘어 ‘조룬’으로 가기도 하고, ‘연목골’로 들어서 화상대로 가기도 했던 이곳에는 ‘대바위’가 있다.
‘목배나무골’과 ‘샛골’을 지나 내려오면 ‘망태골’을 넘어 ‘점말’로 가는 산길이 있고 건너편에는 배를 대어 놓았다고 하는 ‘배터골(밴터골)’이 있다.
어느새 굽이를 돌아 내려오니 ‘모텡이’다. 이제 고개를 넘을 것이냐 강을 따라 내려갈 것이냐 다리를 건널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고개를 넘으면 ‘문현리’이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선바위’이고, 다리를 건너면 ‘한바위터’를 지나 ‘망전’으로 올라선다.
고개를 넘기엔 좀 늦은 시간이다. 강을 따라 내려가려면 강을 건너야한다. 그렇다면 다리를 건너 망전으로 가는 수밖에.
‘한바우’란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한바위터’는 ‘망전골’ 물이 빠지는 골짜기다. 큰 바위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걸어 올라가는 길은 웬만한 산보다 가파르다. 두 번을 쉬다 걷다하여 큰 길까지 나왔다. ‘망전’이다.
망전은 함지박속에 든 마을 같다. 들어오는 길은 고개를 넘어 올라오게 되고 나가는 길은 모두 고개를 넘어 내려가게 된다. 유일하게 강으로 흘러가는 길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큰 개울도 실개천도 마땅치 않다. 그런데도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망전(望田)’은 원래 ‘덕전(德田)’이다. 덕전이 망전으로 불리우게 된데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스님 한분이 이 마을에 와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시주는 하지 않고 바랑에 거름을 퍼주는 등 박대를 하였다. 이에 화가 난 스님은 이 동네 이름을 망전(亡田)이라 고쳐 부른 뒤 떠났다. 그 후 이 마을의 부자들은 다 망했다 하며 후에 사람들이 망(亡)자를 망(望) 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망전의 그 ‘부자집’은 대머리 최영감 댁이라 하는데 아직도 남아있다.
망전은 와야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룬다. 학교 뒤로 이어지는 산은 ‘망전산’이다. 능선에는 세 개의 고개가 있다. ‘망전고개’와 ‘동막고개’, ‘말무덤고개’다. 서곡리 ‘밧실’에서는 ‘말무덤고개’를 넘어 다녔고 ‘동막골(와야)’에서는 ‘동막고개’나 ‘망전고개’를 넘어 다녔다. 또한 ‘망전산’의 봉우리는 ‘푯대봉’인데 세부측량때 기점을 잡은 푯대가 서 있다.
마을의 중심은 안말이다. 안말 앞으로는 비선동 한바위터로 내려가는 골짜기가 있다. 망전의 유일한 골짜기는 연계동이다. 연계사란 절이 있었다하고, 안막에서 입문골(일문곡, 일문동)로 가는 고개가 있다.
말무덤고개를 넘어 밧실로 향했다. 인삼밭머리를 돌다가 돌배가 조록조록 열린 돌배나무를 보았다. 한 자루 돌배를 주워 짊어지고 고개를 넘었다. 석 달 후면 진한 돌배향 깊은 술을 먹을 수 있겠다 생각하니 마냥 즐겁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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