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으로 50주년 현충일을 맞아 대전에 있는 현충원을 찾았다.
 2002년 6월 29일 서해북방 한계선을 넘어온 북괴 함정과 교전중 전사한 6인의 용사묘역에 무궁화나무를 헌수(獻樹)하기 위해서였다.
  한서 남궁 억 선생께서 애국 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에 무궁화심기운동을 전개한 발원지가 홍천이기에 홍천에서 내가 키운 무궁화 여섯그루를 각각 고인의 명패를 붙여 심고 돌아왔다.
  2002년 6월 29일 밤 그때 육지에선 오~ 필승코리아를 외치며 붉은 상의를 걸치고 얼굴엔 태극문양의 바디페인팅으로 울긋불긋한 젊은이들로 거리가 꽉차고 그 함성이 하늘에 울려 퍼질때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한치의 땅도 적에게 허락할 수 없다는 참수리호의 해군 용사들은 밤하늘을 화포로 밝히며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일본으로 월드컵 참관하러 떠나시고 그 통수권자를 지키는 졸개들은 죽어나가고 있었고... 여기서 그 사연을 다 얘기할 순 없지만 두분의 사연을 언급하고 싶다. 전사자추모본부의 대표로 지금껏 추모본부를 이끌어 오시다가 조국을 떠난 김종선님의 남편 한상국 중사와 병상에서 외로이 부상과 싸우다 순직하신 젊은이 고 박동혁 병장이다.
  치열한 전투중 한상국 중사는 조타실을 벗어나지 않았고 배가 침몰하면서 같이 수장되어 있다가 40여일만에 배안에 갇힌채 발견되었습니다. 시신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김종선씨의 심리상태는 차마 말로 다하기 어려울 것 입니다. 그런 가운데 용기를 내어 추모본부를 이끌어 오고 PKM357의 전쟁박물관으로의 이전을 촉구함은 물론 추모식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며 전사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남편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조국을 등졌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리도 사랑했던 조국의 위정자들은 그의 모든 요구를 묵살 하기에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이 목숨바쳐 지킨 조국의 산하를 떠난 것 입니다.
  박동혁 병장은 사병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직업군인으로서 보상은 물론 순직으로서의 예우도 있었지만 사병으로 전투중 심각한 부상을 입어 사망한 박동혁병장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도 없었습니다. 6.25의 참전용사를 동족의 살인자로 매도하는 자들이 버젓이 활개치는 희한한 세상에 헌수식에서 낭송된 시한 수를 올려 봅니다.


님 떠난 자리에


대~~한민국을 목 터져라 외치며
태극기 흔들고
오, 필승 코리아 삼천리 흔들던 날


그 뜨거운 열광과 함성보다
더 진한 핏빛으로
서해를 물들인 당신


거리의 외침 멎고
그 함성 잊혀져 가건만
조국수호의 부름뜬 님의 두 눈빛은
우리의 가슴속에
날이 갈수록 더욱 뜨겁게 타 오릅니다.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던 태양
찬란한 황금빛 노을로 스러져
서해바다로 잠들고


그 위로 떠오르는 달
수만개 쏟아지는 별은
조국이 산하를 꿈에서도 지키시던
님의 모습 입니다.


님의 피로 지킨 바다
님의 젊음으로
한 치의 땅도 더럽히지 않으려던


거룩한 조국의 이 땅위에
님의 사랑을 심었습니다.


자라소서
힘차게 자라소서
눈부시도록 푸르게 자라소서


님의 사랑이 꽃피는 날
조국의 번영과
평화 통일의 향기가 함께 날리리니
님이여
이제 지켜 보소서  
<조규은·홍천향교 敎化掌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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