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추억을 나누는 사람이다. 말이 그립고 이야기가 그립다. 잠시 잠깐 서로가 품었던 마음이 박하사탕처럼 가슴에 남는다. 나를 태워준 차는 세레스다. 수하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오이를 심었다는데 자재비에 비료값, 기름값, 인건비가 올라 어렵다고 했다. 오이 하나를 상품으로 만드는데 얼마만큼 손이 가는지 아느냐며, 시름을 털어 놓았다.
용두안 삼거리에서 내려 와둔지(왯둔지)로 내려간다. 살구베리와 황정골에서 흘러온 샛강 물줄기가 고양산 앞강으로 흘러든다. 물이 흘러드는 어귀에 ‘사발소’가 있었는데 제방을 막으면서 메워졌다고 한다.
물이 휘돌아 흐르면서 생긴 소(沼)는 추억의 항아리이다. 물놀이 터뿐만 아니라 한여름은 낚시터였고 밀애의 장소이자 천렵장소였다. 불알친구들의 모임인 초등학교 동창회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물가로 이어진다. 물귀신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샛강이나 큰 강에 대한 기억은 제방을 쌓으면서 묻혀버렸다. 향수를 느낀다는 것은 마음속에 잠재해있던 그 시간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 냄새와 맛과 감촉을 다만 추억 할 따름이다. 옥수수와 감자는 그 기억 속으로 회귀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방가대 끝자락은 제방이 생기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말이라 한다. 새말에는 ‘옥선주’가 자리한다. 한국 전통식품 명인 제24호로 지정된 한국 전통 민속주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조선시대 전주 이씨 가문의 이용필은 두 분의 어버이를 모시고 살았다. 고종 38년 농촌에 괴질이 돌았고 두 어버이는 괴질에 걸렸다. 이에 이용필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와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봉양하였다. 부모님은 장수하셨다. 이 소문을 들은 임금은 효자 포상과 통상대부정 3품 벼슬을 하사하였다. 이에 이용필은 가주(家酒)인 ‘옥촉서 약소주’를 진상하고 부인의 함자를 따서 ‘옥선주’로 이름을 붙였다.
그 후 후손들은 가주의 비법을 전수하여 ‘옥선주’를 만들게 되었다. 옥선주를 빚는데는 강원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 쌀과 누룩 그리고 강원도 자연산 갈근과 당귀로 함께 술을 빚는데 강원도 청정지역의 130M 천연암반수를 사용한다. 40%라는 알코올 함량에도 불구하고 순하게 넘어가며 입 안 가득 청량감을 전해준다. 또 달콤쌉싸름하고 뒤끝이 깨끗하다.
새말을 돌아 ‘와둔지’로 들어선다. 갈밭둔지다. 길가에 식당이 있고 길 건너 산비탈을 이루는 곳이다.
갈밭이라는 지명은 참나무류의 갈참나무가 들어선 곳을 말하거나,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의 모래땅에 군락을 이루고 자라는 다년생 풀을 말하기도 한다.
강원도에서는 주로 갈참나무가 숲을 이룬 고을을 말한다. 갈을 꺾는다는 것은 논에 밑거름으로 갈나무를 베어 넣는 것을 말한다.
와둔지는 왯둔지라고도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500년전에 기와를 굽던 터다. 질 좋은 점토를 캐던 곳도, 기와를 굽던 가마터도 있었다. 지금 정수환(75)씨가 살고 있는 집터는 가마터라고 한다. 밭을 갈다보면 오백년 묵은 기왓장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와둔지는 고양산과 마주하는 단봉산 왼편에 ‘큰 우뭇골짜기’와 ‘작은 우뭇골짜기’가 있다. 비가 와야 물이 흐를 정도이나 가뭄에도 밭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 땅속으로 물이 흐르는 우물(샘)이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을 뒷받침 하는 이야기가 바로 와둔지의 지형이 배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하여 ‘우뭇골’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큰길과 강 사이에는 논이다. 예전에는 강물이 집 뒤로 흘렀고 강 건너에도 농사를 짓던 땅이 있었다고 한다. 자연히 강폭은 넓었는데 하천정비를 하면서 제방을 쌓아 지금처럼 강이 흐르게 됐다고 한다.
정수환씨는 내면 광원리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줄곧 살고 있다. 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하고 울타리 밑에는 철마다 얻어먹을 수 있는 각종 나물을 심었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식물원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고야’가 한창이다. 요즘 보기 힘든 ‘밀고야’도 엄지손톱만한 파란 열매를 달고 있다.
‘고야’는 강원도 사투리다. 원래는 오얏이다. 자두의 재래종이라 할 수 있다. 자두나무는 오얏나무, 자도나무, 추리나무라고 불리고, 또는 이화나무라고도 불린다.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 하여 ‘자도’라 하다가 ‘자두’가 된 것이다. 도방고리(道傍苦李)니, 과전이하(瓜田李下)니 도선국사의 비기에도 나오는 오얏은 한여름으로 가는 계절의 과일이다. 자두가 나오고 나서 고야나무는 많이 베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홍천에서 자두 맛이 좋기로 소문난 집은 구성포리에 있다. 한아름 되는 이 자두나무는 수형도 멋있다. 봄이면 자두나무 꽃그늘에 앉아 쉬고, 여름이면 자두를 따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정자나무다.
와둔지 앞을 흐르는 강에는 ‘연목소’가 있다. ‘작은 고양골’ 아래 쯤이 된다. 와둔지를 돌아 흘러 여울을 만들고 여울 아래 연못 같은 물웅덩이를 이루었다. 이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여 연목소라 이름 하게 되었다 한다. 지금쯤이면 연이 한창 꽃대를 밀어 올려 장관을 이루었을 터이다.
와둔지에는 약수가 있다. 일명 ‘단봉산 와둔지 약수’다. 약수는 와둔지에서 수하리로 들어서는 단봉산 아래 산중턱에서 흘러나온다. 약수터를 사이에 두고 한철 장사를 하는 올챙이국수집이 두 집이다. 두 집은 쌍둥이 형제간으로 어느 집을 가든지 맛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수터 관리는 수하리 사람들이 한다. 여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연은 이렇다. 와둔지에 약수가 효험이 있다하여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러 모여들었다. 너도 한대접 나도 한 대접씩 마시고 몸을 씻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수 아래쪽의 사람들은 씻은 듯 다 나았으나, 위쪽 사람들은 전혀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 후로 약수는 자연히 아래쪽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위쪽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수보다도 올챙이국수를 먹으러 일부러 나서기도 한다. 맛에 대한 감성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올챙이국수 한 그릇을 먹고 ‘수하리’로 넘어간다. 넘어간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마을의 경계를 넘어가기 때문이다.
강물은 경계도 없이 흐르고 산은 경계도 없이 이어진다. 경계는 마음으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을 넘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응골 골짜기’가 나를 반긴다. 입구에 ‘응골축제’라는 펜션이 자리한다. 응골은 가두둑과 방가대를 오가는 지름길이었다. 응골 안에는 금광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방아간과 금확(금덩어리를 부수는 돌절구)이 있었는데, 금방아간은 오래되어 무너지고 확은 누군가 다 주워갔다고 한다. 응골 물은 큰 강에 스미듯 흘러들어 바위벼랑을 감돈다. 일명 ‘황골벼랑’이다.
응골 아래 골은 ‘장지골’이다. 차가 다니지 않던 시절 응골과 장지골 사이에는 ‘할딱고개’가 있었다. 나지막하지만 숨이 차 할딱거리며 넘었다고 한다. 장지골은 촉새봉이 이룬 골짜기다. 골 입구는 좁지만 들어갈수록 넓어진다. 검은골-반장자리골-띠약골을 지나 촉새봉 정상에 닿게 된다. 장지골 입구는 ‘둔퉁말’이다.
둔퉁말을 지나면 성황당이 있었다. 소나무가 당산목으로 솔무정을 이루었는데 학교를 오가다가 숨어서 놀래 주던 곳이라고 추억담을 들려준다.
이 모든 지역을 합쳐 ‘가두둑’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가구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집안에서 쓰는 가구나 목기, 채반과 농경문화의 쟁기, 써래, 우마차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목기문화의 장인들이 살았던 곳이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물건은 보기 어렵다.
가두둑은 고양산줄기의 능선과 마주한다. 강물도 고양산 능선을 감돌아 흐른다. 가두둑에서 강을 건너면 ‘새번시기’다. 산발치에 버덩을 이루고 있어 온갖 새들이 날아와 집을 짓고 새끼를 쳐 갔다. 지금은 한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솔경지뜰’은 새번식기 아래 버덩을 이룬다. 소나무가 다박솔밭을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곳인데 소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너른 버덩이라 강을 건너야만 하는데 여울목을 이루고 있어 그리 깊지는 않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으로 빨래를 하러 자주 나갔고 또 강을 건너 농사를 지었다. 이 여울목이 ‘빨래나드리’이다.
가두둑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받드는 바위도 있다. ‘문바위’와 ‘장군바위(신랑바위)’, ‘각시바위’이다. 문바위는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행치령 아래 문바위골 입구에 서있는 바위이고, 다른 하나는 솔경지뜰 뒤 고양산 능선 마루에 우뚝 선 바위이다. 두 곳의 바위 모두 대문의 형상을 하고 있고, 마을의 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장군바위는 ‘생베’에서 진여울로 들어가는 어귀 산마루에 있다. 갑옷을 입은 장군이 호령하듯 서 있는 모습이다. 또한 마을에서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아낙네들이 이곳에 와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점지해 주었다고 하여 ‘신랑바위’라고도 한다. 신랑바위는 각시바위와 마주하고 있다. 길에서는 안 보이는데 신랑바위까지 가면 족두리를 쓴 각시가 얼굴을 들어 보인다.
솔경지뜰은 강과 맞닿은 산발치까지 이어지고 건너편에는 물레방아간이 있었다. 물레방아간은 버덩말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빻았다. 그런 기억은 일흔이 넘은 노인네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용소’도 있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다슬기도 줍고 고기도 잡으러 나간다. 특히 장어에 대한 기억을 들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메기를 잡으러 가서 뭔가 묵직한 게 걸렸는데, 뱀인 줄 알고 바늘을 빼지 못하고 집에 와서 보니 팔뚝만한 굵기의 장어였더라는 것이다. 낚시니까 절반만 믿으라는데 실제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어를 잡았다고 한다. 메기는 지금도 잘 낚인다.
특히 용소에는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굴이 있는데 그 굴은 용소배기에 물을 대기 위하여 뚫었다는 굴이다. 용소배기는 지금 숲이 우거졌는데, 쌀이 귀했던 시절에는 볏섬이나 거두어들이던 논이었다. 용소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굴이 있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듯 휘감는 물줄기가 소용돌이 친다. 열 댓 살 먹은 마을의 아이들은 산 쪽에서 이어지는 바위에서 뛰어내리거나 멱을 감으며 자맥질을 배웠다. 또 그 과정을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이기도 했다.
용소 아래는 삼형제 소가 있어 개구쟁이들의 쉼터가 되었다. 삼형제 소에서 수영 실력을 길러 용소로 올라가는 것이다.
강을 따라 내려오면 ‘생베’가 나온다. 생베는 가두둑의 끝자락이다. 와둔지 약수터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약수사’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나오고 굽이를 돌면 ‘작은 구둔치(황골고개)’와 ‘큰 구둔치고개’가 나온다. 큰길에서 약수사 쪽으로 내려오면 생베다.
‘생베’는 ‘구둔치고개’에서 흐르는 개울이 지나는 마을이다. 병자호란 丙子胡亂{1636년(인조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때 구둔치고개에는 왜병(청군)이 주둔하고 ‘용의 터’에는 관군이 주둔하였다 한다. 고개를 넘으면 ‘물걸리 새말’이고 새말 큰골을 따라 오르면 ‘비행기재’를 넘어 장평 솔치고개가 나온다. 그러나 고개를 넘지 말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옹장골’이 나오는데 옹기를 빚던 노인네가 살았다고 하고, 골 안막으로 올라가면 ‘촉새봉’, ‘진구새미골’과 ‘터골’로 이어진다. 물은 고개를 가로지르며 장군바위 밑을 지나 큰 강에 닿는다.
나는 약수사 길로 접어들었다. 초록에 살짝 얼굴을 내민 장군바위가 강 건너 중수골의 각시 바위를 바라본다.
미약골, 도실암골, 먼데이골, 삼근암골, 면골, 황정골, 미울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실개천을 이루어 마을의 들녘을 돌아 고양산을 옆구리에 끼고 흐른다. 크고 작은 여울목을 이루면서 제 갈 길을 간다.
‘진여울’에서 듣는 물소리는 내 안의 그리움을 자꾸만 들추어낸다. 감미로운 감촉이다. 문득 소월의 시 ‘개여울’이 콧노래로 흘러나온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중략 …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김소월의 ‘개여울’ -

누군가 보고 싶어지는 노래다. 누군가 생각하며 진여울로 들어섰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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