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18)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

흥화학교와 YMCA 중학부에서 교육자로서 첫발을 딛다

남궁억은 민영환의 흥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1903년도 황성기독청년회 즉 황성 YMCA 창립 이사위원 때부터 관계하던 YMCA에 중학부를 신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자 그곳에도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를 보면 남궁억에게는 ‘교육’이 숙명처럼 다가왔고 이를 계기로 평생 교육에 몸을 담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YMCA 중학부 교사도

배재의 음악교육에서 기억돼야 할 인물 중 하나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 김인식이다. 그는 학생 시절 서양 선교사로부터 음악을 배워 작곡과 오르간, 금관악기 등을 배웠고 배재학당에서 음악 교사를 했다. 1907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 중학부의 음악 교사가 됐고, 조선정악전습소에서 본격적인 후진을 양성하여 홍난파, 이상준 등과 같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 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합창을 지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을 결성했다.

윗글에서 중요한 점은 남궁억이 흥화학교에서 가르칠 때 YMCA 중학부도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1904년에 문을 연 YMCA 야간을 기원으로 하면 오히려 흥화학교보다 YMCA 학관의 역사가 일 년 정도 앞선다. 남궁억이 YMCA 교육을 뒷받침하였다.

YMCA는 초기 한국 기독교 지도자 양성소였다

이한복의 다음 자료도 눈길을 끈다.
서울 Y.M.C.A.에서 학관 운영을 시작한 것은 1904년 가을의 일이다. 처음에는 정식 학관이 아니라 야학(夜學)으로 운영되었다. 한 주일에 3일씩 강의가 있었는데 150여 명이 수강하였다. 본격적인 학관 운영은 1906년부터였다. 이 일에는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투옥되었던 이상재, 정교, 남궁억, 홍정후, 김정식, 유성준, 이승인, 홍재기, 이원긍, 안국선, 신흥우, 이승만 등이 옥중에서 게일(J.S.Gale)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 1904년에 석방된다.<중략> 
이를 계기로 YMCA의 사업은 이들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학관의 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이명직은 서울 YMCA와 재일 한인 YMCA를 통해 이상재, 김정식, 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남궁억, 신흥우 등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글로 보아 남궁억 선생이 YMCA 학관 교사가 된 것은 빠르면 야학 운영 시작 시기인 1904년이 되겠고, 늦더라도 학관으로 정식 문을 연 1906년이 될 것이다. 그런데 1910년에도 ‘나는 남궁억 선생의 제자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YMCA 중학부에서 5~6년은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교육자로서의 기초가 형성된 흥화학교와 YMCA 중학부 교사

흥화학교와 YMCA 중학부에서 시작된 ‘교사의 길’은 이후 남궁억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현산학교 개교, 배화학당 교사, 상동청년학원 원장, 모곡학교 개교 및 교장으로 교육자의 길을 가는데 경험과 자신감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었기에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이처럼 남궁억은 젊은 시절부터 교육에 몸을 담았다. 신교육의 맛을 보았고 교육을 통하여 구국의 불을 비추자는 신념도 형성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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