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15)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어전 통역관, 칠곡부사, 내부 토목국장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을 전개하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몰락하며 선유사로 명(命)받다

고종은 겉으로는 일본에 동조(同調), 속으로는 의병을 독려

남궁억이 강원도 선유사로 파송되었을 때는 고종의 애통조(哀痛詔)가 이미 의병장에게 전달되었었다. 애통조는 1895년 12월 15일에 작성되어 1896년 초에 전국 각지의 향교에 보낸 것으로 1895년 겨울부터 격렬해진 전국의 의병들을 선무(宣撫)하기 위하여 발송한 조서이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인의 민비시해)과 단발령(斷髮令) 등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풍이 특히 강하던 경상도 진주와 안동 일대에서 격렬한 의병 활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경상도 일대의 유생들이 의병운동 전개로 인해 크게 동요하게 되자 이를 선무하기 위해 고종이 직접 각지의 향교에 조서를 발송한 것이다. 

이 애통조에 의하면 고종은 서양식 제도의 도입과 단발령 등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에 대해 자신의 죄가 크다고 말하면서 각지의 의병을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불렀다. 또 이들을 근왕칠로군(勤王七路軍)으로 명하면서 영의정 김병시(金炳始)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고, 전진사(前進士) 계국량(桂國樑)을 감군지휘사(監軍指揮使)로 삼아 조정의 명령에 부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은 춘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춘천의 역사’에 기록된 번역본이다.

슬프다. 나의 죄악이 크고 악이 충만하여 하늘이 돌보지 않으시니 국세가 기울어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강성한 이웃 나라는 틈을 엿보고 역신은 권력을 농락하였다. 하물며 나는 머리를 깎이우고 면류관을 훼손당하였으니 오직 나 같은 죄인의 실낱같은 목숨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사직과 민생을 생각하며 혹시 만에 하나라도 보전될까 하고 애통의 조서를 내리는 것이다.  

 영의정 김병시를 도체찰사 삼아 안팎을 무마하게 하고, 전진사 계국량으로 감군지휘사로 삼으며 칠로에 근왕병을 두되 호서는 충의군, 관동은 용의군, 영남은 장의군, 해서는 효의군, 호남은 분의군, 관서는 강의군, 관북은 감의군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에게는 초토사를 제수하고 비밀병부도 당연히 내줄 것이며, 여러 군대의 인신도 모두 스스로 새겨 쓰고, 종사관에 있어서도 관찰사, 군수 이하 중에서 네가 가려서 좇게 하고 집집마다 용사를 뽑고 양가의 무사들을 모두 모집하여 상 줄 자는 상주고 벌 줄 자는 벌 줄 것이다. 흉년이 심한 고을은 금년 조세의 절반을 삭감하여 주고 머리 깎는 일은 우선 금지할 것이며, 민생을 편안하게 하고, 아전의 수를 감하는 일은 모두 예전대로 복구하고,수령으로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우선 가려내어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여, 무릇 잡범과 사형수까지도 모두 용서하고 그동안에 남발하였던 새 법령도 아울러 실시하지 말 것이다. 

 이제부터 대궐 밖의 일은 다 임의로 결재할 수 있다. 오직 경기 한 도는 순의군이라 하라. 나는 사직에 죽기로 하였으니 내외 의사들은 내 뜻을 본받아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종묘와 사직과 민생을 생각하라. 이같이 포고하니 잘 알도록 하라. 1895년 12월 15일 자정. 조서를 비밀히 내림.

국왕(고종)의 비밀 지시는 의병 항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국왕의 승낙 없이도 “나라의 역적은 국법이나 군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백성된 자는 누구나 처단할 수 있다”는 「춘추(春秋)」의 논리는 의병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곧 의병항쟁을 시작한 유생의병장들의 군사행동을 묵인해 주고 또 일정 지역의 행정·재정·사법·군사권까지 한시적으로 위임한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춘천에서도 이소응 의병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의병활동

춘천 의병은 이듬해인 1896년 1월 20일 이소응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1월 28일 춘천관찰사로 부임하던 개화파 조인승을 잡아 처단하였다. 고종의 애통조는 1월 31일 이소응 의병진에 도착하였다. 의병대장 이소응은 애통조에 힘입어 1월 31일 「격고팔도(檄告八道)」라는 격문을 각지에 보내어 다 함께 기병(起兵)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소응의 격문은 각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호서(湖西:충청도)지방에서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고, 멀리 관남(關南:함경남도)지방에서도 많은 의병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렇듯 강원·충청·함경도 등지의 기의(起義)를 자극한 춘천 의병은 날로 의병의 숫자가 늘어나 한때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남궁억이 선유사로 파송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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