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66]

겨우내 잔설殘雪과 함께 시름을 반복했던 산촌에도 매화 손님을 맞이하면서 봄이 찾아왔다. 봄 손님을 맞이하려고 부산을 떠는 모습도 간혹 살핀다. 툇마루에 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있던 할아버지도 마당가에 앉아 있는 손주놈에게 이것저것을 시키면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하게 한다. 며느리는 장독대를 치우고, 아들은 농기구를 손본다. 냇물에 임한 대울타리는 누구네 집인가 / 희미한 깃발이 살구꽃 속에 드러나 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春日山村(춘일산촌) / 청천 하응림
냇물에 대울타리 누구의 집인가
희미한 깃발이 살구꽃 속  있는데
술 사서 먹으려 해도 서쪽으로 해지네.
竹籬臨水是誰家    隱約靑帘出杏花
죽리림수시수가    은약청렴출행화
欲典春衣沽酒飮    不堪芳草日西斜
욕전춘의고주음    불감방초일서사

봄옷을 잡히고 술을 사서 마시려 했더니만(春日山村)으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1536~1567)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냇물에 임한 대울타리는 누구네 집인가 / 희미한 깃발이 살구꽃 속에 드러나 있다 // 봄옷을 잡히고 술을 사서 마시려 했더니만 / 향기로운 풀 위에 해가 서쪽으로 기우니 감당하지 못하겠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어느 봄날 산촌에서]로 번역된다. 어느 봄날 마음은 뒤숭숭했지만 봄에 흠뻑 취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떠오르는 시상이 차마 주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시상을 떠오르게 하려면 약주 한 잔은 필수품이었으나 술값이 없어 빈털터리다. 할 수 없이 살풋한 봄옷을 주막집에 잡히고 술을 먹지 않을 수 없었으려니 시적 흥취는 극에 도달하는 멋을 부린다.

시인은 선경의 시상을 냇물에 임한 대울타리로 한정하더니만 살구꽃 깃발을 상상해 내는 시주머니를 털어낸다. 냇물에 임하고 있는 대울타리는 과연 누구네 집인가를 묻고, 희미한 깃발이 살구꽃 속에 살포시 드러나 있다고 했다. 살구꽃 송이를 깃발이라고 표현하는 시어의 구성에서 흥겨운 무릎장단을 치지 않을 수 없다. 

화자의 심회는 컬컬한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났음을 알게 한다. 시주머니는 넉넉한데 시적인 조미료가 조금은 부족했음을 알게 한다. 봄옷을 잡히고 술을 사 마시려 했더니만, 그마저도 향기로운 풀 위에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해 기우는 그 모습이 시상 주머니를 만지는 것보다 훨씬 넉넉했음을 알게 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대울타리 누구네 집 살구꽃 속 드러났네, 봄옷 잡혀 술을 사니 감당하지 못하겠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1536~1567)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문장이 뛰어나서 조선 중기의 학자들 중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송익필 등과 함께 당대의 8문장으로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송나라 소식의 문장을 사숙하였다고 하며, 시와 서는 물론 그림솜씨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竹籬: 대울타리. 臨水: 냇물에 임하다. 是誰家: 이는 누구네 집인가. 隱約: 말이 분명치 않다. 靑帘: 주막을 알리는 푸른 기([酒]나 [酒幕]을 쓴 기). 出杏花: 살구꽃에 드러난다.  // 欲典春衣: 봄옷을 잡히고자 하다. 沽酒飮: 술을 사서 마시다. 不堪: 감당하지 못하다. 芳草: 향기롭다. 日西斜: 해가 서쪽으로 기울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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