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8)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유럽 5개국 순방 전권대신의 참찬관(서기관)이 되다

고종의 영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남궁억에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당시 개국(開國)으로 외국과 교류가 활발하던 때였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사절단을 살펴보자.

조선이 개국하게 되어 외국에 사절단 파견

일본에는 두 차례의 수신사(修信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였다. 수신사는 1876년과 1880년 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되었다. 1차는 김기수, 2차는 김홍집이 수신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1881년 박정양 등의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는 일본의 서구 문물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최초의 조선 대표단이었다.

또 1881년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다. 개항기 최초로 청나라에 파견한 유학생 인솔사행(引率使行)이다. 영선사 김윤식에게는 신무기에 관한 학습과 연미사(聯美事)에 관한 사전교섭 등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결과는 1882년 4월 조미수호조약 체결로 결실을 본다.

1983년 6월 11일 미국 공사의 부임 답례로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보빙사는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887년 9월 28일에는 조민희가 유럽 5개국 순방 전권 대신이 되었고, 이를 위하여 여섯 명의 관원을 함께 파견할 때 주차 영·덕·아·의·법국(駐箚 英, 德, 俄, 義, 法: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그 나라에 머무는 것이므로 임시주재 대사라고 보면 됨) 참찬관(일부 자료에는 서기관으로 나옴)이 되어 전권대신을 수행하게 되었다.

25세에 정삼품 참찬관이 되어 유럽 5개국 순방을 위해 출발

남궁억은 25살에 참찬관(서기관)에 임용되었다. 참찬관(參贊官)은 조선시대 경연청(經筵廳)의 정삼품 벼슬이다.

李承五를 禮曹判書에 任命하고 南宮檍·金星圭를 駐箚英·德·俄·義·法國參贊官, 蔡興植을 同繙譯官에 差下하다.

어떤 자료에는 6개국으로 되어 있는데 ‘고종시대사’를 보면 5개국으로 나와 있다. 참찬관(參贊官)은 고려말~조선시대 경연(經筵)에서 지사(知事)와 동지사(同知事)를 보좌한 정3품 당상의 관직인데 조선시대 내내 조금씩 그 역할이 변화하다가 고종 때에는 경연 관련 관원으로서의 참찬관 이외에도 외교관으로서의 참찬관이라는 직제가 마련되었다.

남궁억은 외교관으로서의 참찬관으로 임명받았으므로 대외적으로는 정삼품 당상관으로 급격한 승진을 하게 되었다. 이는 비약적인 승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중에 문서를 보면 대외 직명만 승차시킨 것으로 보인다. 홍콩에 머물게 된 것은 청나라 정부의 방해도 있었지만 홍콩에 체류하고 있던 민영익과 의견이 맞지 않은 것도 원인이었다.

홍콩에서 머물러 있었으며, 구미 순방은 꿈이 되었다.

조민희·남궁억 일행은 1년 반에 가까운 긴 시간을 홍콩에 머물면서 허송세월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영어가 능통한 남궁억은 영국령이었던 홍콩에서 행동이 비교적 자유스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서양 문물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궁억의 조선 개화(開化)의 신념은 홍콩에서 비로소 꽃봉오리가 맺혀졌다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이때 유럽 순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였다면 남궁억의 미래를 보는 시야(視野)는 그만큼 넓어지고 커졌을 터인데 모처럼의 기회가 홍콩에서 끝난 것은 조선의 앞날을 생각할 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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