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7)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우리나라 최초의 어전 영어 통역관 남궁억

남궁억은 최초의 조선(경성)총해관(총세무사청) 해관원(海關員)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고종 최초의 영어 어전 통역관으로 임명받아 입궐한다. 이전에도 중국어 통역관 및 일본어 통역관은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영어 통역관으로 임명된 것은 남궁억이 처음이었다. 선생이 가는 길에는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생소한 길을 개척하며 걸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선생의 초기 관료 임면(任免) 자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수록된 남궁억의 초기 관료 임면 자료 중 1884년부 1893년까지 정리한 것이 아래와 같다. 남궁억은 약 9년간 주로 중앙관서에서 일했다. 우정총국-병조-내무부-병비(병조)-칠곡부사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러 자료를 검토하다가 보면 같은 업무임에도 기록한 날짜에 따라 상호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때로는 음력과 양력으로 인하여 혼돈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보기 좋게 정리해 보자.

- 1884.08.21,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차하<관리로 임명>
- 1886.07.12, 병조가 구전 정사<왕의 명령으로 임명>하여 부사용에 단부<한 사람만 추천하여 관리로 임명하는 것>
- 1886.07.12, 내무부 부사용 남궁억을 부주사로 차하
- 1887.09.29. 내무부 부주사 남궁억을 서기관으로 차하
- 1888.01.29, 내무부 부주사 남궁억 감하<벼슬아치 수를 줄임>
- 1888.02.10, 병비 부장 가설에 남궁억 단부
- 1891.04.27, 병조 별군직 남궁억 선전관 가설에 구전 단부
- 1892.08.18, 별군직 남궁억 선전관 가설에 구전 단부
- 1893.02.01, 칠곡부사 남궁억 강령전에서 소견<불러서 만남>

위 『승정원일기』를 보면 남궁억의 최초 관직이 ‘우정총국’으로 나와 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선생의 최초 관직이 ‘해관원’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 글도 발견된다.

동문학을 통해 배출된 인물은 근대적인 기구인 해관(海關)·전국(電局) 등에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단기간 어학연수를 받은 하급 관리였다. <중략> 그리하여 15세 이상의 총명한 자제를 선발하여 영문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해마다 6월과 12월에 재예(才藝)를 시험을 보여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진하기를 권장한다. 그 가운데 우등인 학도로 남궁억, 신낙균, 권종린, 홍우관, 성익영, 김규희는 이미 관에 임용되었는데, 상무(商務)의 교재에 있어 유익이 있으리라. 이철의, 유흥렬, 이자연, 송달현은 전국(電局)에 파견하여 학습시키고 있는데 모두 민첩하고 숙달하여 정식 임용할 만하다고 한다.

이 글을 보면 해관과 전국에 임용하였는데 특히 전국(電局)에 임용한 것을 구분하여 전국에 임용하였다고 하고 남궁억 등은 그냥 ‘관에 임용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상무(商務)의 교재에 있어 유익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즉 상무의 일을 보았다는 이야기이므로 ‘해관 또는 다른 관에 임용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때 해관(海關)에 임용된 대표적인 사람은 남궁억과 홍우관이었다. 남궁억은 조선총해관, 홍우관은 인천해관에 발령받았다.

초기 선생의 관직 변화에 관한 정밀 연구 필요

남궁억은 조선총해관 견습생 생활을 하고 있던 1886년 10월 21일 내무부 부주사로 임명받았다. 공식적인 관직기의 시작이다. 사실은 조선 총해관도 관직이기는 하나 아직 견습생이었다. 그 후 내무부 부주사로 특채되었고 고종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고종의 영어 통역관이 된 남궁억은 이제 조선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는 남궁억에게는 사서삼경이라는 유학(儒學)과 영어라는 신학문을 두루 갖춘 당시로서는 드문 인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