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6)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원(海官員) 남궁억

쇄국에서 개방으로 국가정책이 바뀌게 되자 외국과 무역도 해야 하겠고, 또 조미수호통상조약 이래 계속해서 외국 여러 나라와 통상 및 수교 회담도 해야 하겠고, 조약도 체결해야 하였기에 정부에서는 준비할 일이 많아졌다. 이 일을 맡을 외국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외무협판과 총세무사로 임명되어 외교와 세관에 관한 자문에 응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교장인 묄렌도르프와 동문학에서도 함께 했고, 조선총해관에서도 함께 근무하였다. 이는 묄렌도르프가 동문학에서부터 우수한 학생인 남궁억을 눈여겨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성에 있는 조선총세무사청의 견습생

조선 정부는 1883년 4월 24일 조선해관 본부인 총해관을 창설하고 1884년 비록 견습생이긴 하여도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 직원으로 남궁억 등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승정원일기 등에서는 남궁억을 1884년 8월 21일에 ‘‘이조 우정총국에 유학(幼學) 남궁억을 사사(司事)로 차하(差下)한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다. 우정총국은 해관과는 다른데 어찌된 일일까?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1884년이면 남궁억은 동문학을 졸업하고 조선총해관 견습생으로 취업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우정총국에 겸하여 임명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가능성을 열어보면 영어를 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국제 우편 사무를 위한 필요로 겸직 발령을 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으나 확인이 필요하다.

오늘날 관세청에서 최초의 해관원으로 기리는 남궁억

세관에서는 남궁억을 기리는 각종 행사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인천세관 소속의 감시정 중 ‘남궁억호’가 있다. 그리고 군산에 있는 호남관세박물관에는 최초의 해관원 남궁억을 기리는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인천세관에 소속되어 있는 감시정(監視艇)에는 ‘남궁억호(南宮檍號)’가 있다. 경인일보 2018년 2월 8일자 보도에 의하면 조선총해관에 근무했던 남궁억을 기리기 위하여 인천세관에서 명명한 것이다.

둘째, 군산관세박물관에 남궁억 안내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관세청의 각종 자료에서는 조선총해관에 견습생으로 발령을 받은 남궁억을 한국인 최초의 해관원이라고 말한다. 호남관세박물관에는 남궁억이 조선총해관에 발령받은 서류와 관련된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셋째는 남궁억 관련 해관 문서 일부를 한서남궁억기념관으로 보내왔다. 2016년 10월 29일 강원도민일보는 ‘한서 남궁억 선생 해관 문서 홍천 한서남궁억기념관에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이 근무하던 기관의 문서가 한서기념관으로 돌아왔다. 서울본부세관은 지난 27일 홍천군 서면 한서기념관을 방문, 관세박물관에 보관하던 인천해관문서 영인본 1권을 기증했다. 인천해관문서는 지난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인천해관의 임명, 업무처리 등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 남궁억 선생은 1884년부터 1898년(1886년의 오류)까지 경성총해관(現 관세청)에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노석환 서울본부 세관장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이 계승된 의미 있는 장소에 기증하게 되어 기쁘다”라며 “홍천군민과 방문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해 줄 수 있는 전시자료로 활용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남궁억은 경성총해관의 견습생으로 약 2년간 근무하였다. 이 시기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격동기로 우정총국 설치, 갑신정변, 거문도 사건, 서울-인천 간 전신 개통, 노비세습제 폐지, 프랑스와 수교 등 복잡다단했던 시기였다. 이때 남궁억은 서양 여러 나라 사람과 만나 관세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 문서도 교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남궁억의 국가관이라든가 인생관이라든가 역사관 같은 신념의 기초가 형성되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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