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5)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남궁억이 다닌 ‘동문학’ 교육활동의 이모저모 

학생이 등교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생활하는 것도, 모두 서양인의 눈에는 특별하였다. 그렇지만 교수 방법에서만은 원어민 몰입(沒入)식 교육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서로 상대 언어를 조금도 모르면서 가르치고 배웠으니 당시 교실 풍경을 생각하면 완전 희극공연이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인 교사들은 영어로 발음하고 그 뜻을 한자로 써서 이해시키는 등의 방법이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동문학의 등교와 학교생활 모습

당시 양반집에는 하인들이 존재하던 때라 학생들이 가마를 타고 등교(登校)하면 하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들고 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서양 교사의 눈에는 정말 이국적이고 희한한 풍경이었다. 동문학 학생들이 가마를 타고 등교하고 요강까지 들고 오는 모습을 보는 서양인들은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교육의 힘은 커서 차츰 적응이 되어 갔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인(中人)이 통역을 맡았다. 양반이 중인들이나 하는 통변을 위하여 학교에 가느냐 등의 비난도 없지 않았다. 선생의 제자이며 모곡학교 교사를 지낸 조용구 전 배명중·고등학교 이사장은 동문학의 사회 인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필자는 선생에게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후로는 친구들이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어린아이들도 천주 학생이라고 길가에서 놀려 대더란 것이다. 이렇게 놀림을 받고도 집에 와서는 방에 틀어 밝혀 열심히 공부하였다. 방이 추워 벽에 성에가 하얗게 서린 데서 영어 사전과 밤새도록 씨름했다.”

남궁억은 천자문과 사서삼경의 유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언어 장벽에 도전함으로써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혁신적인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동문학 교수법은 원어민에 의한 몰입식 직접교수법

동문학의 교육 방법 중에는 직접교수법과 몰입식 교육이 있었다. 부임한 교사들은 한글을 몰랐고 입학한 학생들은 영어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무작정 원어민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다. 손짓, 발짓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영어교육이 시작되었지만 발음만은 명확하여 회화를 하는 사람들 간에는 아주 정확한 의사전달이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몰입식’, ‘직접 교수식’ 교육 방법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영어 과목이 선택과목이 되고, 영어 발음에 적합하지 않은 일본어의 특성 등의 관계로 차츰 문법 중심의 영어교육으로 변모하였다.

상상해 본 남궁억의 통학로(通學路)  

남궁억은 정동 배재학당 터에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부설되었던 동문학이 있던 재동(현 헌법재판소)까지 걸어서 통학했다고 보아야 한다. 집안에 여유가 없어 말을 탄다거나 하인을 부리며 가마로 등교할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거리로 길이를 재면 약 3km 정도 될 것이다.

동문학(同文學) 우수 졸업생 남궁억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 보도는 동문학을 졸업하는 학도 35명 가운데 6명의 우등학도(優等學徒)가 있었는데 남궁억이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이름이 올라 있다. 이는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문학에서 우등생으로 졸업한 남궁억은 1884년(고종 21)에는 조선 총해사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의 조선총해관에 견습생으로 취업하게 됨으로써 임시직이지만 첫 번째 관직에 발을 내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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