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61]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면서 바람과 비까지 겸했던 진통이 있었던 모양이다. 봄의 흥취와 함께 봄날의 밤은 그렇게 깊어졌을 것이다. 봄비로 인하여 한 송이 꽃이 재롱을 부리더니만, 여름의 장마로 인하여 꽃이 한 시름을 겪다가, 가을 부둥켜안고 열매를 맺으며 변하는 계절의 순환 앞에 나약한 인간은 그저 엄숙해 질 수밖에 없다. 어젯밤은 바람도 있고 겸하여 비도 있었는데 / 배꽃은 만발하고 살구꽃은 텅 비어 있었네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春夜風雨(춘야풍우) / 습재 권벽
비오니 꽃피고 바람 부니 꽃 지고
봄 가고 가을 오고 모두가 이 가운데 
어젯밤 비 바람에서 배꽃이 만발하네.
花開因雨落因風    春去秋來在此中
화개인우락인풍      춘거추래재차중
昨夜有風兼有雨    桃花滿發杏花空
작야유풍겸유우      도화만발행화공

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 모두 이 가운데 있네(春夜風雨)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습재(習齋) 권벽(權擘:1520~1593)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꽃은 비로 인하여 피고 바람으로 인하여 지니 / 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 모두 이 가운데 있다 // 어젯밤은 바람도 있고 겸하여 비도 있었는데 / 배꽃은 만발하고 살구꽃은 텅 비어 있었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어느 봄날 밤, 바람과 비가 내리더니]로 번역된다. 봄비가 촉촉해 내렸던 모양이다. 국화꽃 한 사발이 피려면 소쩍새도 또 그렇게 울었다는 어느 시인의 하소연처럼, 봄비 한 줌이 내리려는 또 고통스런 산고産苦가 있으렷다. 모진 바람이 불면서 주룩주룩 내리는 봄비를 받아 새싹이 움터 나오면서 재잘거린다. 배꽃은 만발하고, 살구꽃은 지는 순환도 있으렷다.

시인의 짓궂은 봄비 한 줌 때문에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어느 한 순간을 목도하면서 시상 주머니는 마냥 넉넉해 보이면서도 서성이는 모습이다. 꽃은 비로 인하여 피고 바람으로 인하여 지는 것이니 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 모두 이 가운데 있다고 했다. 어느 하나가 올바르면 다른 하나는 멍이 들 수도 있다는 점에 착안하는 분주한 모습도 보인다.

화자는 봄비 한 줌이 내리기 위한 고통스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젯밤에는 바람도 있고 겸하여 비도 있었는데, 배꽃은 만발하고 살구꽃은 떨어지고 비었다는 시심 한 줌을 내뱉는다. [그럴 거야! 인사도, 어느 하나가 합당하고 나면 어느 하나는 멍이 들고 마는 것을…]이란 시인의 심회를 듣는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비바람에 꽃 피고 져 봄가을이 이 가운데, 바람 없는 어젯밤엔 배꽃 만발 텅 빈 살구’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습재(習齋) 권벽(權擘:1520~1593)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을사사화 때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던 것으로 알려진다. 명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 장례원판결사를 역임하고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 [명종실록]의 편찬에 깊숙하게 참여했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花開: 꽃이 피다. 因雨: 비로 인하다. 落: 떨어지다. 因風: 바람으로 인하다. 春去: 봄이 가다. 秋來: 가을이 오다. 在此中: 이 가운데 있다. // 昨夜: 어젯밤. 有風: 바람이 있다. 兼有雨: 겸하여 비도 있다. 桃花: 복숭이 꽃이 피다. 滿發: 만발하다. 杏花: 살구꽃. 空: 공허하다. 결국 ‘지다’는 뜻.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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