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한서 남궁억, 한성에서의 삶(4)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사   연구회장
▲ 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학교인 ‘동문학’을 수석 졸업하다

남궁억은 21세가 되던 해인 1883(고종 20년) 영어통역관 양성학교인 동문학에 입학하였다. 사실 성장기인 10대 만해도 영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쇄국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드나들긴 하였지만, 국가와 국가 간 또는 국가와 기관 간의 대화에서 중국어만 할 줄 알고 한문을 쓸 수만 있으면 큰 어려움이 없던 시대였다. 물론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역관도 있었다. 

동문학(同文學) 개교

그러나 외국과 통상 및 외교 협정 등을 위하여 영어통역관이 필요해진 것이다. 선생은 국내 첫 번째 영어통역학교의 학생이 되어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조선은 종주국 청나라 외교의 틀 속에 있었기에 독자적인 외교활동에는 큰 제약을 받았다. 웬만한 일은 중국을 통하여 해결되었다. 동문학의 최초 교사가 중국인이었던 것도 그런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영어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시대적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집권 10년 만에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후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영어 통역이 더욱 필요하게 되어 동문학(同文學)을 개교하게 된 것이다. 통변학교(通辯學校)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문학(同文學)과 뭘렌도르프 

동문학은 민영환 등 보빙사의 건의와 총세무사인 묄렌도르프가 조선해관 설립을 위한 차관 교섭 및 해관원(오늘날의 세관원) 선발을 위해 중국을 방문하였다가 중국인 교사 오중현과 당소위를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개교하였다. 학비는 무료였으므로 가세가 여의찮았던 남궁억에게는 그 점도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동문학의 교장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묄렌도르프 협판이 임명되었으며 교사는 중국인이었다. 학생은 40여 명이었으며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다. 몇 달 뒤에는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대신하여 영국인 핼리팩스에게 경영이 인계되었다가 1886년 9월 23일 청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여 미국에 의뢰하여 개교한 ‘육영공원’이 문을 열면서 동문학은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동문학 입학생은 42명으로 되어 있다. 이름을 훑어보니 후(後)에 남궁억만큼 활동한 인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 이후 외국인이 영어 통역을 하던 자리에 동문학 출신들로 메워지기 시작하여 통변(通辯) 업무의 조선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구한말 혼란기에 외국과 관세 등의 관계에서 중요한 소임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궁억은 동문학의 우수 학생 

국사편찬위원회의 다음 자료에서는 남궁억의 우수한 수학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학교 출신들은 후일 세관을 비롯한 신설 기관에 들어가 크게 활약함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그중에서도 한서 남궁억 같은 이는 특출한 사람으로서 독립협회 부회장과 황성신문 사장으로 민권의 확장과 언론의 창달을 위해 활약한 바 크니, 그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위 기록은 대부분 맞다. 다만 한 곳의 기술(記述)은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냈다는 부분인데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이므로 함부로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는 없으나 남궁억이 독립협회 부회장에 피임(被任)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직무를 대행한 적이 있는지는 알아볼 일이다.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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