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58]]

진도에 벽파정碧波亭만 있는 것은 아니었단다. 가볍게 파도 이는 물가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것이 우리 선인들의 풍류였다. 그래서 흔히 벽파정碧波亭 혹은 벽정碧亭이라 했다. 시원한 바람이며 물결을 타고 펼쳐지는 풍경은 보기만 해도 시원함을 더했다. 친지나 동료들과 함께 앉아 즐기는 풍류는 그 무엇에 비교되지 않았으리. 새벽달 공허하게 한 그림자를 거느린데, 국화와 단풍이 바야흐로 정을 머금는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碧亭待人(벽정대인) / 소재 노수신
새벽달이 공허하게 그림자 거느리고
국화 단풍 바야흐로 정을 가득 머금네
나룻가 구름 낀 누각 돌아가며 기대네.
曉月空將一影行    黃花赤葉正含情
효월공장일영행    황화적엽정함정
雲沙目斷無人問    倚遍津樓八九楹
운사목단무인문    의편진루팔구영

나룻가 누각의 여덟아홉 기둥을 돌아가면서 기대네(碧亭待人)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새벽달 공허하게 한 그림자를 거느린데 / 국화와 단풍이 바야흐로 정을 머금는구나 // 구름 낀 물가가 저 멀리서 보이지를 않는데 / 나룻가 누각의 여덟아홉 기둥을 돌아가면서 기대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벽파정에서 사람을 기다리며]로 번역된다. 조선 사대부들의 만남의 장소는 정자였을 것이다. 풍류를 즐기면서 잔술을 돌렸고, 잔술을 돌리면서 한시 한 수를 읊으면서 멋진 가락을 얹어가면서 한시창 한 구절을 즐겼다. 뿐만 아니라 시절가에서 유래를 찾는 당시에 유행의 한 줄기였던 시조창 한 구절을 얹어 놓으면 노옹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리라.

시인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푸른 정자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서성이는 모습을 보는 시상을 만지고 있다. 새벽달이 공허하게 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가는데, 국화와 단풍이 바야흐로 정을 머금는다는 시상이다. 이 시적인 그림에는 경景과 정情이 뒤범벅인 시심을 일으키기에 다소는 분주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화자는 기다리는 사람이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았음을 시적인 그림에 살포시 녹아 있음을 알린다. 구름 낀 물가가 멀리 보이지를 않고, 나룻가 누각의 여덟아홉 개의 기둥을 돌아가며 기대었다고 했다. 팔각정 기둥 모두를 차분하게 돌아가면서 기대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시상을 만난다. 서성이면서 차분하지 못한 심정이 은근하게 녹아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새벽달은 공허한데 국화 단풍 정 머금고, 물가 멀리 구름 끼고 누각기둥 기댄다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다른 호는 여봉노인(茹峯老人), 암실(暗室), 이재(伊齋)를 쓰고 있다. 을사사화 때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유배되었다가 북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던 인물로도 알려진다. 저서로는 [소재집]이 전한다.

【한자와 어구】
碧亭: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曉月: 새벽달. 空: 공허하게. 將: 거느리다. 一影行: 한 그림자의 행렬. 黃花: 국화. 赤葉: 단풍. 正: 바로. 含情: 정을 머금는다. // 雲沙: 구름 낀 모래밭. 目斷: 눈에는 보이지 않다. 無人問: 사람이 없다. 倚遍: 기대다. 津樓: 나룻가 누각. 八九楹: 8~9개 기둥. 모든 기둥.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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