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57]

봄이 되면 춘첩을 써서 붙였다. 입춘이 되면 대문이나 대들보, 기둥, 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였다. 입춘첩 또는 춘첩자, 춘축이다. 많이 쓰이는 글귀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壽如山富如海] 등도 있다. 한가하고 바쁘거나 분수를 따르고 또 편안하게 살았는데, 늙은 어부는 봄 강물이 따뜻해졌다고 알리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夢賚亭春帖(몽뢰정춘첩) / 임당 정유길
먼저의 임금 때에 머리 흰 노판서
한망(閒忙) 때 분수 맞게 편안하게 사는데
어옹은(漁翁) 따뜻하다고 쏘가리를 드리네.  
白髮先朝老判書    閒忙隨分且安居
백발선조로판서    한망수분차안거
漁翁報道春江暖    未到花時進鱖魚
어옹보도춘강난    미도화시진궐어

꽃 피는 시절도 이르지 않았는데 쏘가리 드린다(夢賚亭春帖)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1588)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먼저 임금 때의 머리 흰 노판서 / 한가하고 바쁘거나 분수를 따르고 또 편안하게 살았네 // 늙은 어부는 봄 강물이 따뜻해졌다고 알리면서 / 꽃 피는 시절도 이르지 않았는데 쏘가리 드린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몽유정의 입춘 주련첩]으로 번역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저자도와 그 인근에 많은 정자가 있었다 한다. 왕실 소유의 제천정, 화양정을 비롯하여 선비들이 지은 몽뢰정, 수월정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몽뢰정 정자도 선비들이 모여 술과 함께 풍류를 즐겼던 것으로 생각되는 조선의 풍류의 한 산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노 판서와 어부의 한 생활상을 훤하게 들여다보는 시상 주머니는 풍부해 보이는 시적 그림을 은근히 매만진다. 먼저 임금 때의 흰머리가 많았던 노판서가 있었는데, 한가하거나 바쁘거나 분수를 따르고 또 편안하게 살았다고 했다. 늙은 ‘판서’와 어기적거리는 늙은 ‘어부’라는 대구법이라는 시적인 멋을 찾는다. 

화자는 시적인 반전을 시도하는 봄 경치와 시절에 맞지 않는 쏘가리를 대비하면서 어부의 정성어린 심회를 엮어 나간다. 늙은 어부는 봄 강물이 따뜻해졌다고 알리면서, 꽃 피는 시절도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쏘가리를 드린다고 했다. 쏘가리는 아마도 철이 이른 고기이지만 마침 판서를 위해서 인지 용케도 한 마리가 잡혔던 모양이다. 그것도 운이 좋았을까?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전조 임금 노판서가 분수따라 편안하네. 봄 강물의 늙은 어부 쏘가리를 드리면서’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1588)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임당(林塘), 상덕재(尙德齋)이다. 1538년(중종 33) 문과에 장원, 전적이 되고, 공조좌랑·정언·이조좌랑·중추부 도사를 지냈다. 1544년 이황·김인후 등과 함께 사가독서했고, 대사헌에 이어 예조판서에 승진했다.

【한자와 어구】
春帖: 봄에 쓴 글, 입춘 때 기둥에 써 붙인 글. 白髮: 백발. 先朝: 먼저 임금 때, 老判書: 늙은 판서. 閒忙: 한가하고 바쁘게. 隨分: 분수를 따라서. 且安居: 또한 편안하게 살았다. // 漁翁: 늙은 어부. 報道: 알라다. 春江暖: 봄 강물이 따뜻하다. 未到: 이르지 않다. 花時: 꽃필 때. 進鱖魚: 쏘가리를 드리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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