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50]

봄은 늘 생생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용솟음치는 향기를 은은하게 맡는다. 따스한 양지는 소곤거리는 싹들이 봄소식과 몸을 부딪치려는 자기 소회에 찬 나머지 희망의 열쇠를 한 움큼 쥐게 된다. 그렇지만 가을은 봄의 ‘열어봄’이란 생각보다는 가을의 ‘닫음’이란 폐장閉藏을 먼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추회를 생각했을 것이다. 싹싹 오동나무 가지는 흔들고, 하늘은 푸르디푸른데 천천히 기러기가 날아간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삽화 : 인당 박민서 화백     

  

秋恨(추한) / 양사기 소실
가을바람 솔 솔 솔 오동가지 흔들고
기러기는 푸른 하늘에 천천히 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초승달 지는구나.
秋風摵摵動梧枝    碧落冥冥雁去遲
추풍색색동오지    벽락명명안거지
斜倚綠窓人不見    一眉新月下西墀
사의녹창인불견    일미신월하서지

눈썹 같은 초승달만이 서쪽 뜰로 지는구나(秋恨)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양사기 소실(楊士奇 小室:?∼?)로 알려지는 여류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가을바람 싹싹 오동나무 가지 흔들고 / 하늘은 푸르디푸른데 천천히 기러기가 날아간다 // 비스듬히 푸른 창에 기대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 눈썹 같은 초승달만이 서쪽 뜰로 지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가을이면 남는 정한]으로 번역된다. 아무도 찾아올 사람도 없는 것 같지만 누군가를 은근하게 기다리는 시상들을 만나게 된다. 소실이나 후실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바람만 불어도 그 임인가를 그렸고, 낙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랬다. 그 소리를 임이 찾아오는 소리로 착각했으려니 더욱 그랬을 것은 뻔해 보인다.

소소한 가을이었던가 보다. 시인은 소소한 가을바람이란 선경의 시상 속에 파란 하늘을 가르면서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음이란 시상의 주머니는 넉넉해 보인다. 가을바람 싹싹하여 오동나무 가지를 잡아 흔들고, 하늘은 푸르디푸른데 기러기가 천천히 날아간다고 했다. 영락없이 가을의 한 소묘를 잘도 채색하며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겠다.

화자는 선경이라는 자연에 흠뻑 취하는 척 하더니만 누군가를 은근하게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로움을 보이기 시작한다. 비스듬히 푸른 창에 기대어 보니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쪽 뜰로 비스듬히 지고 있다고 했다. 창가에 기대선 심정은 누군가를, 아니다 임을 기다리는 초조한 심정이 은근하게 녹아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가을바람 오동 흔들 푸른 하늘 기러기가, 사람들은 보이잖고 눈썹 같은 초승달만’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양사기 소실(楊士奇 小室:?∼?)인 여류시인으로만 알려질 뿐, 생몰연대와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한자와 어구】
秋風: 가을바람. 摵摵(색색): 잎이 지는 소리. 털어내는 소리. 動梧枝: 오동나무 가지를 흔들다. 碧落冥冥: 하늘이 푸르디푸르다. 雁去遲: 기러기가 더디게 날아가다. // 斜倚: 비스듬히 기대다. 綠窓: 푸른 창. 人不見: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一眉: 한 눈썹 新月: 초승달. 下西墀: 서쪽 뜰로 넘어가 지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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