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77]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심사위원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 국가기록원심사위원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남편은 의사이고 아내는 약사이며 그 자녀 또한 의사라면 의료에 대한 걱정을 덜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필자의 경우 주변 지인이나 학교 동창들 동기 중 의사 몇이 있다. 그들의 얘기를 한 번 해보자. 먼저 우리 지역에서 수십 년간 외과의사로서 의료봉사하던 모 의사는 필자와 친구이며 모 단체 회원과 회장 등을 같이한 매우 가까운 의료인이다. 그는 외과 전문의로서 우리 지역의 열악했던 의료 시절 유일한 의원을 개원해 수많은 환자를 돌봤다.

그는 호남 출신으로 전주에서 의대를 나오고 홍천 주둔 군부대에서 군의관으로 나라에 봉사했다. 그 후 월남에 파병해 역시 포탄 속에서 장병들을 치료하고 만기 소령으로 예편했다. 제대 후 홍천에 최초로 전문외과의원을 개원했다. 물론 이전에도 홍천에는 의원 몇 군데가 있었으나 모두 전문의가 아니고 일반의원들이었다. 그 지인은 처음 홍천우체국 자리를 임대해 개원했고 병원이 번성하자 지금 상가건물로 사용 중인 신장대리 코너에 신축병원을 짓고 운영했다. 당시 필자는 바로 길 건너편에 불과 10여m 사이에서 살았다. 그 지인인 의사의 3남매가 우리 애들과 홍천초등학교 동창들이다.

K 의사의 부인은 대구가 연고인 약사로 신축병원 옆에 약국을 내고 K 의사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했다. 역시 잘 운영됐다. K 의사가 1980년 대농촌 유행성출혈열 치료를 잘해서 전국에서도 소문이 났다. 박사학위도 취득했고 테니스도 수준급이었다. 말년에 부동산에 손을 댔다 실패도 했고 맏아들이 교통사고로 잘못되자 실의를 많이 했다. 2000년대 초 병원을 접고 인제 요양병원에 잠시 근무하다 이 또한 그만두고 지금은 쉬고 있다.

물론 그의 아내도 약국을 접고 은퇴인으로 편히 살고 있다. 그는 병원 개원 시 의사의 본분을 지킨 자로서 의료봉사도 많이 했다. 입원환자가 병원 치료비를 내지 못할 때는 무상치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홍천군테니스협회를 창립하고 테니스장을 마련할 때 거금을 희사했고 국제클럽인 홍천청년회의소(JCI) 회장과 특우회장도 했다. 요즘은 건강이 안 좋아 자가치료 중이라고 한다.

춘천에 필자의 동기 의료인이었던 J 약사는 K대 약학교수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장을 지냈고 K대에서 후배 약사 양성에 힘쓰다 정년퇴직했다. 춘천시 인근 조용한 곳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몇 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은 식물인간으로 응급실과 요양병원을 오가며 힘겨운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아들은 K대 정신과 의사다. 전 K대병원장을 역임했고 원장 임기가 끝나자 다시 K병원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의사지만 아버지의 병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또 홍천 출신으로 1960년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수련의를 거친 후 서울대병원에서 일하던 필자의 중학교 동창인 L 의사는 국내에서도 몇째 안 가는 흉부외과 전문의다. 국내에서 몇 년 있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도 의사 자격증을 따고 촉망받는 의사로 있을 때 1968년 동해에서는 푸에블로호가 북한으로 납치됐고 1976년 휴전선에서는 미루나무 사건이 터지는 등 남북 관계가 극히 나빠져 국제정세는 남북 간 전쟁이 예상되고 있었다.

L 의사는 미국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당시 입국장에서의 일화로 출입국 직원이 왜 귀국하느냐고 묻자 그는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날 것 같아 군 의무장교로 복무하고자 입국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L 의사는 홍천에서 병원을 개업해 10여 년간 운영하다 아이들이 크자 2세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귀경했다. 그 동창은 몇 년 전 80세로 먼저 세상을 떴다. 원인은 백혈병으로 의사 본인이나 가족들이 의료인이라 해도 자기의 건강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