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5-17]

마음에 남아 있는 느낌은 어떤 사물을 보고 난 이후만은 아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감회!  마음으로 크게 감동을 받았던 감회! 감동을 받았거나 깊은 감동을 받았던 감회들은 더 없이 크고 넓게만 보이는 수가 있다. 감회의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낸다면 철철 넘치는 감회가 있을 수 있다. 깊은 감회는 좋은 시상이 되고 율도 되었다. 좋은 말 오천 필은 어느 날에야 닿으려나, 복사꽃 핀 문 밖에는 풀더미만 수북하게 우거졌다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感懷(감회) / 척약재 김구용
생사는 운명인 걸 하늘인들 어찌하나
동해를 바라보니 고향길은 아득하고
오천 필 언제 오려나 풀더미 수북 하네.
死生由命奈何天    東望扶桑路渺然
사생유명내하천    동망부상로묘연
良馬五千何日到    桃花門外草芊芊
량마오천하일도    도화문외초천천

죽고 사는 것 운명인 걸 하늘인들 어찌하겠나(感懷)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1338~138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죽고 사는 것 운명인 걸 하늘인들 어찌하겠나. / 동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고향길은 아득하구나 // 좋은 말 오천 필은 어느 날에야 닿을는지 / 복사꽃 핀 문 밖에는 풀더미만 수북이 우거졌구나]라는 시상이다.

[지난 일을 더듬어 생각하며 느끼는 회포]로 번역된다. 화려했던 지난날과 현재의 어려운 처지를 생각하는 모습이 은근하게 배어난 작품의 면면이 보인다. 시절을 잘못 만나 먼 곳에 귀양을 가 있거나 벼슬에서 물러나 앉아 좋은 시절을 기대하는 모습의 은근함도 만나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작품의 구석진 면을 보인다.

시인은 현재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비관된 운명 같은 허탈함을 엿보이는가 하면, 하늘의 뜻에 맡기는 시낭詩囊을 매만지고 있어 보인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 걸 하늘인들 어찌하겠는가, 동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고향길은 아득하기만 하다고 했다. 동해 쪽 바다가 보이는 어느 한 구석에 있음이 시적인 배경이 되어 있어 적막함을 감돌게 한다.

화자는 임금이 계시는 개경에서 좋은 소식을 싣고 양마良馬가 도달하여 자신을 모셔 오기를 은근하게 바라는 심회가 엿보이고 있다. 좋은 말 오천 필은 어느 날에야 이곳에 닿을는지, 아무도 찾지 않는 복사꽃 핀 문 밖에는 풀더미만 수북이 우거졌다고 했다. 그만 발길이 끊긴 한적한 곳이었음이 상상되는 시상이다.

‘죽고 사는 운명인 걸 고향 길은 아득해라, 오천 필마 언제 닿아 복사꽃만 우거졌네’라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고려 후기의 문인이자 학자다. 1371년 강릉도 안렴사를 지냈던 인물로 알려진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원과 명의 교체기였다고 하는데, 이때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양면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어려운 시기였다.

【한자와 어구】
死生: 죽고 살다. 由命: 운명에 연유하다. 奈何天: 하늘인들 어찌하겠나(의문문). 東望: 동쪽을 바라보다. 扶桑: 고향.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 세상의 동쪽 지역 끝. 路渺然: 길이 묘연하다. // 良馬: 좋은 말. 五千: 오천 필. 何日到: 어느 날에 이르다. 桃花: 복숭아 꽃. 門外: 문 밖에. 草芊芊: 풀이 무성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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