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61]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우리가 일상적으로 밝기를 표현할 때 대낮같이 밝다란 말을 쓴다. 어두운 밤인데 전기나 기타 발광체를 이용해 낮처럼 밝다는 의미다.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를 시작으로 형광등 시대를 지나 현재는 대부분 LED 전구를 사용한다. 요즘 세계적 에너지난 속에 올겨울은 춥게 살아야 할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한 방울의 기름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으로 세계의 에너지 공급에 큰 차질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 천연가스의 유럽국가 공급도 불안하고 곁들여 산유국들의 석유생산도 불안한 상태다. 언제 갑자기 석유파동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즉 대한제국 때까지 석유공급이 없었고 일제가 경제침략을 한 1900년대 일본 상인들에 의해 석유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농촌이나 시골에서는 아주까리기름이나 벌꿀을 따고 남은 밀랍기름, 관솔 등을 이용해 밤을 밝혔다. 특히 농촌에서는 고콜(요즘으로 치면 벽난로)이라고 해서 안방 윗목 모서리에 진흙을 쌓아 화덕을 만들고 굴뚝을 밖으로 뽑은 후 주로 관솔을 잘게 패서 연료로 쓰며 불도 밝히고 어느 정도 난방도 했다. 서울(당시 경성)을 위시한 대도시에서는 일본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석유를 이용해 호롱불을 등잔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시골에서도 석유 배급으로 가구별로 일정 양을 살 수 있게 되자 이를 사용했다.

당시 농촌이나 시골에서는 대부분 해가 떨어지면 일찍들 잤다.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쪽마루나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서 모기도 쫓고 불도 밝히면서 초저녁을 넘겼고 겨울엔 주로 관솔불을 이용해 밤을 보냈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이 들어오면서 석유나 휘발유가 공식 비공식 등으로 공급이 돼서 약간의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 광복 직후 수력발전소가 건립되고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를 지어 우선 공장에 쓰고 가정에도 공급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 홍천은 일제강점기 때는 시내와 금 광산을 위주로 전기가 공급되다가 6.25전쟁으로 모두 파괴됐다. 그 당시 홍천의 많은 금광들도 역시 폐광으로 마감했다.

1954년 홍천읍내는 시장을 중심으로 자가발전기(자동차 엔진)로 시장 일부에 전기를 공급했고 1955년경에는 배 엔진으로 발전을 했다. 발전소 장소는 6.25전쟁 전 누에고치 견건장으로 썼던 건물이 불에 타고 부속시설이었던 시멘트 구조물 안에 설치했다(지금의 청과물 대구상회 터). 그 후 발전소는 현재 동양빌딩 건너편 현 여관 터에 있다가 전기가 들어온 후 폐쇄됐다. 인류는 전기 사용과 더불어 발전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에 전기가 사용되지 않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활이 존재하는 한 전기는 더욱 많이 사용될 것이다.

광복 전에는 주로 수력발전으로 북한에서 생산해 남한에 공급했다. 6.25전쟁이 나기 전 전기는 자주 끊겨서 남한은 약간의 수력과 화력 중심의 발전을 했다. 그 후 남한은 다목적댐인 소양강댐 안동댐 등 수륙 댐을 조성해 발전했고 석탄과 기름을 원료로 하는 발전소를 운영하고 요즘은 원자력 중심으로 신규 발전을 해왔다. 문재인정부 때 문 대통령이 부산의 모영화관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되면서 일어나는 재난 영화를 보고 원자력발전소 자체를 축소 운영하겠다고 한 후부터 전기공급에 차질이 나기 시작했다. 예상되는 재앙에 대비하는 것도 좋지만 재앙을 유추해 현실을 부정하고 정책의 방향을 설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 전력을 담당하는 한전이 수십 억 원의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전기는 아껴 써야 한다. 불필요한 가로등과 상점의 홍보성 전등도 일정시간 이후에는 꺼야 한다. 집안의 가전들도 필요한 것 이외에는 꺼야 한다. 우리 주변도 두루 살펴서 불필요한 곳의 전기낭비는 없는지 살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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