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53]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옛 것이라고 해서 모두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이란 말도 있지만 지나간 추억으로 5~60년대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는 정말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의 한토막이다. 특히 7~80대 전후의 나이 먹은 사람들의 경우 대도시를 빼고는 대부분 가을 운동회를 잊지 못할 것이다. 가을 운동회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유추컨대 우리나라가 신교육을 받아들이면서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서부터 광복 후일 것이다.

운동회는 봄에 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가을에 했다. 농촌에서는 가을 추수를 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특히 추석을 전후해 열리는 운동회 날은 그 마을 축제의 날이었다. 아이들은 일찌감치 운동복에 모자를 쓰고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경기를 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먼저 학교에 보내고 먹을 음식을 잔뜩 싸가지고 뒤따라갔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드리워져 있고 천막도 치고 솔잎으로 개선문도 만들었다.

6.25 한국전쟁 직후 학교가 불타고 운동장도 파괴된 학교는 인근 잔디밭에서 열기도 했다. 운동회의 경기는 육상과 기마전 기계체조 등이 있으나 운동회의 최고 절정은 청백 이어달리기다. 여기에는 학년별 대표와 학부모 선생님들이 참여했다. 학생들이 이겨서 일등이 예상되는데 선생님들이 못 뛰어서 질 때는 아쉬운 함성이 이어지곤 했다.

특기경기 중에는 공부는 잘하는데 달리기를 못해 만년 꼴찌를 차지하는 아이들을 위해 산수 문제를 푸는 경기도 있었다. 아무리 1등으로 들어왔어도 산수 문제를 못 맞히면 맨 꼴찌가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공평한 경기를 위해서 운동을 잘 못하는 학생들을 배려한 경기였다. 그 밖에 학부모 경기도 있었다. 이웃학교로 원정을 가 뜀뛰기도 해줬다. 어쨌든 운동회 날만은 즐거운 마을잔치고 화합의 한마당이었다.

오전경기가 끝난 후 이어지는 점심시간은 자유롭고 넉넉하게 부모님들이 싸가지고 온 음식을 땡볕을 피해 그늘에서 먹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양지쪽을 찾아 아이들과 같이 먹었다. 메뉴는 대개 송편과 바람떡 과일 등이었고 요즘처럼 수입과일은 전혀 없었다. 필자의 경우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부모님이 오셨는데 점심반찬으로 송이장아찌가 있었다. 그 향기가 지금도 입안에 가득한 듯 아련한 추억에 잠긴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 운동을 잘해서 공책을 많이 탔다. 문제풀이 경기에서는 늘 1등을 했고 이어달리기(계주) 대표로 나가서 뛰기도 했다.

가을 운동회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의 인구가 과밀화되면서부터다. 도시의 학교 운동장이 없어지고 실내체육관이 건립되는 등의 사회적 여건이 운동회를 없어지게 했다. 한편으로는 운동회가 일제 교육의 한 부분으로 탐탁치 않게 여겨 자연히 쇠퇴하게 됐다는 어느 전직 교육자의 이야기도 있다. 필자의 지인 교육자들에 의하면 운동회에 대한 지침이 불확실하고 교육부 고위부서에서 학교의 운동회 개최 여부에 대해 별다른 흥미와 관심이 사라져 일선학교 또한 이에 부합해 운동회가 자연히 없어진 것 같다고 한다.

어쨌든 이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아이들의 함성이 울리는 초등학교의 운동회가 그리운 것은 필자만의 마음은 아닌 것 같다. 스포츠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한 영역이다. 요즘 성인들이 즐기는 골프나 볼링 테니스 축구 배드민턴 농구 배구 탁구 등등 모든 경기도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야 잘할 수 있다. 현대인들로서는 선수까지는 안 되더라도 취미로 할 만한 것 몇 가지는 해야만 한다. 한때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 또는 ‘국력은 체력이다’라는 구호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 강원도는 특별자치도로 확정됐다. 교육당국에서도 가을 운동회를 부활시켜 농촌의 어린이와 부모들이 함께 한마당 큰잔치를 벌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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