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46]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부역(賦役)이란 사전적 의미로 “국가나 공공단체가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지우는 노역”이다. 홍천읍 모 외곽부락에 현수막이 걸려있는데 내용이 마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부역을 나오라고 쓰여 있다. 부역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독재국가나 제국주의시대에나 있었던 구시대의 유물이다. 그런데 지금 21세기에 그런 표현의 현수막이 버젓이 걸려 있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착잡하거나 불쾌하게 하고 있다. 이런 아주 소소한 것 하나가 모이고 쌓여 그 나라의 민도와 국가발전의 정체성이 된다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요즘 신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7~80대 이후 어르신들을 소위 꼰대라고 조롱하면서 저런 것 하나 지적 못하고 그냥 넘어가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역꼰대로 너희들이 이런 것을 아느냐고 되묻고 싶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사는 것도 꼰대들이 묵묵히 일해서 일궈놓은 산업들이고 문화다. 독재타도니 민주화니 하는 것들도 배가 불러서 하는 말이다. 쫄쫄 굶어가며 그런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역을 대표적으로 실시한 때가 일제강점기 때다. 물론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도 국가가 반강제적으로 국민을 동원해 일을 많이 했지만 특히 일제강점기 때 심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부역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따랐다. 부역은 주로 마을길 손질하기나 큰길 보수와 닦기 등이었다. 당시에는 국토의 대부분이 포장이 안 되고 맨땅이다 보니 비가 오면 파이고 허물어져서 고쳐야만 했다. 이때 마을 이장(당시는 구장)이 각 반원을 통해 부역인원을 소집했다. 소집당일 못 나가면 다음에 곱으로 노역을 해야 했다. 가장이 부역에 못 나가면 여자나 그도 안 되면 초등학생이라도 꼭 나가야만 했다. 필자도 중학교 때부터 참여한바가 있다.

50년대 부역은 주로 도로에 관한 것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은 하천정비(그 당시는 산사태나 하천둑 붕괴)가 많았다. 도로정비는 자갈들을 주어다 도로에 깔면 그 자갈이 땅에 박혀서 일종의 포장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장마를 겪고 나면 또 해야 하기 때문에 대개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번 정도 했다. 그 다음은 민둥산에 나무심기다. 6.25 한국전란으로 많은 산하가 황폐화되고 나무는 땔감으로 사용해 산이 그야말로 벌거숭이였다. 지방에서는 국유림이나 군유림 같은 데서 목상들이 나무를 베어 장작(대작과 소작이 있음)을 만들어 대도시에 땔감을 공급했다.

정부에서는 정부운영자금도 부족한 터에 산림복구사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60년대 들어와서 국가재정이 조금 나아질 때 산림녹화사업의 시작으로 먼저 사방공사라고 하여 민둥산에 산사태 방지를 위해 나무와 잔디를 심었다. 이때 필자도 고교 때 부역을 나간바 있다. 사태가 난 산에 잔디(뗏장)를 깔고 다대기라고 해서 합판으로 만든 넉가래로 심어 놓은 잔디를 쳐서 흙에 붙도록 하는 일로 힘든 일이었다. 젊다고 자진해서 부역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홍천읍내에 살 때는 인구도 많지만 도로도 많아 각 동네나 반을 지정해 대표적 부역인 도로에 자갈 깔기가 있었다. 당시 신장대리에 살던 필자네는 삼마치1리와 하오안리 쪽이 담당구역이라서 몇 번 나간 적이 있다. 자갈부역은 두 가지로 진행됐다. 먼저 강가에서 자갈을 모아놓는 그룹과 그 자갈을 운반해 실제로 도로에 까는 그룹이 있었는데 필자는 학생임에도 두 가지를 몇 년 동안 다 해봤다.

부역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 국민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부역동원령에 매우 시달렸기 때문에 지금도 부역하면 반감이 든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왜 마을에 공동의 일거리가 없겠냐마는 기왕에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일을 한다면 마을 봉사하기 등으로 하면 좋겠다. 물론 부역을 새겨서 쓰면 되겠지만 기왕이면 아름다운 말로 고쳐서 쓰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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