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44]

▲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전호에서 나의 지나온 얘기를 대부분 요약 기술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생각하고 겪은 주변의 이런저런 얘기를 간추려 쓰고자 한다. 필자는 퇴직 후 즉시 공인중개사 개업을 했다. 때문에 퇴직연금을 안 받았다(사실 신청을 안 했다). 중개보조원 1명과 보조직원 1명으로 3명이 홍천읍 갈마곡리에 개업을 했다. 이곳에서 몇 년 있다가 상오안리로 이전하고 그곳에서 역시 몇 년 있다가 다시 진리로 온 후 사무실을 접었다. 총 10여 년을 운영했다. 금융인은 매월 받는 연금이 없다. 필자는 일시불로 받은 퇴직금으로 기와집을 헐고 2층 원룸으로 70평을 지었다. 여기서 나오는 월세와 아들 내외가 주는 자금으로 생활비를 쓴다.

금융기관은 자녀 2명에 대해서 학자금이 나와 자녀들 모두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학자금이 나와도 서울 거주 경비가 만만치 않아 시골의 땅을 팔아 홍천에 마련했던 1200평을 당시 6천만 원(지금은 6억 상당)에 팔아 서울 영등포 흑석동에 대지 33평에 건평 30평의 단독주택을 샀다. 여기에서 세 자녀가 대학을 졸업했다. 물론 지금의 석암사 뒤편의 땅 천여 평도 천만 원(현재 1억 정도)에 팔아 자식들에게 투자한 셈이다.

흑석동 집은 재개발이 돼 아파트 신축 후 팔아서 아들내외에게 자연스럽게 상속이 돼 지금은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구입해 살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집은 두 딸의 몫으로 주기로 확정했다. 단 여건이 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떤 형태든 그대로 보존해 두고 그 값어치만큼의 현금을 두 딸에게 주면 어떨까 하는 마음도 있다. 어쨌든 이 집은 아내가 있을 때 이미 약속을 했고 필자가 그 약속을 꼭 지킬 것을 역시 아이들에게도 말했다. 다만 내가 생존 시까지다.

이렇게 많지도 않은 재산에 대한 내 자신의 심정을 밝히니 개운하기도 하다. 필자의 지인들은 상당수가 이미 증여했거나 상속 계획을 대부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을 다 팔아서 아이들 뒷바라지 하고 2014년 2월 지병으로 아내가 세상을 떴다. 만 69세로 아홉수를 못 넘겼다. 하긴 처형이 33세에 아들만 3명을 두고 작고했고 작은처남 또한 39세 큰처남 49세 장모 53세 장인 62세에 비하면 최장수 한 셈이다. 처가가 모두 단명이다. 마지막 처제가 대구에 사는데 올해 70세다. 원체 건강관리를 잘하고 생활의식도 강해 오래오래 무병장수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는 중학교 2학년 때 표어 짓기에 관심을 가진 후 지금도 널리 쓰이는 불조심 표어로 국민표어가 된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불도 다시보자’를 지어 교내에서 당선됐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해서 전국으로 퍼졌는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다만 유추컨대 이 표어를 사방 거리에 부치고 홍보하니까 다른 곳에서도 모방 표절로 그냥 사용한 것 같다. 1992년 농협 근무 시 환경보호 표어로 ‘오염은 한순간 정화는 한평생’을 지어 금상을 받았다. 이밖에도 10여 편의 표어가 전국 단위 공모에 당선된 바 있다.

문학 활동은 이미 수차례에 거쳐 본 난을 통해 언급한바 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문예부에 가입했고 고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문예부를 현재 중견소설가로 한국예술인 종신회원인 전상국 작가와 같이 운영했다. 고교 3학년 때와 졸업 직후인 1960년대 홍천 최초 동인지 ‘20대’를 창간했고 이어 ‘고향’과 ‘층계’을 연이어 발간했다. 이때 같은 동인으로 이은무 시인(춘천 거주, 시집 15권 냄)이 유일한 현존 동인이다.

2009년 국가기록원심사위원에 위촉돼 우수한 활동으로 강원도는 대통령상을 받았고 군정은 총리상 필자는 행정안전부장관상을 수상했다. 2016년 강원문학상 2021년 펜문학상 도지사 문학공로상에 이어 2022년 4월에는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홍천문학상 농민문학상 초허 김동명 문학상 등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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