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147]

어여쁜 여인에게 부득이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노힐부득은 행여나 정신이 흐트러질까 염불을 외는데 열중했다. 한참 후 낭자는 산통(産痛)을 호소해 노힐부득은 물을 따뜻하게 끓여 출산을 도왔다. 남자가 여인의 출산을 돕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 낭자가 잠자리를 청하면서 읊었던 일연선사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娘子之詞(낭자지사) / 삼국유사 일연
걸음 늦고 해가 지니 온 산이 저물어
길은 멀고 마을 멀어 사방도 끊어지고
오늘밤 화상께서는 화를 내지 마시오.
行遲日落千山暮    路隔城遙絶四隣
행지일락천산모    로격성요절사린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嚍
금일욕투암하숙    자비화상막생진

오늘밤은 암자 아래에서 하룻저녁 자고자 하니(娘子之詞)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삼국유사를 남긴 일연(一然:1206~1289)이며 선사다. 원문을 의역하면 [걸음이 늦고 해가 지니 온 산이 또 저물고 / 길은 멀고 마을도 멀어서 사방도 다 끊어졌소 // 오늘밤은 암자 아래에서 하룻저녁 자고자 하니 / 자비로운 화상께서는 성내지 마십시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낭자가 묵기를 청하는 노래]로 번역된다. 전 낭자가 오언율시 낭자지게娘子之偈에서 노힐부득에게 밝혔던 대로 자기 의지를 종합하는 노래였음을 시인이 재연再演해 보이는 시상으로 보인다. 곧 시인이 의도하는 방향은 심오한 불도의 세계를 몸으로 체험하다 보면 부처의 뜻이 스스로 와 닿을 것이란 오묘한 진리를 부여안고 있다 하겠다.

시인은 여인의 몸으로는 더는 발길을 옮기기가 어렵고 마을도 멀다는 자기 소신을 재차 밝히고 있다. 걸음이 늦고 해가 졌으니 온 산이 저물어 길은 멀고 마을도 멀어 사방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는 상황적인 선경을 보일 듯 말 듯 그려 넣고 있다. 이제는 이곳 말고는 특별한 대책이 없으니 허락해 달라는 소신을 밝힌다.

화자는 더욱 강경한 대상에 상대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못하는 시상 앞에 멍하니 시상을 정리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오늘밤은 암자 아래에서 이렇게 자고자 하오니 부디 자비로운 화상인 노힐부득께서는 성내지 마시고 잠자리를 허락해 달라는 소청을 한다. 자비와 불심에 바탕을 둔 시문이라 문학성은 다소 떨어지기도 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해가 져 온 산 저물고 사방도 다 끊어졌소, 오늘밤 자고자 하니 성을 내지 마옵소서’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3권 4부 外 참조] 일연(一然:1206∼1289)으로 고려 중기의 승려·학자이다. 1261년 강화도의 선월사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의 법을 계승하였다. 1277년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에서 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와 어구】
行遲: 걸음이 늦다. 日落: 해가 떨어지다. 해가 늦다. 千山暮: 온 산이 저물다. 路隔: 길이 막히다. 城遙: 성이 멀다. 絶四隣: 사방이 다 끊어지다. // 今日: 오늘. 欲投: 투숙하고자 하다. 庵下宿: 암자아래에서 잠자다. 慈悲: 자비롭다. 和尙: 화상. 상대방을 뜻함. 莫生嚍: 성내지 말라.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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