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536]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강정식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 심사위원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을 맞은 지 5년 만이다. 당시 필자는 홍천군 영귀미면과 횡성군 공근면 접경지에서 살았다. 초등학교(현 초등학교) 3년생 10살이었다. 그 시절에는 모내기 농사가 지금보다 한 달 정도 늦었다. 6월 20일경 학교를 일찍 끝낸 후 모내기 돕기(모종 나르기)를 했다. 어른들 10여 명이 나란히 서서 손으로 모를 심을 때 묘판에서 뽑은 묘 묶음을 날라다 모 심는 일꾼들 뒤에 놓아주는 일종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리고 점심은 근사하게 들밥을 먹었다.

그날도 논에다 모를 심고 아이들이 모종을 하는데 신작로로 모자에 갈잎과 풀을 꽂고 총은 거꾸로 메고 맨 앞에는 깃발을 든 인민군들이 남쪽으로 지나갔다.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모종 심부름을 잠시 멈추고 그들을 봤다. 6.25 전쟁이 난지 일주일정도 지나 인민군들이 내려온 것이다. 우리지역에서의 전쟁은 없었고 인민군들은 원주를 향해서 꾸역꾸역 내려왔다.

6.25가 난 직후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이 “난리가 났으니 너희들은 별도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 우리들은 난리고 뭐고 아랑곳없이 물고기를 잡고 신나게 놀았다. 7월 초순이 되자 학교에 등교하라고 해서 친구들과 같이 책보를 들고 갔더니 선생님이 수업은 하지 않고 이상한 노래만 가르쳐서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 정권이 남한에 들어서면서 바로 학교교육으로 북한에 관한 노래부터 가르쳤다.

그 후 며칠 있다가 여름방학을 했고 3개월쯤 지나 가을에 9.28 서울수복이 되자 우리지역도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를 하고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는데 담임선생님은 역시 6.25 이전의 그 선생님이었다. 대구 근처까지 밀렸던 국군이 유엔군과 같이 북진을 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끊긴 북한군은 후퇴를 거듭해 그해 초겨울에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북진을 했었다.

그러자 중공군이 개입해 전쟁은 새로운 국제전으로 들어갔다. 통일을 눈앞에 뒀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 앞에서 후퇴를 거듭해 1951년 초에는 서울을 다시 적진에게 빼앗기고 경기도 이남까지 후퇴를 했다. 전쟁의 와중에도 필자는 초등학교를 그대로 다닐 수 있었다. 1950년도에 3학년이고 1951년에는 4학년으로 올라가고 1953년 휴전 당시에는 6학년이었다.

홍천에 작은집이 갈마곡리에 있어 중학교를 홍천으로 왔다. 동창생들 대부분은 횡성중학교에 입학했다. 필자는 홍천에 연고가 있어 그해 늦가을 추수를 끝내고 홍천으로 이주를 했다. 당시 전쟁 중이던 3년 동안은 어느 곳이나 같았지만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도 녹록치 않았다. 전시 중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학교는 불에 타고 교실엔 의자나 책상이 없어 가마니 포대를 깔고 공부했다. 종이가 귀해서 비료포대를 대용으로 썼다.

중학교 입학원서는 필자보다 3살 위인 둘째 누나가 망막골 고개를 넘어 원서를 가져와 써서 내줬다. 비록 지금은 먼 곳으로 갔지만 그 누나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부모님이야 외아들인 필자를 끔찍이 여겼지만 누나의 그 공은 잊지 못한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 책을 소리 높여 잘 읽었다고 한다. 온 동네가 들을 수 있도록 책을 읽었다.

당시 마을에는 한문서당이 있었는데 서당 아이들이 소리 내서 천자문이나 명심보감 등을 읽었는데 필자는 그 대신 국어책이나 교과서 등의 책을 큰 소리로 읽었다. 생각해보면 유년시절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일 게다. 전쟁 통에도 큰 탈 없이 잘 커서(교통사고는 있었지만) 지금의 내가 됐으니 되돌아보면 내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해마다 유월이 되면 다시 생각하게 되는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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