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49]

시인은 부지런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공정한 정치를 했고 박학다식했다. 한편으로 아첨하며 자기 공을 자랑한다는 비방도 들었으니 양면성을 갖추었기도 했다.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민요와 설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진다. 병들어 있으면서 못다 끝낸 시 한 수쯤은 선뜻 완성했으리. 가는 풀 그윽한 향기 찾기 어려운 곳에는, 엷은 연기와 지는 햇살에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病餘吟成(병여음성) / 사숙재 강희맹
남창에 종일토록 세상 생각 잊으니
정원에 사람 없고 새만 날기 배우는데
가는 풀 내리는 비는 보슬보슬 내린다
南窓終日坐忘機    庭院無人鳥學飛
남창종일좌망기    정원무인조학비
細草暗香難覓處    淡煙殘照雨霏霏
세초암향난멱처    담연잔조우비비

정원에 사람은 없고 새만 날기를 배우네(病餘吟成)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남창에 종일토록 앉아 세상 생각을 잊으니 / 정원에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새만 날기를 배운다 // 가는 풀 그윽한 향기 찾기 어려운 곳에는 / 엷은 연기와 지는 햇살에 비가 보슬보슬 내리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병중에도 시를 지어 나머지를 완성하다]로 번역된다. ‘형님! 지난번 형님께서 “채자휴에게 산수화 한 폭을 그리다”는 시제의 절구 한 편은 그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림도 좋았지만 화제畵題는 일품이었지요. 오늘 저는 지난번에 쓰다만 시를 몸은 아프지만 완성하렵니다. 완성되면 퇴고삼아 한번 봐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형 강희안에게 부탁했던 ‘선문답先問答’ 한 편을 제시한다.

시인은 남창에 기대어 보니 새가 날기를 배운다는 선경의 시주머니에서 시 한 수를 털어냈다. 남창에 종일토록 앉아 세상 생각을 잊으니, 정원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새만 날기를 배운다고 하는 시상이다. 세상 생각을 잊는다거나 새가 날기를 배운다는 대칭적인 관계가 조화로워 시격을 높여준다.

화자는 가는 풀의 향기를 찾지 못함과 엷은 연기 지는 햇살을 넉넉한 자리에 둔 시상을 만난다. 가는 풀은 그윽한 향기 찾기 어려운 곳에는, 엷은 연기와 지는 햇살에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는 시상을 만지작거렸다. 가는 풀의 향기와 엷은 연기의 대구적인 상관관계도 그냥 스칠 수 없는 상보적인 관계의 시상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남창 종일 세상 잊고 새만 날기 배운다네, 향기 찾기 어려운 곳 햇살비만 보슬보슬’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등극하는 때를 같이하여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직집현전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병조정랑으로 옮겼다. 1456년(세조 2) 다시 직집현전을 역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한자와 어구】
南窓: 남창. 終日: 하루 종일. 坐忘機: 앉아서 생각하다. 기회를 엿보다. 庭院: 정원. 無人: 사람이 없다. 鳥學飛: 새가 날기를 배우다. // 細草: 가느다란 풀. 暗香: 그윽한 향기. 암향. 難覓處: 찾기가 어렵다. 淡煙: 엷은 연기. 殘照: 지는 햇살. 雨霏霏: 비가 보슬보슬 내리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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