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125】

한 폭의 산수화를 보고 있노라면 한가함이 묻어나지만 한국인의 특성 자체는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지 않나 싶다. 무엇이나 급하고 빠르다. 서둘러서 처리하려는 가속적인 습성 속에 때로는 부실하게, 때로는 실수로 다가서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텍스트로 삼는 위 작품을 읽으면 한국 사람의 생활습성과는 상당한 대조를 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한가한 자연의 풍경 속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을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秋日(추일) / 신부용당
연이은 푸른 하늘 흰 구름 일어나고
먼들에는 행인들 집을 향해 돌아오네
뱃전 노 비스듬히 잠자고 해오리기 날고 있네.
連天白雲多 遠野行人歸
연천백운다 원야행인귀
蒼江舟楫斜 風吹白鷺飛
창강주즙사 풍취백로비

바람이 일자 해오라기 날아 오른다[秋日]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절구다. 작자는 신부용당(申芙蓉堂:1732∼1791)으로 여류시인이다. 부용당은 호이고 별호는 ‘산효각’이라 했다. ‘도패강’을 쓴 신광수(申光洙)의 누이동생으로 저서로는 [부용시선(芙蓉詩選)]이 전한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이어진 하늘에 흰 구름은 많고 / 먼 들엔 행인이 돌아오는구나 / 푸른 강엔 배를 젖는 노가 비스듬한데 / 바람 일자 해오라기 날아 오른다]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어느 가을날에]로 번역된다. 다음 구절을 인용해 본다. [산마을 앞에는 들이 펼쳐서 있고, 그 들 저쪽에는 푸른 강이 흐른다. 마을 앞 들길로 사람들이 돌아온다. 아침에 나갔던 사람들이다. 푸른 강에는 조각배가 한가롭다. 돌아올 사람들을 다 실어 나르고 지금은 편히 쉰다. 바람이 인다. 해오라기들이 한가로이 날아 오른다] 한가로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한다.

시인은 인용한 그림 얼개처럼 한가롭기 그지없다. 하늘에 둥둥 떠가는 흰 구름, 먼들에는 돌아오는 사람들의 걷는 발걸음, 저어야 할 노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 배, 가느다란 바람이 일자 서서히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등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없다. 이런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가 아니라도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화자는 빨리 빨리 문화에 젖어있는 조선인을 은근하게 질타하고 있다. ‘왜 그리 바쁘냐?고 하면서… 비유법에 의한 화자의 시적인 상상력보다는 표현의 기법에서 보이는 회화성을 보다 높이 사야할 작품이 아닌지 모르겠다. 때때로 이렇게 한가한 작품도 진한 감동을 준다.

【한자와 어구】
連天: 하늘이 이어지다. 이어진 하늘. 白雲: 흰 구름. 多: 많다. 遠野: 먼 들판. 行人: 행인들. 歸: 돌아가다. // 蒼江: 푸른 강. 舟: 돛단배. 楫斜: 비스듬히 노를 젓다. 風吹: 바람이 불다. 白鷺: 흰 갈매기. 飛: 날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 한국문인협회 회원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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