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의 차이.감정이 일렁이는 것과
감정이 일지 않는 차이쯤은 아닐까?
돌아 가셨다는 부고가 아니고 오늘 화장을 하고
유골만 절에 모셔 놓고 있는데 연락을 해야 될 것 같아 이제 전화를 하는 그이는
어떤 마음일까?
내 죽으면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말고 그대 홀로 나를
치워 주면 좋겠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들이 돌아가신 뒤
빈말이 아닌 유언이었다는 중압감 때문에
홀로 빈소를 지키고 홀로 화장장에서 떠나 보내는 그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남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리움이 되고 회한이 될텐데
깊은 산에서 홀로 고인을 지켜야 하는 외로움은 어떻게 달래질까?
죽는다는 것이 이리 쉬운일이고 산다는 것이 오히려 힘들 줄
이제는 알 것만 같은 이 세월 앞에서 산다는 것의 구차한 변명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절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죽고 난 뒤에 잘한다고 호들갑 떠는 모습이 
차라리 장난 같은 우리 삶이기에 그대나 나나 한번쯤은 자신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래서 미워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사람 도리 하고 사는 것이 무언지 아직 모르겠지만
만사 제쳐 두고 가야지요.영혼에게라도 하직 인사를 드려야지요.
우리 살아 있을때 잘 지냈나요?
많이 위로 받고 많이 의지하면서 지냈나요.
따뜻한 말한마디에 그 많았던 외로움 견딜 수 있었나요?
어머니 돌아 가셨을때 먼길을 달려와 위로 해주신지가 몇달이나 된다고
이렇게 허망하게 가셨나요?
이제는 쌓이는 그리움 때문에
삶의 즐거움 보다 정리의 질서가 오히려 담담한 숙명의 인정 앞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 둘 사라지고 미워하는 사람은
저렇게 싱싱해 보이는 까닭은 아직도 이 마음이
편견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왜이리 자주 만나는지
오온(五蘊)은 치성하고 구부득고(求不得苦) 까지 이르면 만사가부처님 법문입니다.
그대가 가신 것도
나 자신이 허망한 것도
삶은 수채화 같습니다.
가까우면 보이지 않던 그 많은 것들이
이렇게 멀어 지니 선명한 사실들로 또렷한 그림!
오늘 저는 자신을 그립니다.
무엇이 소중한가?
무엇이 우선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리고 그대의 이름을 부를건가?
<성민스님·백락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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