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정식 시인, 전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민간기록원

길어지는 봄볕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 대문 옆 우편함에 소포(책)가 끼여 있었다. 녹색봉투에 두 권의 책이다. 먼저 수취인을 살펴보고 발신인을 보았다. 서울시 서초구 거주 이옥자 수필가로부터 보내온 저서명 “하얀 집 그 여자” 에세이였다. 

반가웠다. 우선 봉투를 뜯고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역시 녹색 속표지에 붓으로 “강정식 선생님께 이옥자 올림”이라고 쓰여있었다. 내가 과연 선생님자격이 있고 그럴만한 사람인가?

60년도 초 세상이 어지러울 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읍내에서 과외공부 선생을 5년여 동안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요즈음처럼 학원이 없고 가정교사(한 가정에서 그 집 아이들의 학습을 돕는 일)와 과외공부(그룹으로 시간대별로 수십명을 가르치는 일로 요즘의 학원의 전신)가 유일한 방과 후 학습이었다.

그 때 이옥자 수필가가 초등학교 때 2~3년 배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이 수필가 외에도 그의 사촌형제들 두서너 명도 같이 가르친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이란 과분한 호칭을 받았는가보다. 허긴 선생님이란 말은 존경한다는 뜻에서 두루 쓰이는 높임말이고 흔한 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왜 선생님이란 말이 신선하고 감개가 무량할까.

다시 50여 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그 당시 이수필가는 얼굴이 갸름하고 예뻤다(지금도 그렇지만). 밝고 맑고 고운 목소리에 영리한 어린이였다. 집안이 부유한(홍천에서는 상류집안) 편으로 옷도 예쁜 옷(주로 빨간 옷으로 생각됨)을 입고 또래들에 비해 수줍음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수필가가 중·고교에 갔을 때 필자는 농협은행(당시는 농업협동조합중앙회)에 취직돼 병아리 행원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였다. 가끔 등하굣길에 만난 듯도 하지만 지금에 와선 기억이 전혀 없다.

31년 근무 후 직장을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문학수업과 등단을 할 때(등단은 90년도) 이 수필가가 서울에서 수필가로서 명성을 날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웠다. 1990년도 중반에 필자가 홍천문인협회 회장직을 할 때 홍천문학지에 이 수필가의 옥고를 받아 게재하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받고 있다.

문학을 하는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필자의 경우 한 달에 보통 열권쯤의 책을 받아본다. 대여섯 권은 고정 문예월간지이고 나머지는 신간을 내는 작가들로부터 증정되는 책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전부 읽어보지는 못한다. 월간지는 그렇다 치고 단행본들을 전부 읽어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보내주신 작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을 잘 알지만 다 못 읽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 서정 중견시인으로 10여 년 전에 작고한 박재삼 시인은 생전에 이런 글을 썼다. “몸은 자꾸 여위어 가는데 머리맡에는 읽지 않은 책만 쌓여간다”고 말이다. 책에는 양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책들이 있다. 문학서적은 대개가 양서에 속한다. 이런 문학서적들을 다 읽지 못한다는 것은 양심고백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문학에는 여러 장르가 있다. 시와 소설, 아동문학과 희곡, 번역수필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수필은 문학의 원조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동양고전의 한문학은 뜻글자로 장르가 분류되기 전 시와 이야기와 희곡 등등이 수필 속에 포함됐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 신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시, 소설, 수필 등등 장르가 확연히 구분됐다고 하나 따지고 보면 모두가 수필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는가 싶다.

정작 이 수필가의 저서 “하얀집 그 여자”에 대해선 아직 목차 자체도 자세히 못 본 상태에서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참 좋은 내용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우선 책표지부터 근사하다. 삽화로 꽃사진도 있고 흑백사진도 있고 풍경화와 정물화도 있다. 이 책만은 한 쪽도 빼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하겠다. 좋은 구절은 되새겨 읽고 독후감도 이 작가에게 꼭 전해야 하겠다. 그리고 좋은 책 보내줘 잘 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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