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가 잣을 깐 잣송이를 주웠다.
  ‘작은도심이’로 올라가는 잣나무 숲이었다. 어느 예술가가 이렇게 깔 수는 없으리라.
  잣알을 빼먹은 잣송이도 드문드문 눈에 띤다. 잣송이에는 더러 빼먹지 않은 잣알이 박혀있는데 알을 빼 깨물어보면 빈텅이다.
  청설모는 잣알이 속이 찼는지 비었는지 어떻게 알까? 동물의 생존능력은 놀랍기만 하다.
  잣 도둑 청설모는 다람쥐과의 동물로 원래 이름은 청서(靑鼠)다.
  청서가 청설모가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붓을 만드는 원료로 이 청설모의 꼬리털을 많이 이용한데서 비롯되었다.
  워낙 이 털이 유행이다 보니 청서라는 이름보다 청설모가 아예 동물 이름이 되어 버렸다.
  꼬리에 털이 많고 길며, 귀에도 긴 털이 나 있다. 긴 꼬리의 털 덕에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으며 헬리콥터의 꼬리날개처럼 방향을 마음대로 바꾸기도 한다.
  등은 붉은빛이 도는 갈색 또는 검은색으로 변이가 있으며 배는 흰색이다.
  청서는 나무를 잘 타고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한다.   
  몸 구조도 나무 위에서 살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발톱이 날카로워 미끄러운 줄기도 잘 기어오를 수 있으며, 가느다란 가지 위에서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다.
  먹이는 나무 열매·곤충·새순·새알 등이며, 나무 위에 집을 짓고 4-10월에 한배에 3-6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청설모가 사는 곳엔 다람쥐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와전된 이야기다.
  동물들의 영역다툼은 있지만 청설모와 다람쥐는 잘 지낸다. 물론 싸우면 청설모가 이긴다.
  ‘풍천리’에서 생산되는 잣 가운데 청설모가 먹어치우는 잣 때문에 농가에 큰 피해가 되고 있다.
  청설모 1마리가 하루 평균 1.7송이(100g)의 잣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따라서 청설모 한마리가 한해 먹어치우는 잣의 양을 대략 20Kg정도라고 할 때 잘 가꾼 잣 농사라 하더라도 남아나지 않아 피해가 크다. 
  그래서 산림피해와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해쳐 환경부에서는 2000년부터 유해조수로 지정했다. 가을이 시작되기 전부터 잣나무 숲에서는 잣 도둑 청설모에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청설모를 찾으며 걷는 동안 산등성이를 넘고 ‘작은도심이’ 어귀까지 올라왔다.
  ‘도심이’는 ‘도십리(道十里)’에서 생긴 말이다. 골짜기가 십리나 된다하여 붙여졌다고도 하고 십리 길을 걸어 나와야 대처 마을이 나온다하여 붙여졌다 한다. 그만큼 산골이다.
  ‘작은도심이’로 가는 길을 이정표를 보고 찾아들었다가는 낭패다. 예전에는 길이 그렇게 나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어지는 길이 없다.
  ‘작은도심이’로 가는 길은 ‘알로하펜션’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산비탈로 들어서야 한다.
  길은 포장되어있고 또 공사 중이다.
  사람이 살까? 혹시 임도는 아닐까? 일단 가파른 포장길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십리는 가야하리라.
  신발 끈을 동여매고 숲의 길로 들어섰다.

 

 

푸른 나무들의 그늘,
그 속을 지나온 물소리가 그늘에 젖는다.
매미도 한 울음 한다.
구절초 빛을 터뜨리고
물봉선화 붉은 빛을 풀어낸다.
돌배가 그 소리에 떨어진다
청서가 까던 잣을 놓친다.
아무도 말릴 수 없겠다.
그 그늘의 중심은 알 바 아니다.
그늘을 뚫고 솔아드는 물소리를 들으며.
도심이를 오르는 十리길, 
걸음마다 물과 빛이 섞인다.
바위너설 위에 앉은 돌단풍이
물끄러미 직하의 길을 가는 물에게 묻는다.
뭔 소리를 들을래
떨어지는 물줄기가 수비처럼 가슴을 친다
하늘이 퍼렇게 이마에 걸린다.
                               
                                                 -도십리 가는 길-

  물을 보면 길을 안다고 했던가.
‘작은도심이’ 길은 푸른 그늘 속을 지나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 올라가는 길이다.
  물소리가 멀어지고 다랑구지 논이 눈앞에 다가온다. 그 뒤쪽으로 뽕나무에 가려진 낮은 지붕이 보인다.
  ‘작은도심이’의 마지막집이다. 입구에는 차량통행을 막는 안내판에 논두렁이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통행을 금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두렁을 돌아 올라가니 까만 염소가 놀란 듯 산으로 내 뛴다. 오리가 목청을 높인다. 닭도 거든다. 오히려 개가 조용하다. 사람에 대한 경계의 눈을 떼지 못한다.
  꽥꽥 짖어 대는 오리 소리에 아주머니가 나온다. 길 따라 올라왔다하니 ‘도심이 안막’이란다.
  골짜기에 대하여 여쭙자 ‘여보 여보’ 소리쳐 부른다. 여물을 썰던 사내가 내려온다.
  이곳에서 사는 재미가 좋겠다고 하니 구절초처럼 웃으며, ‘누에’를 친다고 한다.
  오랜 기억의 이름이다. 한때 농촌의 부업으로 권장하고 뽕나무 심기를 장려했던 주인공이 아니던가? 누에가 보고 싶다고 하니 잠실로 가잔다.
  잠실로 걸어가며 누에에 대하여 떠올린다.
  알에서 깨어 개미누에가 나오면 뽕잎을 송송 잘게 썰어 뽕을 주었다. 뽕을 먹는 게 아니라 즙을 먹는다는 걸 알았다.
  잠실 문을 여니 잠박에 알에서 깬지 일주일쯤 지났다는데 1cm 좀 더 되는 누에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있다.
  고치를 지으려면 보름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고치를 뜨거운 물에 삶았다가 실오리를 당겨 실을 뽑았다. 실은 질겼고 잘 끊어지지 않는데 워낙 가늘어서 네다섯 가락의 실을 합해 물레에 감았다. 그 실로 옷감을 짜면 비단이다.
  실을 뽑고 나면 ‘번데기’는 간장에 조려서 먹었다. 인스턴트 조미료에 길들여진 간사한 혓바닥이 오랜 맛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지금은 누에고치를 수매하는 곳이 별로 없다. 그러나 누에를 치던 시절, 지역마다 누에고치 수매가가 달라 값을 잘 쳐주는 곳이면 먼 길도 마다 않고 걷고 걸었다.
  지금은 누에고치를 얻으려고 누에를 치지 않는다.
  대신 누에를 이용한 건강식품을 만드느라고 누에를 친다.
  누에가 넉 잠을 자고 고치를 지을 때가 되면 누에가루를 할 것인가 동충하초를 기를 것인가 선택해야한다. 딱 부러지게 결정을 못하면 누에가루도 동충하초도 못한다고 한다.
  이곳 ‘일신농장’에서는 동충하초와 누에가루를 생산한다. 뽕잎가루와 뽕잎차도 함께 한다.
  ‘동충하초’는 ‘하초동충’이라고도 하며 겨울에는 ‘벌레’이던 것이 여름에는 ‘버섯’으로 변한다는 뜻에서 ‘동충하초(冬蟲夏草)’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충하초과의 균류들은 종마다 기생하는 숙주가 다양하다. 사마귀, 메뚜기, 누에, 잠자리, 나비, 딱정벌레, 벌 등 다양한 숙주생물에 기생하여 버섯으로 자란다. 
  ‘동충하초’는 약효가 매우 뛰어나지만 특이한 생활사 때문에 과거에는 구하기 어려운 약재였으나 최근에는 재배기술이 발달해 많은 농가에서 재배를 하고 있다.
  ‘작은도심이’의 일신농장(누에전문농장 정화영)에서는 누에를 이용한 동충하초를 재배하고 있다.  Cordyceps속 균을 직접 살아있는 누에에 투입하는 방법으로 동충하초를 기른다. 
  누에는 똥부터 병들어 죽은 누에까지 모두 약재다.
  누에똥은 잠분(蠶糞),잠사(蠶砂)라 하여 풍과 당뇨에 효과 있고, 말린 잠분을 베갯속으로 사용하면 불면증이나 두통에 좋다고 한다. 잠박에 깔았던 종이도 약으로 쓰였으며, 병 걸려죽은 누에도 약으로 쓰였다.
  누에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가치를 지닌 생명이었다.
  누에를 치기위해서는 뽕을 따야 하는데,  소설의 소재로 뽕이 등장한다.
  농장 앞 밭두렁과 공터에는 오디용 뽕나무와 약재용 뽕나무, 누에먹이로 심은 뽕나무들로 가득하다.
  최근에는 뽕나무의 약효와 효능이 알려지면서 오디, 뽕잎, 뽕나무껍질, 뿌리 등 전체가 약재로 이용되고 있으며, 뽕나무에서 자라는 상황버섯이나 뽕나무버섯 등도 향과 약재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뽕나무는 화력이 좋아 임금의 밥을 짓는데 쓰였고 또 탕약을 달이는데 최고의 재목으로 꼽혔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뽕은 나도향의 뽕과 이 소설을 각색한 이두용 감독의 뽕 시리즈가 있다. ‘나도향<羅稻香 -1902년 3월 30일 ~ 1926년 8월 26일. 일제 강점기의 한국 소설가이다. 본명은 경손이며 필명은 빈이다.>’은 ‘안협집’과 ‘김삼보’, ‘삼돌’을 통해서 ‘성’과 ‘물질’에 탐욕하는 인간상을 보여주었고, 그들은 질책하기 보다는 사건 후에도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을 진행함으로써 이러한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25살에 요절한 나도향이 바라본 당시의 시대상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1986년 잠업경영인이 된 ‘정화영(일신농장 대표- 누에전문 농장)’씨는 이곳 토박이다. 누에 예찬가이다.  
  ‘누에’는 ‘상잠(桑蠶)’·‘잠아(蠶兒)’라 했던 누에나방의 애벌레다. 오래 전부터 길러 왔기 때문에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묘’ 또는 ‘개미누에’, 검은 털을 벗지 못한 새끼를 ‘의자’, 세 번째 잠자는 누에는 ‘삼유(三幼)’, 27일 된 것을 ‘잠노(蠶老)’, 늙은 것을 ‘홍잠(紅蠶)’, 번데기를 ‘용(踊)’, 성체를 ‘아(蛾)’, 고치를 ‘견(繭),’ 똥을 ‘잠사(蠶砂)’라 하였다. 개미누에는 뽕잎을 먹으면서 성장하며, 4령 잠을 자고 5령이 되면 급속하게 자라서 8 cm 정도가 된다.
  5령 말기가 되면 뽕 먹는 것을 멈추고 고치를 짓기 시작하는데 약 60시간에 걸쳐 2.5 g 정도의 고치를 만든다.
  실(비단실)은 1개의 고치에서 1,200∼1,500 m가 나온다. 고치를 지은 후 약 70시간이 지나면 고치 속에서 번데기가 되며, 그 후 12∼16일이 되면 나방이 된다.
  이 나방은 고치의 한쪽 끝을 뚫고 나오며, 암나방은 약 500∼600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
  양잠을 하는 사람들은 누에를 식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인병과 성기능개선에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면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동의보감’에는 ‘누에숫나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미를 하지 않은 ‘누에숫나방’의 한약재명은 ‘원잠아(原潛蛾)’ 또는 ‘웅잠아(雄潛蛾)’다. ‘성질이 따듯하고 독이 약간 있으며 양사(陽事)를 강하게 하고 누정(漏精)과 요혈을 그치게 하고 수장(水臟)을 보하며 정기(精氣)를 더 해주며 음도를 강하게 하여 교접을 해도 피로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번데기’는 비만을 억제하는 성분이 들어 있으며 ‘누에고치’ 또한 비단 뿐만 아니라 식용과 미용으로써 실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 한다. 그러나 ‘누에’를 기르려면 농약은 물론 비료 주는 일까지 조심스러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다 누에를 치기위한 기본적인 작업이다. 
  다랑구지 논이나 곡식을 심은 밭의 두렁은 뽕나무가 차지한다.
  ‘오디<문무실>’와 뽕잎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오디
용 뽕나무와 뽕만을 위한 나무가 개발되기도 했다. 
  집 주위의 빈터에는 뽕나무를 심고 자연체험학습장도 계획하고 있다는 정화영씨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김(잡초, 풀)이 무성한데도 마음은 여유롭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몸이 힘들고 또 게을리 하면 몸이 무겁다. 이만큼까지가 자연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균형이 아니냐며 반문한다.
아무튼 누에나 뽕나무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신의 선물이다. 따라서 누에치기나 뽕나무라는 말에는 원시적이면서도 순수함이 느껴진다.
  지금 이곳에서 만난 누에와 뽕나무는 오염되지 않은 산촌의 맑고 깨끗한 낭만적인 맛이 담겨있다. 
  ‘작은도심이’ 안막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정화영씨가 사는 골짜기는 ‘토막터골’이고 농사를 짓기 위해 길을 닦은 골짜기는 ‘갈밭골’이다. 이 길은 ‘큰도심이’ ‘병막골’로 이어진다.
  다시 길을 내려온다. ‘와가촌’이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재집말’, ‘기와집말’이라고 부른다. ‘와가촌’은 한 구비를 더 돌아야 한다. 길 따라 이어지는 풍천천 구비 건너편에는 펜션이 들어서있다.
  56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작은 ‘도심이길’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 길로 들어서면 ‘덕망골’로 오르는 길과 ‘망재’, ‘탑골’오르는 길이 나온다. 
  ‘망재’에는 세가구가 산다. 농사도 짓지만 주로 산에서 산다고 한다. 나물도 뜯고, 약초도 캐고, 버섯도 따고, 집 주위에는 토종벌통이 여기저기 다문다문 놓여있다.
  ‘망재’ 앞 개울은 ‘용소구미’다. ‘망재’에 사는 아저씨가 앞장을 섰다. 나무숲에 가려진 ‘용소구미’는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철문을 열고 봇도랑을 따라 걸어가니 그늘 막을 친 바위 아래로 흐르는 푸른 물빛이 햇살에 반짝인다. 물은 깊지 않았고  물속 바위틈에 몸을 숨긴 꺽지가 동태를 살핀다.
  ‘용소구미’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굴과 굴을 빠져나와 승천했다는 구유같은 바위가 있다. ‘용소구미’에서 나와 국도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왼쪽으로 ‘뒷골’ 어귀가 나온다.
  골 어귀에 기와집이 있었다. 조선 숙종 때 성균관진사 김윤(金潤)이 이곳에 터를잡고 지은 기와집이다. 이곳에서 6대를 살았다.
  그의 후손 김의장이 어모대장군 겸 대제학을 지냈다고 하며 당시 이곳에 이 기와집만 있었다 하여 와가촌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그 후의 소식은 알 수 없고 기와집은 흔적조차 없다. 다만 지금도 밭을 갈다보면 기와조각이 나온다고 한다.
‘기와집말길’로 들어서서 다리를 건너 골막까지 가려는데 개들이 몹시 짖어댄다. 그 소리에 점심을 드시던 어르신이 나오신다.
  물씬 풍기는 열무김치냄새. 고추장에 열무김치를 넣고 한 그릇 썩썩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 안막의 봉우리는 ‘감투봉’이다. ‘감투봉’ 아래로 외따로이 선 봉우리는 ‘돈도라지봉’이다. 봉을 감싸고 밭이 이어지고 ‘감투봉’으로 계곡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 올랐다가 누에를 만나게 된 기억은 오래 남을 듯싶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향수랄까?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삶의 성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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