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리’를 가로지르는 56번 국도는 ‘잼버리 도로’다. 봄, 여름,가을, 겨울 계절에 관계없이 주변경관이 아름다운 길이다.
  국도이면서 산간 오지로 남아있던 이 구간이 1991년 ‘고성군 토성면 신평벌’에서 ‘제17회 세계잼버리 대회’가 열리면서 확포장 되었다.
  강원 영서 내륙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열악한 강원개발의 시발점이 된다.
  ‘가락재터널’에서 잼버리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보이 스카우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단복을 입고 각종 학교행사에서 봉사 활동하거나 특히 여름 방학이 되면 야영을 떠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잼버리(Jamboree)’는 북미 인디언의 ‘즐거운 놀이’, ‘유쾌한 잔치’라는 뜻을 지닌 ‘시바아리(SHIVAREE)’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스카우트’는  1907년 영국의 ‘R.S.베이든 포엘’이 창설하였다.
  그는 기병대 장교로 보어전쟁에 참여한 경험을 통하여 규율 있는 사회와 진정한 애국자를 육성하는 데는 소년시절의 훈련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퇴역 후 새로운 소년단 결성에 착수했다.
  1906년 20명의 소년을 모아 실험적으로 훈련을 실시한 후 이듬해에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소년들에게 매력과 위엄을 주기 위하여 군대에서의 척후활동을 도입하였으며, 책임감·모험심·연대의식을 기르고 사회의 척후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에서 보이스카우트 (Boy Scouts) 라 명명했다.
  1920년 국제조직인 보이스카우트 국제사무국(현재는 세계사무국)이 창설되면서 제1회 보이스카웃트 대회가 영국 런던의 올림피아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는데 스카우트의 창시자인 베이든 포우엘경이 직접 이 대회에『Jamboree』라는 이름을 붙였다.
  보이스카우트(Boy Scouts)는 청소년에게 건전한 시민정신을 심어주고 다양한 야외생활 기술을 개발함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인 소년 조직이다.
  국가별로 자기 나라의 문화적·역사적 배경과 환경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직되는 청소년 단체이며, 유능하고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는 국가적 운동,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동지애와 형제애로 뭉친 세계적 운동, 인종 ·계급 ·종교에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적 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행해지는 건전한 청소년 육성 사회운동이다.
  대자연 속에서 단체생활(캠핑)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지도력을 배양하며, 스스로 잠재력을 계발하는 인간적인 성장을 지향하며, 훈련과정에서 소년들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진급제도나 기능장제도(특정기능 습득자에게 기능장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2년 10월에 조철호(趙喆鎬)가 구국 청소년 운동을 목적으로 중앙고보와 배재학교 학생 8명으로 창설한 조선소년군과, 비슷한 시기에 정성채(鄭聖采)가 발족한 조선소년척후대를 전신으로 시작되었다. 이 단체들은 1924년에 이상재(李商在)를 초대 총재로 하여 하나로 통합되었다가 1937년 9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으나 1946년 3월 사단법인 대한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하였다.
  1966년 4월 한국보이스카우트로 개칭하였으며, 1952년 8월 제1회 전국잼버리대회를 개최하고 1955년 1월 세계보이스카우트에 가맹하였다.
  1991년 8월에는 131개국 25,000여 명이 참가한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벌’에서 개최하였다.
  보이스카우트 세계사무소는 국제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4년마다 세계잼버리대회, 2년마다 세계회의를 개최한다. 단원은 연령에 따라 초등학교 3∼5년생을 커브(cub) 스카우트, 중학교 3년생까지를 보이 스카우트, 15∼18세를 시니어(senior) 스카우트, 18세 이상을 로버(rover) 스카우트라 하고 1개반 8명을 조직단위로 한다.
  현재 가입 국가는 149개국이고 세계연맹 본부는 제네바에 있다. 
  이 길은 사람과 동물이 쉽게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한적하다보니 다람쥐나 청설모는 물론이고 고라니나 산돼지도 만날 수 있다.
  지난 겨울에는 한 무리의 산돼지들이 개울을 건너는 것을 보기도 했다. 
  큰길에서 ‘덕밭재’로 오른다. ‘덕밭재’ 다리를 건너면 개울과 나무와 잘 어우어진 전원주택이 있다. 태극기가 나부끼는 집이라 눈에 띈다.  한참 걸어 오르는데  버스가 들어온다. 하루에 네 번 들어오는데 ‘덕밭재’를 들렀다가 ‘옻샘계곡’ 어귀에서 돌아 나간다.
  ‘덕밭재’는 잣마을이다.
  온산이 다 잣나무다. 잣나무의 본향을 이루는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잣을  맛볼 수 있다.
  나무를 심는 일은 미래의 주인들을 위해서 심는 작업이다.
  1935년 ‘덕밭재 재상너머골’에 심은 잣나무는 일본인에 의해 심어졌지만 그 열매는 한세대가 지난 지금 우리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한때는 채종림으로 지정되어 산림청에서 관리가 되었지만 ‘태풍 루사’의 피해로 많은 잣나무들이 훼손되어 채종림지정에서 해지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채종하여 길러낸 묘목들이 전국의 산에 심어졌다. 
  ‘대룡산’ 줄기의 능선이 넌출 넌출 이어지다가 ‘덕밭재’를 이루었다. ‘덕밭재’는 ‘상걸리’와 ‘북방 성동’으로 넘나들던 고개였다. 안막에는 ‘터골’과 ‘재상너미골’로 갈라진다. ‘터골로 올라서면서 다시 임도가 이어지고 계곡이 이어진다. ‘터골’은 ‘풍천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골 안막이면서도 춘천동면 ‘상걸리’와 북방면 ‘성동’을 넘나들던 고개가 있는데 산속으로 들어와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개척한 고개라 한다.
  지금은 화전민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잣나무가 자라고 있다.
‘터골’ 어귀의 ‘딸기골’은 산딸기가 많았고 ‘설통골’에는 지금도 많은 벌통이 바위 밑에 터를 잡고 있다.
  ‘거름골’로 들어서서 ‘상걸리’로 가기도 했지만 마을사람들은 ‘뒷방골’, ‘집뒤골’에서 약초와 버섯등 산의 선물을 받아오기도 했다.
  골 안으로 이어지는 잣나무 숲은 이 마을 사람들의 소득원이기도 했다. 가을 한철 하루에도 수십 번 나무에 오르내리고 또 주워 담아야하지만 수입이 짭짤하였다.
  이곳에서 나오는 잣들은 대부분 외지로 나갔지만 최근 홍천군에서 홍천잣을 명품 브랜드화 하기 위하여 시설을 확충한 이후 전량 수매하고 있다. 
  ‘재상너미골’은 ‘덕밭재’ 안막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다.
  ‘터골’과 ‘재상너미골’ 사이의 둔덕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작은 동산 같은 이곳이 ‘덕밭재숲’이다.
  몇 백 년은 됨직한 밤나무가 둥치를 드러내고 있다. 서낭당을 지키던 당목이라 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마을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골짜기를 따라 ‘청풍펜션단지’가 들어서 있다. 임도로 이어지고 길 어귀에 이곳이 잣나무의 본향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다. 채종림 현황판이다.
  임도를 따라가면 ‘약물탕골’에서 ‘도심이’와 ‘북방 성동’으로 이어진다.
  또 ‘재상너미골’과 ‘터골’ 사이에 우뚝 솟은 ‘둥지봉’이 있다.
  ‘덕밭재’에는 분명 고개가 있을 터인데 고개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골에 들어온 사람들은 땅과 산의 덕을 입어 모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재상너미골’ 어귀의 ‘뱀골’과 ‘뒷뜨랭이’가 둔덕을 이루고, 건너편 ‘거시터골’ 어귀는 ‘양지말’이다. ‘삼막골’을 지나 내려오면 ‘큰가래버덩’, ‘작은가래버덩’을 지난다. 들어가는 골짜기는 하나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가래(흙을 파는 농기구의 하나. 삽날을 끼운 넓적한 몸에 긴 자루를 박고 날 양편에 줄을 매어 사용한다. 1사람이 자루를 잡고 2∼4사람이 양쪽에서 줄을 잡아당겨 흙을 떠내는 것으로 삽보다 작업효율이 높다. 가랫날을 끼우는 부분을 가랫바닥, 자루와 몸 부분은 가랫장부, 날 양편에 맨 줄은 가랫줄이라 한다)처럼 골짜기가 나 있다.
  계곡의 물은 맑고 시원하다. 덕밭재어귀의 ‘섬바우골’에는 섬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골어귀의  ‘노랭메기소’는 마을사람들이 밤낚시를 하던 곳이라 한다.
  올해는 정말 메기낚시를 한 번도 못 갔다. 대물의 손맛도 좋지만 어둠과 별과 물소리와 바람소리와 함께 전해지는 손맛 때문에 더운 여름밤에는 더러 다녀오곤 했다.
  다시 국도로 들어섰다.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앉아있다.
  배도 고프고 시장기가 돌았다. 식당이나 가게를 물으니 ‘새터’ 꿩막국수를 추천한다.
  꿩과 메밀의 만남이라. 입에서 군침이 돈다. ‘풍천리 신내’를 지나 내려가야 하니 좀 멀다.
  일단 ‘신내’ ‘영신분교’ 터에 자리 잡은 ‘한영농산 홍천 황잣가공’공장으로 들어갔다.
반백의 사장님은 택배일로 우체국에 가시고 사모님이    ‘무궁화 축제’에 홍보차 진열할 상품을 챙기고 계셨다.
  맛보기 잣을 한 움큼 들고 한알 한알 깨문다. 고소하다.
  ‘구송초등학교 영신분교’는 1953년 설립되었다. 당시 풍천리 이장 ‘김영배’씨와 주민 ‘장신환’씨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두 분의 이름을 따서 ‘영신’이란 학교이름을 붙였다.
  폐교된 후 마을에서 공동관리 하다가 풍천리 잣을 브랜드화 하기 위한 사업으로 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이 신나무가 많았다는 신내다.
신나무는 단풍나무과의 키 작은 나무이다. 잎은 마주나고 타원형이다. 6~7월에 담녹색의 꽃이 피고 가을에 단풍이 들며, 열매는 시과(翅果:프로펠라형)로 9월에 익는다. 줄기는 기구나 지팡이의 재료로 쓰였으며, 잎은 염료로 쓴다.
  ‘신나무’는 우리민족의 의생활에 깊은 연관이 있다. 신나무 잎과 가지를 베어대 철조각과 함께 물에 담그면 검은 물이 나오는데 그 물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해 입었다 한다. 요즘은 잿물에 담갔다가 끓여서 염색하는데 백반 매염을 하면 녹색을 만나고, 목초철매염을 하면 검은 색이 나온다.
  ‘본초강목’에는 신나무버섯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버섯을 먹으면 계속 웃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강가나 야산에서 많이 자라는데 예전에는 이 나무로 새총을 만들기도 하였다.
  ‘신내’ 개울가에 신나무가 많다. 씨앗에 잠자리 날개 같은 깃이 달려있는데 떨어질 때는 프로펠라처럼 돌면서 떨어진다. 단풍이 빨갛게 든다.
  학교앞 골짜기는 ‘안산골’이고 그 아래 ‘무레이골’은 깊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잣나무가 빽빽하다.
  ‘무레이’ 건너편은 ‘품목골’이다.
  ‘품목골’ 건너편 즉, ‘무레이’ 아래는 ‘시누지골’이다. ‘새터’는 ‘시누지골  아래쪽이다. 노마드적 삶을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이다.
  ‘새터’는 꿩막국수로 소문난 곳이다. 이곳에는 ‘새터막국수’와 ‘풍천꿩막국수집’이 있는데 어디를 가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암꿩은 까투리이고 수꿩은 장끼이다. 새끼는 꺼벙이다. ‘장끼전’이란 판소리가 있는 것을 보면 선조들이 무척 좋아했던 새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의 민화 속에도 등장하며 특히 꿩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치선’ 또는 ‘치미선’이라 하였다.
  장끼의 꽁지깃은 장식으로도 쓰였는데 특히 복두(모자)에 꽂아 품위를 더했다. 
  무속인들은 무당의 모자에 꿩 깃을 꽂아 신의 기운을 받는 매개체로 사용하였고, 고구려에서는 개선장군의 머리에 꿩 깃을 꽂아 영광과 위용을 자랑하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꿩을 상서로운 새로 여겨서 초례를 지내는 상에 꿩을 놓고 예를 올렸으며 폐백에는 꿩고기 포를 놓았다고 한다. 
  꿩요리는 메밀과 궁합이 맞는 음식이었나 보다.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꿩요리는 메밀과 함께 요리를 하였다.
  꿩의 뼈를 우려낸 육수에다가 각종 야채를 넣어먹기도 하였고 만두 속이나 고명으로 얹어 맛을 더하기도 하였다.
  꿩막국수뿐만 아니라 옥수수 술도 맛이 좋다. 일명 ‘앉은뱅이술’이라 하는데, 맛이 좋아 일어날 줄 모르고 먹다가 일어나는 순간 취기가 올라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라 한다.
  막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기운이 난다.
  다시 길을 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 ~ 아 언제나 이 가슴에 덮인 안개 활짝 개고 /아 언제나 이 가슴에 밝은 해가 떠오르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이 나그네길/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이별의 종착역 ~
  ‘테너 손시향’이 부른 노래지만 김현식(가수 1958- 1990)의 버전으로 흥얼거리며 걷는다.  길을 나서는 자들에게 인생은 가야만하는 삶인 것이다. 비바람 이치든 눈보라가치든 꼭 가야한다.
 그 죽음이 문자를 울린다. 친구의 친정 아버지 부음이다. 나는 죽음의 여백을 떠올렸다.

  삶보다 절실한 게 뭐냐
 
  그가 죽었다는 부음을 받았다

  비어있는  자리보다
  아직 그리움으로 남은 자리

  따듯하다

                                             허림  - 여백-

  모든 생은 아름답지만 인연이 닿았던 삶을 생각하면 자꾸만 그의 얼굴에서 번지는 웃음과 말이 생각난다.  죽어도 따듯하게 기억되는 이말.
-니 맘대로 가라 길이란 큰 여백 아니더냐!-
길에서 길로 들어서는 ‘벌대울’은 여백처럼 남은 곳이다.
  들어가는 길은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다. 어귀를 지나 산중턱으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부채를 펼친 듯 너른 둔덕을 이루고 있다.
‘작은벌대울’을 지나 둔덕 끝으로 골은 원골과 ‘갈밭골’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개울이 흐른다. 원골 안으로 들어서니 파란색 함석지붕의 집 마당 주변에 벌통이 놓여있다. 주인은 안  보이고 주변에 개복숭아가 지천이다. 그런데 한 떼의 벌이 복숭아나무에 매달려있다. 분봉을 한 것인데 날아갈까봐 걱정된다.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어디가 길인지도 모를 만큼 숲이 우거졌다.
  다시 국도로 나와 조금 내려오면 왼편 산중턱에 ‘대한불교 삼론종 가상사’란 절이 자리한다.  최근에 불사를 이루었는데 주민들과 신도들을 위한 문화행사를 펼친다고 한다. 
  ‘더랭이구비’로 내려간다. 구비가 만만치 않다. 온전히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반대로 한 바퀴를 돈다. 8자형의 바위절벽이다.
  더랭이에서 도톨고개를 넘어 백이동을 지나 성산장을 보러다녔다고 한다.
  ‘더랭이구비’는 바위산과 바위산 사이를 돌고 도는 구비이다. 구비에는 칼국수집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에서도 풍천잣을 깠다.
  경운기엔진에 연결한 탈잣기는 천막에 덮여있다. 잣을 까다가 온몸이 땀에 젖으면 개울에 내려가 목욕을 했다.
  한여름에는 ‘바람골’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더렝이구비’를 돌아 서자마자 ‘구석바위골’이 나온다. 막창에 평풍 같은 바위가 서있다고 한다. 
  사태골이다. 풍천리와 구성포의 경계이기도 한 이 골짜기는 비만 오면 사태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골짜기다. 어귀에는 잼버리도로가 뚫리면서 소양휴게소가 들어섰지만 지금은 쓸쓸한 공터가 되었다. 이 ‘사태구비’를 이루는 개울에는 ‘궝소’가 있었다.
  그래도 쉼터는 기억 속에 남아있다. 오다가다 차를 세우고 ‘사태구비’ 개울물에 발도 적시고 지나 온 길을 돌아보고 가야할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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