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맛비인가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장맛비가 내렸다. 집중 호우였다. 황톳물이 실려 나가고 피서 온 많은 사람들이 급히 강둑으로 올라왔다. 서둘러 떠날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피서객들은 용(龍) 같은 강 물결을 바라보며 화양강의 여름을 즐겼다.
동서고속도로가 건설 중인 ‘대평뜰’아래 ‘누치소’, ‘수리포’를 돌아 ‘광대소(60계단)’,와 ‘뱀개소(백양계)’를 휘감으며 흘러오는 황토 빛 물살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대평마을체험관’ 앞 ‘대진강변’에 매어둔 줄 배는 이미 강둑에 올라와 있고, 추억의 돌다리는 물속에 잠겨 멋진 물굽이를 만들어 냈다.
‘대진교’를 건너 ‘구성포 돈두리(전평, 돈두루)’로 들어왔다. 화양강과 군업천이 만나 삼각주를 이루는 삼포 아우라지 건너편이다. 은사시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선 ‘화촌면체육공원’과 ‘운전교육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 ‘돈두루’는 옛날부터 밭작물이 잘됐다. 돌각사리 밭이었지만 홍수로 퇴적된 하안단구라 밭만 일구고 씨앗만 넣으면 풍작을 이루어 돈이 자루로 들어왔다고 하여 ‘돈두리’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돈두리’버덩을 논으로 개간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물줄기가 마땅치 않았다. 궁리 끝에 ‘백이동’어귀에서부터 ‘광대소’바위벼랑을 깨고 ‘뱀개소’를 휘돌아오는 보를 냈지만 장마에 홍수가 나면 보가 터지고 휩쓸려 떨어져나가 허사가 되어 밭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뱀개소(백양계)’는 ‘삼포휴게소’아래 버드나무가 숲을 이룬 늪지인데, 장마만 졌다하면 물이 들이차 큰 연못을 이루었다. 이 연못이 ‘뱀개소’인데 ‘뱀개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소들이 좋아하는 꼴(소먹이 풀)이 많아 인근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소를 내다 맸다. 어느 날 아침 소(牛)를 내다 매고 저녁에 끌러 가보니 고삐가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잡아 당겨보니 소는 보이지 않고 빈 고삐만 나왔다 한다. 마을사람들은 연못 속에 천년 묵은 이무기(뱀)가 살고 있다고 하여 다시는 소를 내다 매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이 연못을 '뱀개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진강변’은 ‘뱀개소’아래 여울이 만들어내는 백사장이다. ‘대진(大津)’이라 하여 나루가 있었을 법하지만 큰 여울이라 배는 띄우지 않았다. 따라서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돌다리를 건너다니거나 섶다리를 놓아 건너다녔고 장마가 지면 일건에서 배를 탔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이야기가 뗏목이다. ‘두촌 장남’과 ‘내촌 도관리 떼소’에서 적심( 목재를 떼로 지어 묶는 일)하여 떠내려 보낸 뗏목이 ‘돈두리여울’에서 걸려 ‘신내’앞강에서 다시 적심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진강변의 백사장은 이곳이 여울이었음을 단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증거다.
지금은 그 자리에 대진교가 놓이고 제방을 하여 ‘대평마을 아우라지’ 버덩과 ‘돈두리’가 생겨났다고 한다. ‘구성포’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읍내사람들 대부분은 ‘신내사거리’에서 춘천방향으로 들어서는 ‘버덩말’, ‘안말’, ‘연두덕(둔덕말,둔덕리)’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구성포’는 ‘화양강’을 따라 이어지는 44번국도와 ‘풍천천’을 따라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만나 네거리를 이루는 교통의 요지이며, 아홉 구비를 돌아 흐르는 ‘풍천천’을 따라 구비마다 작은 부락을 이루었던 큰 마을이다.
길과 길이 만나고 강과 강이 만나는 ‘구성포 나루’는 장사가 잘 되는 나루로 한양 사대문 안에서도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돈도루’를 돌아 ‘신내’로 들어서면서 삶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소금배로 문을 열어야 할 것 같다.
‘구성포’에 소금배가 들어왔다.
한강 ‘마포’에서 소금을 싣고 보름이 넘게 바람과 삿대와 노를 저어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화양강)을 거슬러 오른 것이다.
장사진을 이루었던 장꾼들과 ‘내촌’, ‘서석’, ‘두촌’, ‘군업’, ‘풍천리’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은 소금을 먼저 받으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강수운의 종착 나루터인 ‘구성포’에는 ‘마포’에서 올라온 소금과 새우젓, 어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해안에서 ‘대관령’, ‘한계령’, ‘진부령’을 넘어온 소금장수도 있었지만 한강에서 올라온 소금을 기다렸던 이유는 뭘까?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해변의 토사(土砂)를 깔고, 그 위에 소금물을 부어 수분을 증발시킨 후 농도가 짙은 소금물을 끓이는 ‘전오법(煎熬法)’이라는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이 소금은 바닷물을 직접 볶는 동해안의 소금보다 품질이 좋았다.
따라서 모든 음식의 기본인 소금만큼은 좋은 것으로 구하려고 ‘신내’는 북새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소금은 당시에 상당한 고가품으로서 마포, 용산, 서강 등 소위 한강의 ‘아랫강 여각 상인’들의 전략 상품이었다. 보통 콩, 팥, 쌀, 잡곡 등과 물물교환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상류로 갈수록 소금의 가격은 좋았다.
더욱이 소금 배는 자주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래서 뱃사람들 사이에 ‘이른 봄에 올라 간 배는 호박을 심어 그 호박을 따먹고야 내려온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다. 즉 봄에 짐을 싣고 올라간 배는 장마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이 불어야 내려왔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듯 사공들의 뱃길은 일 년에 한 행부(행보), 두 행부 정도였으니 소금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홍천강’은 ‘청평’에서부터 ‘구성포’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여울을 이루고 있지만, 큰 여울이 없었다. 따라서 작은 배를 이용하여 담배와 옷감 등 생필품을 싣고 들어오는 배는 수량에 관계없이 자주 들어왔고 한강수운의 종점이었던 구성포는 일찍부터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고 번창했다. 소금 배는 주로 봄과 가을에 들어왔다. 해빙의 수량이 많을 때와 장마가 지고 강물이 불어나면 ‘구성포’까지 밀쳐 들어왔다. 구성포에는 언제부터 배가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시대에 ‘벌력천현’이, 신라시대에는 ‘녹효현’. ‘화산현’을 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배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조세와도 관계가 깊다.
특히, 조선시대 ‘내촌 물걸리’에 ‘동창’이 들어서면서 물길을 이용하여 조곡을 배로 실어냈다. 내촌의 ‘도관동’과 ‘답풍리’의 떼소(양지떼소, 응달떼소)는 뗏목을 띄웠던 곳으로 이야기가 남아있다.
‘내촌 물걸리’에 소금배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구성포'에서 작은 배에 소금을 받아 싣고 들어갔을 듯하며, 조곡으로 거두어들인 곡물은 뗏목을 이용하여 실어 냈을 가능성이 크다.
‘홍천강’을 통하여 뗏목이 많이 내려갔다. 국내 최대의 소비지인 서울에서는 건축, 토목, 가구, 취사나 난방용 나무가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석탄 사용이 일반화되기 전인 20세기 중반까지는 이런 사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한강 상류지역에서 나무를 벌목하여 뗏목으로 만든 다음 하류로 내려가는 모습은 장관이었고 한강 수운이 폐쇄되기 전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자연히 목상이 활발하였다.
뗏목소리는 구성졌으며 오랜 물길에 대한 한이 깊었다. 그러나 1943년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홍천강 뗏목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후 뗏목꾼들은 인제나 양구 화천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1945년 민족분단을 맞으면서 뗏목을 나르던 뗏꾼들은 그들이 부르던 아리랑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무를 베는 일은 쉽지 않았다. 벌목이 오히려 뗏목일보다 부상 위험이 더 많았다고 한다. 벌목 작업은 주로 겨울철에 했다. 눈이 내려 쌓이면 산에서 끌어내리기 쉬었기 때문이다. 산 치성을 드린 뒤 가장 노련한 벌목꾼이 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 넘기는데, 이때 톱을 쓰지 않고 도끼로만 했다한다. 이렇게 거둔 나무는 일단 강가에 쌓아두었다가 얼음이 풀리고 봄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면 나무를 띄웠다.
뗏목이 지나는 나루터마다 주막이 번창하고 술과 여자가 넘쳐 났다. 뗏꾼들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에 색주가가 특히 붐볐다. 주막에는 들병이(들병장수의 속된 말: 병에다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가 8~9명이나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홍천강은 선박운항에 그리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계절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고, 물이 깊고 잔잔한 소(紹)와 물이 얕으면서 흐름이 빠른 여울이 번갈아 나타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 한강에서 운행된 배의 구조는 하천운행에 편리하도록 밑바닥이 평평하면서 뱃전은 얕고 배의 길이가 긴 대신 폭은 좁았다. 이런 구조를 가진 강배를 평저선이라고 불렀다. 평저선은 운행속도가 느린 대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수심이 얕고 물 흐름이 빠른 여울을 통과하기 쉽다.
여울을 통과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의 하나는 삽이나 가래 등 농기구를 이용하여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강바닥에 골을 내는 것이었다. 이것을 ‘뱃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울통과와 관련해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특히 어려운 문제였다. 이 때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은 배를 끈으로 묶어 여러 사람이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배가 상류를 향해 출발할 때에는 보통 3척에서 5척 정도의 배들을 모아 선단을 구성했으며, 배 한척에는 대개 3~5명이 탔다. 이들 가운데 2명은 여울을 통과할 때 끈 잡이로 동원되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여울을 만나면 각 배에서 2명씩 내려 배를 끈으로 묶은 다음 한 척씩 끌어올렸다. 보통 7~8명 정도면 큰 배 한척을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여울과 배의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여울 하나를 통과하는데 보통 한나절이 걸렸다.
홍천강을 따라 실려 내려온 물품들은 뚝섬 나루에서 하역하였다. 뚝섬나루는 과거 경상도·강원도의 세곡(稅穀)운송을 위하여 선착장을 두고 한강을 오가는 세곡선을 관리하던 곳이다. 조선후기에는 강원도에서 오는 목재가 하역되는 곳으로 변하여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였다.
호조에서는 이곳에 ‘수세소’를 설치하여 상류로부터 ‘용산·마포항’으로 내려가는 목재 등을 실은 공사 선박의 세금을 받았기 때문에 운수선의 기항지가 되어 숙박업이 성행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 시내의 땔감과 목재공급에 큰 몫을 담당하여 각 지역에서 모여든 땔감이 매일 우마차로 운반되는 등 땔감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 많았다.
19세기에 홍천에서 실려나간 품목은 주로 쌀 면포 삼베 명주 송아지였고 뱃길 따라 들어온 물품은 어물과 소금이었고, 20세기 들어서는 배추 무 고사리 두릅 상치 금치 등의 토산품이 거래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포구로는 ‘화촌면 구성포리-외삼포리의 건금리 돈도루배터’와 ‘화촌면 외삼포리-성산리 성산 대진나루터’, ‘홍천읍 진리-신장대리 진리나루새’와 ‘홍천읍 희망리 화양강진’, ‘홍천읍 진리-닥바우 닥바우나루터’, ‘북방면 하화계리 서쪽 소단리마을-소단리 도둔나루’, ‘북방면 노일리 구룡밭나루’, ‘서면 모곡리 돌담나루’, ‘춘천 남면 가정리 가정나루’, ‘춘천 남면 가정리 가정자마을 서쪽 고란터나루’그리고 ‘홍천 서면 마곡리 말골나루터’는 홍천강을 중심으로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나루터였다.
‘구성포’는 한강수계의 홍천강 소강종점이었다. 그 중심에 ‘신내’가 있었고 상권이 번창했다. 마을사람들은 ‘신내’를 신나무(신당나무)가 많아 붙여진 강안의 마을이라고 하여 신(楓 :신나무 신)자를 써서 ‘신내’라 한다. ‘신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부르던 지명이며 신내라는 한자 지명을 신나무 신(楓)자의 신내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신내’는 ‘구성포나루’의 중심이었다.
소금배가 들어오던 나루는 지금의 ‘신내주유소’뒤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풍천천’의 물살이 거세어 ‘바위베루’를 돌아 ‘구신내다리목'의 매운탕집이 뱃터였다고 한다.
나루를 따라 주막과 여인숙과 상점들이 들어섰다. 특히 마방이 눈에 띄게 컸다고 한다.
‘신내주유소’와 건너편 둔덕의 ‘신내교회’는 ‘신내’에서 제일 큰 마방이었고 여인숙이었다.
소금배가 들어오면 ‘바위벼루’ 뒤 봉우리의 ‘봉상대’에서 봉화도 올렸다고 한다.
소금배와 함께 들어온 손님은 다름 아닌 한량들이었다. 이들은 목상을 겸하기도 했는데 색시집에 여장을 풀고 지방의 목상들을 불러들였다.
때로는 거간꾼도 되기도 했지만 큰손으로 통하는 존재들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막에는 이들의 발길을 붙들어 매려는 온갖 방안이 동원되기도 했다. 주막마다 색시들이 있었다.
특히 ‘2층집주막’에는 대여섯 명의 색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한가지 씩 재주를 가진 기생들이었다고 한다. 밤은 불야성을 이루고 장구소리와 가야금소리가 밤늦도록 물결처럼 뒤척였다.
그 당시 ‘신내막국수집’은 맛으로 소문난 음식점이었다. 일부러 막국수를 먹으러 오는 한양손님들도 있었다. 장사를 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루 근처의 민가에서도 술을 빚어 주막을 열기도 했으며, 더러는 들병이가 되어 술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신내’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장사진을 이루었다. 정기적으로 우시장이 서고 어물전, 소금집, 잡곡상 등 상점이 들어섰고, 사진관도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치안유지를 위한 파출소와 의용소방서가 들어섰다. 또한 ‘홍천경찰서 한국청년단 화촌분회’도 신내에 있었다.
그러나 1943년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홍천강’뱃길은 끊겼고, 번창했던 ‘신내’의 영화는 쇠락해졌다. 광복을 맞았지만 곧 이은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신내'는 포화에 휩싸여 파괴되고 황무지가 되었다.
마방이 있었던 자리에는 ‘신내주유소’가 들어서있다. 또한 화촌의 특용작물인 호프를 수매하는 창고가 들어서고 새로운 한국 건설에 선봉장이 된 시멘트공장이 서있다.
홍천-인제간 자동차 전용도로의 ‘신내나들목’을 들어서서 ‘진등’을 들어서면 ‘파빌리온 퍼즐박물관’과 ‘삼포휴게소’가 눈에 들어온다.
누구든 이곳에 차를 세우고 휴게소 뒤편으로 달려가라. 넓게 펼쳐진 '대평뜰'과 동해바다로 이어지는 영서고속도로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화양강’이 밝고 맑은 햇살을 물결마다 실어 낸다.
눈이 부시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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