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키스에 태양이 눈을 감았다.
우주의 신비다.
21세기 들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식이다.
아침 9시30분이 조금 지나 초록세상 아이들과 옥상으로 올라갔다. 준비물은 필름이다.
서서히 달이 해를 삼키는가 싶더니 금세 해의 품 안으로 들어선다. 세상은 조금 어두워졌고 햇빛의 위세도 잠시 주춤거렸다.
일식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빛에 의해서 생기는 달의 그림자가 지구에 생기고, 이 그림자 안에서는 태양이 달에 가려져 보이는 현상이다. 가려지는 정도에 따라 태양이 전부 달에 가려지면 개기일식(皆旣日蝕)이고, 태양의 일부가 달에 가려지면 부분일식(部分日蝕)이다. 태양이 달의 주위를 둘러싼 것 같은 금환일식(金環日蝕) 현상도 생긴다.
우주의 신비한 현상을 두고 인간은 그저 넋을 잃을 뿐이다.
달나라를 다녀오는 시대에 살면서도 우주에 대한 세계는 손톱만큼만 알 뿐 여전히 달은 신비롭기만 하다. 그래서 아직도 달의 전설은 애잔하다.
달 속에 토끼가 살고 있다. 물 긷는 사람 같다.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던 며느리가 승천하여 달의 며느리가 되어 달에 살면서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이다. 베짜는 여인이나 베를 두드리는 여인이다.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받은 불사약(不死藥)을 아내 항아(姮娥)가 훔쳐 마시고 신선이 되어 달 속으로 도망간 모습이라고도 하고, 오강(吳剛)이라는 남자가 벌로서 찍어도 찍어도 찍힌 자국이 없어지는 계수나무를 찍어 넘어뜨리기 위하여 도끼를 계속 내리치고 있다고 한 전설은 모두 달 속에 어리는 그림자를 두고 생겨난 전설이다.
2009년은 유엔(UN)이 결의하고 국제천문연맹(IAU),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 천문의 해’이다.
실제로 2009년은 아주 뜻깊은 해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한 지 400주년이고, 허블의 우주 팽창 발견 80주년이다.
또한 인류의 달 착륙 40주년이기도 하고, 외계 지성체 탐사 프로젝트 제안 50주년 및 메시지 송신 35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이 만든 이야기 중에서 별자리에 얽힌 신화는 우주의 신비감을 가장 감동적으로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우주는 나약한 인간에게 무궁무진한 세계이고, 무한한 상상과 꿈과 희망을 갖게 했다.
달의 키스를 받은 태양은 잠시 넋을 잃고 눈을 감았다.

오후의 햇살은 뜨거웠다.
‘쇠바랑께비’를 돌아 ‘점간’이 있었다는 ‘웃뭇골’ 어귀를 돌아 내려온다. ‘점간’에서는 승냥질(대장간)도 하고 옹기도 빚어 팔았다.
길은 ‘웃뭇골’에서 ‘논골’로 넘는 중턱에서 멈추고 ‘양지뜰’로 돌아가는 수로를 따라 ‘선바위’ 앞 보까지 이어진다.
다시 ‘웃뭇골’ 어귀에서 ‘양지말 큰골’로 내려오다가 ‘먹통바위’를 더듬는다.
먹통(목재나 석재를 다듬을 때 직선을 긋기 위한 도구)처럼 생겼다는 ‘먹통바위’는 물이 깊어 사내아이들이 뭔가를 덜렁대며 멱을 감기도 하고, 밤이면 메기낚시를 하던 곳이다. 산중턱을 가로질러 길이 나면서 바위도 묻어버리고 그 위에 아스콘 포장을 했다.
‘큰골’ 어귀에서 돌아내려오면 ‘양지베랑(벼랑)’이고 그 아래에는 큰골의 물을 받아 돌아가던 물레방아가 있었다.
‘양지말’ 둔덕에는 효자 김규현의 ‘명륜당’이 있다. 비각은 김규현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김규현은 성품이 착하고 청렴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위독한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온갖 정성을 다하여 약을 구해 드리며 백약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어 근심하고 있던 중 꿈을 꾸고 산신령의 가르침으로 팔봉산에서 산삼을 캐어 달여 드려서 부친의 오랜 병환을 낫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고 그의 효행을 기려 1867년에 문중에서 이곳에 비를 세웠다.
큰골 어귀 능선이 뚝 끊겨 절벽을 이룬 도로에서 개울 건너 김영희 시인의 태 버린 고향집을 바라본다.
울타리처럼 서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펜션이 들어서 있다.
누가 살든지 고향은 마음에 깃든 둥지다.
뒤로는 ‘뒷골’이고 펜션이 들어선 둔덕을 돌아내려오면 정문집 안주인 박정숙 여사가 살던 집이 있다. 집은 헐리고 다시 한옥을 올렸다.
열녀문은 정문집 앞 ‘서정’ 위쪽 밤나무 옆에 세워졌었는데 지금은 ‘군업분교(폐교되고 김종구 화가의 야생화및 전시공간으로 활용)’ 뒤 ‘귀새밖등(검은골과 영사나무골 사이의 산등)’ 평산신씨의 선영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정문집은 ‘삼박골’ 어귀에 자리잡은 집이었다. 정문집 안주인 박정숙 여사는 삼박골에 삼을 심어 길쌈을 하며 자식과 손자손녀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한다.
호랑이가 나와 모래를 끼얹었다는 ‘가는골’ 어귀를 지나 내려오면 ‘검은골’이다.
버덩말 ‘검은골’은 깊은 골이다.어귀에는 평산신씨 사당이 있고, ‘더럭골’, ‘굴아우’, ‘바른골’을 지나면 ‘독적골(독족골, 독직골)’ 고개로 이어진다. 버덩말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 중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골 안으로 들어가면 ‘큰둘안지’와 ‘태할미골’이 이어진다.
검은골 개울물은 ‘서정’ 쪽으로 흘렀다.
‘서정’은 마을의 서당이자 정자였다. 그 후에 공회당이었다가 마을회관으로 넘어갔다.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 서정이 남아있다. 강가이면서 돌각살이였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와불처럼 누워있었다. 어쩌면 서낭당이었던 같다.
‘서정’에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였다.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이곳에서 모여 회의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한때는 군업분교의 아이들이 서정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서정 앞 개울가에는 물레방아가 있어 남몰래 연애를 하다가 어른들한테 혼나기도 했다.
매년 추석날 저녁에는 연극을 했다. 군업 4H오빠, 형들이 펼치는 춘향전이었다. 작수 아재가 대본을 각색하고, 재춘이 아저씨가 춘향역을, 영순이 오빠가 이도령역을 맡았다. 또한 입담 좋은 부식이 아재는 변사를 자청하였는데 삼포, 장평, 당무에서도 일부러 보러오기도 했다.
서정 아래에는 화채간이 있어 무섭기도 했다.
‘안말’의 아이들은 ‘귀새밖’ 바위벼랑으로 난 수로를 따라 학교에 다녔다. 벼랑 아래로는 두길 쯤 되는 깊은 ‘귀새밖소’가 맴돈다. 아이들은 수로 위 바위에서 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지금은 ‘안말’의 ‘양지말’과 ‘버덩말’을 잇는 다리가 놓여 여름철 물놀이 터가 되고 있다.
학교를 갔다 오다가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는 ‘점심바위’는 ‘귀새밖보’ 아래 있었다.
모든것이 사라지고 또 변했지만 여전히 개울물 소리는 풍탄(風灘)을 울린다.
돌다리를 건너야만 했던 ‘답연밭’과 둔덕을 이루는 ‘안말’을 돌아 나오면 56번국도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공작산’은 날개를 펼치고 사뿐히 내려앉는 자태이다.
그러나 공작산이 품은 ‘군업(君業)’이란 지명은 어디서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마을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유추해볼 때 선사시대에 부족장이 업무를 보던 곳이거나 마의태자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을에서는 ‘공작산’을 ‘궁적산’이라 부른다. 궁적산 아래 동네는 ‘궁지기골(동면 노천리)’이다. 궁지기골뿐만 아니라 ‘지왕동’과 ‘왕터’ 등 왕과 관련된 지명들이 동면 노천리에는 남아있다.
마의태자는 인제 갑둔리에 자리잡기 전 동면 지왕동을 거쳐 왕터에서 머문다.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기록이 없다. 아마 이 시기에 군왕의 영향력을 행사했다하여 유래되었다고 여겨진다.
또 하나는 ‘군업 너븐들’에는 많은 ‘지석묘’가 있다. 경지정리를 하기 전에는 50여기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군부대에서 돌담을 쌓느라고 깨가고 또 마을 표지석을 세우는데 쓰고, 더러는 땅속에 묻어버려 지금은 10여기만 남아있다.
이때 한 부족장이 군왕의 명을 받아 업무를 보지 않았을까?
‘군업(君業)’을 이루었던 그 터가 어딜까 생각하며 ‘서정’을 돌아 ‘귀새밖소’로 돌아내려왔다. 일찍 피서를 온 가족들이 물놀이와 낚시를 하고 있다.

군업분교- 1963년 설립되어 1999년에 폐교되기까지 군업의 유일한 기관이었다.
분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성산의 화촌초등학교를 다녀야 했고 삼포초등학교가 생기면서 학교 다니는 수고스러움은 덜했지만 어린 발걸음엔 멀고 험했다.
현재 군업분교는 우리 꽃을 가꾸는 김종구씨의 꽃밭이자 전시실이다. 꽃밭에는 야생화가 철따라 피어나고 전국을 누비며 수집한 민속품과 수석, 그림 등이 교실 세 칸에 빼곡하게 쌓여있다.
사무실 한쪽 벽에는 한국이 낳은 신의 목소리 조수미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앞뜰과 뒤뜰에는 꽃밭이 잘 꾸며져 있다. 제멋대로 자란듯한데 하나하나 마주하여 보면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도록 배려한 손길이 느껴진다.

빈자리마다
피고 지고
홀로 지고 피고
햇살처럼 환하다
무슨 재미로 사는 걸까
피고 지는
환한 소리

- 談笑 -
군업분교 뒤에서 ‘영사나무골’로 들어서서 ‘박정숙 열녀비각’을 찾아 올랐다. 무성하게 자란 풀들로 길이 잘 보이지 않아 풀섶을 혜치고 올라갔다.
평산신씨의 선산이다. 타래난초가 꽃대를 밀어 올려 자줏빛 꽃을 피운다.
박정숙 여사는 밀양박씨 문중의 규수(閨秀)다. 열다섯의 나이에 평산 신씨의 경호씨와 혼례를 올리지만 결혼 한지 일 년도 못되어 남편 신씨는 몹쓸 병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고 청상과부가 된다.
자식도 없이 시부모를 모시는 동안 시부모의 개가 권유도 있었지만 굳은 절개와 지극한 효심으로 남편의 삼년상이 나갈 때까지 묘소를 찾았다.
신현기씨를 양자로 들였다. 대를 잇기 위한 집안의 결정이었지만 아들로 맞아들인 만큼 길쌈을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면서도 올바른 길을 가도록 엄하게 가르쳤다.
박 여사의 가르침을 받은 신현기씨는 결혼하여 7남매를 두었으며 박정숙 여사는 손자손녀들의 정신적 지주로써 엄격하고 정직하게 살도록 힘썼다.
박정숙 여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시부모와 신씨 가문을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여성들의 예의범절과 정절을 지키는데 여성이 가져야 할 몸가짐을 가르치는 등 우리나라 여성교육에 헌신하며 솔선수범하는 여성상으로 일생을 마쳤다.
이에 신씨 문중에서 뜻을 모아 1931년 열녀각을 집 앞 강가에 세웠다가 최근에 평산신씨 선산에 비각을 짓고 옮겼다.
비각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군업분교가 있고, ‘너븐들’의 고인돌과 강 건너 ‘아양정’과 ‘양지말’, ‘말고개’, 자신이 살았던 정문집도 훤히 보인다.

이튿날 ‘조하대’에서 ‘말고개’를 넘어 ‘군업’으로 들어왔다.
‘말고개’는 장수가 났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아기장수들은 대부분 가족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 고개에서 장수를 기다리던 말은 능선을 넘어갔다. ‘너븐들’에서 말이 넘었다는 능선을 바라보면 그 능선이 박차고 뛰어오르는 말의 형상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말고개’는 ‘마곡’이라 부르기도 하며 그 아래 자리잡은 마을은 ‘말골’이다.
‘말골’에서 ‘망상골’은 ‘조하대’, ‘산수골’로 넘나들던 고갯길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은당골’은 ‘말골’에서 가장 깊은 골이다. 한때는 ‘술음재’로 넘나들기도 했던 이 골짜기에는 집터도 남아있으며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러 드나들기도 한다.
골짜기에서는 가재를 잡아 천렵을 했을 만큼 물이 맑고 시원했다.
가재는 깨끗한 계곡물이나 냇물에서 사는 절지동물이다. 돌 밑에 숨거나 구멍을 파고 들어가기도 하며, 달팽이나 곤충의 유충·벌레·올챙이 등을 잡아먹고 밤에 가장 활동적이다.
제1가슴다리는 크고 억세며 집게다리도 매우 크다. 제2·3가슴다리는 가늘고 작은 집게다리를 이룬다. 살아 있을 때의 몸 등쪽은 적갈색이다. 포란기는 5월 중순∼6월 초순이고 산란수는 50∼60개이며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암컷의 배에 안겨서 보호된다.
샘물이 나는 계곡 웅덩이에 개구리 다리를 찧어 담그면 돌 밑에서 가재들이 기어 나와 집게다리로 살점을 물고 놓지 않는다. 밀가루 반죽에다가 버무려 얼큰하게 끓여 먹었다. 너무 많이 먹어 똥구멍이 막혀 고생하기도 했던 기억도 있다.
‘닥밭골’과 ‘진잰자리’, ‘쇠다리부러진골’, ‘돼지우뭇골’, ‘납상골’을 지나 능선을 넘으면 ‘술음재’다.
‘은당골’의 물줄기는 ‘망상골’과 만나 다시 골짜기를 이루며 ‘아양정’ 아래에서 ‘군업천’과 만난다.
‘분토골’과 ‘무수메기골’ 사이에 능선 마루에 ‘아양정(峨洋亭)’이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솔밭 한가운데 자리잡은 정자는 공작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안산’과 ‘안말’, ‘나븐들’, ‘내삼포’ 까지 환히 내다보인다.
‘아양정’은 1903년 초은(憔隱) 이계선이 군업 양지말 마을 한가운데 서당을 짓고 문중의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1912년 김순익씨가 정각으로 개축하며 아양정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국전쟁시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원주이씨 문중에서 1954년 4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 하였다.
아양정은 절벽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래로는 맑은 물이 맴돌다 흐른다. 삼포초등학교와 화촌중학교의 소풍 장소였다.
옛날의 선비들은 더운 여름에도 정자에 올라 부채바람을 맞으며 풍류를 읊었다. 한시를 읊고 춤을 추고 가야금 거문고를 타며 즐기던 사람의 멋은 자연과 닮았으며 거스르지 않았다.
그런 삶과 멋은 자취를 감추고 보존해야할 문화재로 남아 보호 관리해야 하는 실정이다.
정자에 올라 앉아보면 마음의 동요가 인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남겨줄 지금 우리시대의 문화는 무엇일까?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다가 어느 농가에서 새어나오는 엿기름 냄새를 맡았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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