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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호 홍천강 탐사기행을 떠나며 64 삼정포 - 대평뜰과 일감재(一鑑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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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7.09  11: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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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大平)’ - 큰 뜰이다.
뜰을 넘어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너른 땅이다.
홍천강의 원류인 ‘내촌천’과 ‘장남천’이 ‘아오라지(아호정)’에서 만나 ‘북창’, ‘주음치’를 지나 ‘누치소’를 이루고 다시 ‘성산’과 ‘외삼포’를 가르며 ‘백이동’에서 ‘진등고개’에 막혀 큰 물굽이를 이루며 ‘대평뜰’을 감싸고 돈다.
‘진등고개’는 길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강원도 사투리인 ‘질다(길다)’라는 말과 산등성이가 합쳐 ‘진등’이 되었다.
말 그대로 진등고개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가리산까지 닿는다. 곳곳에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만 있을 뿐 양편으로 ‘풍천천’과 ‘백이동천’을 거느리고 백이동을 지나면 ‘야시대천’이 능선을 끼고 흐른다.
그런 까닭에 ‘성산’은 진등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 한다.
‘진등’은 가리산의 발끝이자 능선의 뿌리이며, ‘구성포’와 ‘외삼포’, ‘대평뜰’의 경계이다. 그 뿌리는 단애(斷崖)를 이루며 큰 소를 만들어 놓았다.
행정구역상 외삼포1리인 대평은 화양강이 천년 넘도록 흘러내리며 흙을 실어 날라 퇴적된 땅이다. 그 땅에는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숲 너머 푸른 강물이 감돌아 흐른다.
너른 땅이었지만 마을 논이나 밭으로 부쳐 먹던 땅은 그리 넓지 않았다. 더욱이 끌어올 물길이 마땅치 않아 하늘을 바라만 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었다.
이 땅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것은 1964년 강원도1호로 토지개간사업이 시행되면서 지금과 같은 너른 뜰로 탈바꿈 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 뜰 위로 동서고속도로가 지나고 동홍천 톨게이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삼포’든 ‘삼정포’든 찾아야 한다.
‘삼정포(三汀浦)’의 ‘삼정(三汀)’이 어딜까? 우선 ‘삼포’를 찾아 나섰다.
삼포의 포구는 쉽게 확인되었다.
위쪽부터 ‘성산’과 ‘건금리’를 건너들던 ‘성포나루’와 ‘일건’에서 ‘대평’으로 건너다니던 ‘삼포나루’, ‘구성포’에서 ‘대평(장거리)’으로 넘나들던 ‘대진나루’ 세곳이었다. 그중에서 성산과 건금리에 있던 성포나루가 제일 컸고 일건에 있던 나루터는 규모가 작았다.
구성포와 대평 장터거리의 ‘대진나루’는 ‘군업’, ‘장평’, ‘서석’으로 가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 이유 때문에 1959년에 대진교가 먼저 가설되면서 나루터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세곳의 나루 - ‘성포’와 ‘삼포’, ‘대진’을 합쳐 ‘삼포’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삼포’는 강이 휘감아 도는 굽이마다 골짜기를 이루며 계곡이 흘러드는 곳이 셋이 있다. 그곳은 포구처럼 생겼는데 각각 ‘수리계’, ‘백양계’, ‘백동계’다.
‘수리계(水理溪)’는 ‘구석건금리’ 어귀를 말하는 ‘수리께’다. ‘수리포’라고 하는데 물이 굽어 돌면서 ‘도랑소’를 이루고, ‘백양계(白楊溪)’는 ‘뱀개소’를 가리키며 ‘백동계(白東溪)’는 ‘노내골’ 어귀의 ‘동회울’ 아래쪽으로 군업천과 화양강이 만나는 곳이다.
세곳은 모두 버드나무가 많고 물이 휘감아 돌아 너른 뜰을 이루며 땅이 비옥하고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특히 ‘백양계’는 이른 봄에 버들강아지가 하얗게 피어 반짝인다 하여 붙여졌다 한다.
‘뱀개소’ 위쪽은 ‘광대소’다. 마포나루에서 물자를 실은 배가 들어올 때까지 바위에 밧줄을 매놓고 광대처럼 줄타기를 하며 놀았다고 하는 곳이다. 지금은 ‘60계단’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60계단은 면사무소에서 ‘광대소’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뱀개소’ 아래에는 ‘군계소’다. ‘군계’는 진등고개 삼포휴게소 아래다. 버드나무가 둘러서 있는데다가 물이 휘돌아나가면서 큰 못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군계소’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어느날 마을의 한 농부가 ‘군계소’ 근처에 소를 매어놓고 저녁때 끌러가 보니 소는 보이지 않고 긴 고삐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급한 김에 고삐를 당겨보니 소는 보이지 않고 고삐만 나왔다고 한다. 그 후로 아무도 이 근처에 소를 매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곳을 두고 ‘삼정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이유는 마을사람들이 하나같이 ‘삼정포(삼포)’는 큰 버들밭을 이루며 강이 둘러싸고 있다고 한데서 붙은 지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150여년 전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도 삼포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줄기가 호위하고 있으며 산은 태고의 기상이 서려 있고 사람들은 질박하다’(華西集 卷27 告祝21), ‘지세가 평활하고 강물이 둘러있다’(甚愛地勢寬平江流灣廻 : 華西集 附錄 卷9 年譜44)’고 읊었다. 하여 ‘선현이 그려놓은 형제동거도(兄弟同居圖)의 가르침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우고 서숙(書塾)을 지은 뒤 방을 몇개 들여 함께 모여 경서(經書)를 배우고 예절을 익히면서 여생을 다하려 한다’(홍천 삼포 일감재개기고토신문-개장강선정 형제동거도, 건묘기숙, 열방동찬 부우부잠 과경숙례 이종여치언 : 洪川三浦一鑑齋開基告土神文-今開舊榮之東展數架 蓋將講先正兄弟同居圖, 建廟起塾, 列房同 課經熟禮 以終餘齒焉)며 ‘일감재(一鑑齋)’를 짓는다.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 1792~1868)는 조선조 말기사회의 시대적 현실에 대응하려는 우국과 존왕양이의 대의를 주장하여 위정척사 사상을 전개하였던 재야지식인이다.
토목공사의 역사를 정지하여 백성의 재물을 긁어 모으는 정치를 금하라. 정토목지역 금렴민지정(停土木之役 禁斂民之政)하라고 상소문을 통해 대원군의 정책을 최초로 통박했던 조선왕조말기의 성리학자이자, 직언자였다.
이항로의 시대인식은 그의 보국양이(保國攘夷)와 위정척사(爲政斥邪)에 기초하여 민족위기의식에서 구국활동으로 시작한 위정척사 상소운동과 화서학파 문인에게 강렬한 항일의병투쟁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게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350여명 제자 중에서 스승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여 의병운동에 생애를 바친 인물만도 거유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대마도에서 순국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13도 의군총재 유인석(柳麟錫), 춘천의병장 유홍석(柳弘錫), 외세배척을 주장하는 상소문으로 처형당한 홍재학(洪在鶴), 척왜를 주장하다 처형당한 백낙관(白樂寬), 병인양요때 프랑스함대를 격퇴한 양헌수(梁憲洙),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을 떨친 박문일(朴文一)·이근원(李根元), 만주의 항일투쟁 독립단도총재 박장호(朴長浩), 단식 순사한 이봉환(李鳳煥), 강원도 의병 유중락(柳重洛)·유중악(柳重岳)·유중룡(柳重龍)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화서 선생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1792년(정조16) 2월13일에 우록헌 이회장(友鹿軒 李晦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갈대가 많아서 노문리(蘆門里)란 지명을 가진 노문리는 주자의 무이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에 버금가는 벽계구곡(檗溪九曲)이 산굽이를 감아 돌아 선계의 경지가 선연한 곳이다. 제월대(霽月臺), 별소(鱉沼), 묘고봉(妙高峰), 명옥정(鳴玉亭), 분설담(噴雪潭), 오자정(五自亭), 석문(石門), 일주암(一柱岩)의 노산8경이 북한강과 합수되는 수입리(水入里)에서부터 노문리에 이르기까지 산맥과 물 흐름이 갈지자(之)로 굽이굽이 펼쳐져 산수의 묘미가 절경을 이루며, 마치 아홉 폭의 산수화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다.
18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홀로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제자를 기르면서 명산을 찾았으며 정전법에 의거한 정창마을을 일으킬 곳을 찾기도 했다.
고종 원년(1864) 조두향의 천거로 장원서 별제가 되었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는 동부승지로 제직하면서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여 공조참판에 승진하였으나 외침에 대한 척사론, 대원군의 과격한 개혁과 왕정의 절대화에 대한 민본론, 경복궁 증축 정책에 반대하여 대원군의 배척을 받기도 했다.
김민기 교수(전 고려대교수, 문학박사)는 화서의 사상을 ‘정치적으로 자립주의와 민본주의 경제적 균등주의와 사회적 평등주의 군사적 자위주의와 문화적 자존주의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사상은 우리의 오랜 전통을 수호하면서 발전시키자는 것으로서 위정척사(爲政斥邪)’라고 그의 논문에 썼다’(벌력문화 3권 18쪽).
화서선생은 1852년 61세에 홍천 삼포에 일감재를 짓고 이사를 한다.
이사 오기 전 1830년 금강산에서 바다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삼포를 둘러보고 삼포에 대한 감회를 이렇게 썼다. ‘홍천의 강물은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고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며 산은 위압적으로 높지도 않고 비굴할 정도로 낮지도 않았다. 들은 막막할 정도로 넓지 않고 궁색할 정도로 좁지 않으며 개 짖는 소리는 멀리 들리고 닭이 우는 소리는 한가했다’ (華西集)
그 후 아들 준으로 하여금 1846년에 낡은 집을 한 채 사 놓게 하고, 서석 삼신산과 설악산을 유람했을 때에도 이곳에 들러 살펴본다.
선생이 삼포 원림(圓林)에 일감재를 짓고 이사 오게 된 까닭은 ‘이곳 삼포 사람들이 나와 함께 살 것을 허락하였으며, 점을 쳐보니 길조가 나왔다(금개구영지동전수가 인락분화균황식락(今開舊榮之東展數架 人諾分華龜皇食洛)’며 토신에게 축문을 올린다.
그러면 ‘일감재(一鑑齋)’는 어디일까?
신내 사거리에서 대진교를 건너 화촌중학교로 오르기 전 오른쪽 농로를 따라 150m 들어서면 조그만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이 ‘송방당(松方塘)’이며, 이 연못 뒤로 ‘일감재’가 있었다.
일감재의 규모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축문의 내용으로 비추어 보아 벽계구택과 같은 가묘(家廟)가 있고 강당과 같은 서숙(書塾)도 있는 형제동거지도(兄弟同居之圖)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뒤로는 둥그런 동산이 있고 앞에는 연못이 있는 저택이다. 그러나 당시의 마을풍경은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무궁추우외 無窮秋憂畏
끝없이 내리는 가을비가 두려워
필마파신음 匹馬破晨陰
한 마리 말을 타고 새벽길을 달린다
객담황모동 客膝黃茅棟
누런 띠 풀로 지붕을 한 조그만 집이 있고
회원조력림 回願皂櫪林
멀리 돌려보니 말 기르는 목장이 있다
정란임수립 停鸞臨水立
난새는 물가에 멈추어 서고
상안라운음 翔雁拏雲吟
날아가는 기러기는 구름을 헤치며 우네
직북인제로 直北麟蹄路
북쪽으로 곧장 뚫린 인제로 가는 길
소소신어침 蕭簫信御駸
울면서 달리는 망에 몸을 맡긴다
發三浦次淵翁韻 : 화서집 권2시28(華西集 卷2 詩28)

화서선생은 일감재에서 강론을 펼친다.
‘한송재’의 유고집에는 일감재에서 서숙하며 학문을 익힌 사람은 중암 김평묵, 홍암 박경수, 성재 유중교, 하거 양헌수, 면암 최익현 유인석, 화남 박장호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한송재 김기도’(寒松齎 金箕燾 1780~1863 홍천 희망리)는 정삼품 당상 돈령부 도정(正三品 堂上 敦寧府 都正)에 오른 선비다. 송하댁, 자인당, 송죽당(홍천현감 계서 이희평이 부친별호), 한송재(화서선생이 붙인 별호) 등으로 불리웠다. 희망리 큰 소나무 아래 몇 칸의 초가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호다. 화서선생과는 사돈지간이다. 한송재 유고집에는 화서선생의 홍천별업에 대한 기록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화서 선생은 홍천 삼포에 짐을 풀고 ‘임천오씨태극설(臨川吳氏 太極說)’, ‘주역전의동이석의(周易傳義同異釋義)’을 저술하고, 제자 유중교에게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를 편찬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사 온 이듬해 맏아들 준이 죽고 그 다음해에 셋째 아들 소와 둘째 며느리가 죽자 8년 만에 벽계구택으로 돌아간다. 두 아들과 자부를 잃은 쓰라린 마음을 화서는 서석 삼신산과 내촌 서곡리 덕탄, 약승여울, 쌍계사 등지를 순례하며 시(詩)를 강물에 바람에 실려보낸다. 특히 삼포를 떠나던 해 9월9일 화서는 서곡리 덕탄을 유람한다. 덕탄바위는 삼층바위 위에 큰 자리 5~6장을 펼만큼 넓다. 화서는 암면에 기봉강역 홍무의관(箕封疆域 洪武衣冠) 여덟 글자를 새기게 한다.
그 후 화서는 69세가 되던 1860년 고향인 벽계로 귀향하며 홍천과의 아쉬운 인연을 남긴다.
홍천에는 화서에 대한 유물이나 자취는 송방담이 유일하다. 그러나 화서와 함께 삼포로 이사를 왔던 제자들과 그의 외손들의 기록을 통하여 화서의 자취를 만날 수 있었다.
화서의 제자들이 화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던 ‘강수계’가 있었고, 외삼포리의 ‘삼광장학회’에는 후학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대평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휴게소 뒤편이다.
동서고속도로가 대평뜰 한가운데를 가르며 동산으로 이어지고 푸른 초원 너머 길게 늘어선 동산 한가운데 자리한 화촌중학교와 강가에 자리한 대평체험관이 있다. 그러나 대평뜰의 두축은 강과 뜰이다. 그 경계는 활처럼 휘어져 이어지는 둑방길이다.
대진교 다리 건너 대평마을로 들어서서 왼편 강둑으로 이어지는 길머리에 세워진 ‘대평체험관’은 맑은 물, 백사장과 친환경농법이 잘 어우러진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맘껏 농촌관광체험을 즐길 수 있는 체험관이다.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들어서고 있는 체험관의 콘텐츠도 마을의 특색을 따라가는 추세이지만 대평체험관은 강을 끼고 있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체험관에는 안내소, 체험관, 숙박시설, 농산물 판매장, 디딜방아간이 있고, 그 체험의 무대는 강가의 모래밭과 맑은 물이다.
최근에는 대진(大津)나루가 있던 여울에 징검다리를 놓아 새로운 체험거리가 생겼다.
강가의 맑은 모래밭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고 또 강을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두꺼비집과 모래조각을 만들며 여름의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화양강은 그런 추억 만들기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멀어지는듯 하여 아쉽다. 대표적인 곳이 ‘물골안유원지’다.
한때는 홍천의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빠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분별한 골재채취로 모래밭이 사라지고 사유화 되어 버린 풍경을 더 이상 찾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모래성을 쌓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옥수수와 삶은 감자를 먹으며 시골의 넉넉한 인심을 되찾고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을 찾는 이의 마음 가득 채워주길 바란다.
대진나루는 사람의 정이 넘쳐나던 곳이었다.
한때는 장이 들어서기도 하여 장터거리를 이루기도 했고, 화서 이항로 선생의 인재양성의 꿈이 펼쳐지기도 했던 곳이다.
물레방아는 ‘군계소’ 건너편 강가와 ‘장터거리’ 아래쪽 ‘아우라지’에 있었다. 물이 없어 벼방아보다 보리방아로 물레방아는 밤새 돌았다.
아우라지는 화양강과 군업천이 만나는 곳이다.
‘옥담’은 감옥터였다. 장터거리 안에 있었다는데 언제 세워졌는지 또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광대들이 줄을 매고 배를 기다리며 놀던 ‘광대소(육십계단)’ 아래에는 ‘얼음나들이’가 있었다. 작은 샘통이었는데 한여름에도 발이 시릴 만큼 얼음 같은 물이 흘러나왔다.
대평뜰 한가운데를 지나는 고속도로의 교각들 아래로 이어진 농로를 따라 우렁이가 알을 쓸고,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
전통적 습속(習俗)의 이어짐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마을의 곳곳이 대평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회자되길 바라면서 동산 아랫마을 길을 걸어 중학교 앞으로 나왔다.
산고개 아래에는 양조장이 있었다. 막걸리 두되를 주전자에 받아들고 집으로 가다가 한 모금 한 모금 마시고 취해 논두렁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혼자 웃기도 했다.
그 아랫길은 ‘일감재’가 자리했던 길이다. 못 한가운데는 소나무가 있었다는 연못은 지금 아카시나무와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
일감재는 1850년 전 후에 지어졌다가 농민동학운동과 일제강점기에 화재를 입었고 다시 2층으로 올렸다가 6·25때 또 소실되었다.
화서 당신이 그립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을 사람답게 이끌어주는 사람을 양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일인가?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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