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대’는 길고 깊었다. 골짜기마다 사람의 흔적을 찾았고 그때마다 한생을 살다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려야 했다.
돌무더기가 반가웠고 고야나무가 반가웠다. 환삼덩굴이 기어오르고 칡덩굴이 덩굴져 꽃을 피우더라도 한때 삶의 울타리가 되고 여름에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과실이었기에 반가웠다. 깨어진 항아리나 장독도 반가웠다.
돌아보면 골이 깊고 골만큼 삶의 질곡이 깊었으리라.
그 골짜기에는 새로운 삶이 찾아들어 꿈틀대고 있어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고향이니 타향이니 길게 늘어놓고 싶지 않다.
삶에 정을 붙이고 살아가면서 고향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성산2리’- ‘원평’과 ‘새말’을 돌아 나와 야시대 개울물이 화양강에 흘러들는 물살을 본다.
강둑에서 ‘점말’쪽을 바라보면 둑처럼 두럭진 곳이 있는데 ‘돌독부리’다.
한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시절 장마때 ‘돌독부리’에 물이 넘치면 배를 띄우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야시대(也是垈) - 무래이와 갈공터> 기행에서 새말을 지나면서 <‘새말’이라는 지명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생긴 지명이고 원래는 ‘산메’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새말’은 성산에서 철정으로 넘는 작은말고개의 들머리면서 100여년전에 최화영씨가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고 개척하여 터전을 마련한 곳으로 ‘신촌’이라 부른다고 다시 고쳐 쓴다. 또한 ‘산메’는 ‘잔뫼’로 고쳐 쓴다.
원래 성산2리는 ‘원평’과 ‘원토골’, ‘석장골(석정동)’, ‘새말’, ‘잔뫼’, ‘점말’을 병합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야시대 개울이 원평을 감돌아 흐르고 ‘두멍소’를 이루며 ‘개웃말’을 지나 ‘새말’ 앞을 흐르며 화양강에 몸을 싣는다.
새말에서 점말로 가려면 ‘잔뫼골(뒷골)’을 들어서서 저수지를 지나 ‘해당화골’을 넘으면 ‘잔뫼’고 잔뫼에서 골을 따라 내려가 강가를 돌아 올라가면 ‘점말’이다.
‘점말’은 ‘옹기말’, ‘점촌’으로 부르며, 100여년전에 귀양살이 온 선비가 살아남기 위해 옹기를 빚었던 곳이다.
지금은 산과 강이 배산임수를 이룬다. 전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길이 불편하지만 초야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터를 닦고 있는 곳이다.
‘점말’에서 강 건너편은 ‘누치소’다. 누치소 위로는 북창 보에서 흘러드는 수로가 지난다.
‘누치’는 잉어과의 물고기로 2급수 이상 물이 맑고 깊은 곳에서만 사는 어종이다. 눈치라고도 하며 《연경제전집》에는 조선중순어(朝鮮重脣魚),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난호어목지》, 《전어지》 등에서는 눌어(訥魚)로 표기되어 있다.
몸은 기다란 원통형으로, 뒤쪽으로 갈수록 옆으로 납작한 형태이다. 주둥이가 튀어나와 머리 모양이 전체적으로 뾰족하다. 눈이 큰 편이고 입술이 다소 두껍다. 입은 말굽모양이며 입 주위에는 한 쌍의 수염이 있다. 식용보다는 견지낚시로 손맛이 좋은 물고기다.
누치소는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출입이 어렵다. 물이 깊고 사람의 출입이 없어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가 서식하는데 요즘은 눈치껏 사람들이 고기를 잡는다.
누치소 아래는 ‘양수장’이 있다.
누치소는 ‘외삼포’를 돌아보며 다시 답사하기로 하고 성산으로 나왔다. ‘해당화골’을 내려오다가 백선을 보았다.
‘백선’은 봉삼이라고 부르는 야생초이다. 난꽃을 닮은 꽃이 아름답지만 냄새를 맡아보니 향기가 강해서 어지러울 정도다. 운향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나무처럼 단단하고 여름에 연분홍의 다섯 꽃잎이 총상꽃차례로 피어 있다.
‘성산’은 산들이 성처럼 에둘렀다하여 부르는 지명이다. 한때는 성(城)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성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진등고개’의 능선과 ‘잔뫼등’의 능선 그리고 뒤로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성처럼 둘러선다. ‘잔뫼’에 성의 흔적이 있다하여 올라가보니 봉우리마다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의 원로들을 찾아 여쭈어보니 일제강점기에 왜군에 대항하여 강에서 주어다 쌓은 돌이라 하였다. 성터는 아니었지만 일제의 폭정에 저항한 당시 조선 백성의 마음이 담긴 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산은 조선시대 초기에 현감이 있었고 ‘홍천향교’는 ‘성산 뒷말’에 자리했다. 지금의 성산 상수도 관리사업소 옆이다.
성산은 44번 구 국도를 중심으로 ‘앞말’과 ‘뒷말’, ‘일건’, ‘백이동’으로 나눈다. 뒷말은 지금 면사무소, 농협, 화촌초등학교 뒤쪽이며 뒤로는 44번 국도가 지난다. 국도를 넘어 ‘큰골’과 ‘작은골’, ‘샘통골’, ‘백이동’이 이어진다.
‘앞말’은 시장이 있고 ‘외삼포’로 건너가는 신작로를 중심으로 왼쪽(윗쪽)은 ‘발담’이 너른 뜰을 이루고 ‘웃동산’을 위쪽으로 뱃터가 있었으며, 왼편쪽(아래쪽)으로 ‘된가람’, ‘솔무정’, ‘구우람’, ‘일건’이 너른 뜰과 마을을 이루고 있다.
‘향교’는 ‘뒷말 작은골’ 어귀에 있었다. 지금은 밀밭이다. 밭주인은 인삼을 심을 예정이라고 하면서 밭을 갈다보면 기왓장이 많이 나올 터이니 그때 다시 와 달라고 한다. 이곳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둔덕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신사를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터를 닦다 보니 이곳에서 옛날 항아리와 칼, 도자기 등이 나와 포기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이 ‘고리장터’라고 한다. 작은골 안에는 ‘석장골’이 있고 그 안막에는 ‘서덕골’이, 뱀막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장재울’로 이어진다.
뒷말에서 깊은 골짜기는 ‘큰골’이다. 화촌초등학교 뒷길로 이어지는 마을 안길을 따라 들어서게 되는데 길옆에 ‘화성단(華城壇)’이 있다. 조선 고종 때의 학자인 박영철(朴英徹)은 화서 이항로 선생의 제자로써 그의 효행과 덕행을 추념하고자 1956년에 제자들이 단을 만들어 화성단이라 하고 해마다 음력 9월15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박영철은 천성이 착하고 효심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오랜 병간호를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전국의 유명한 의원들을 두루 초청하여 병간호를 하였으나 끝내 부친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정부로부터 효자정문을 받았다고 한다.
화성단을 지나 큰골어귀로 들어서면 ‘개웃말’이다. 큰골 어귀다. 골안으로 들어가면 ‘배나물골’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구산에바윗골’, ‘사태골’, ‘주방바위골’, ‘무성골’이 이어지고 뱀막은 ‘장재울’이나 ‘야시대 안골’로 이어진다.
큰골의 물줄기는 제법 개천을 이룬다. ‘구우새보’의 귀새가 큰골을 넘어 뒷말로 흘러들었다. 지금도 수로를 타고 물이 흘러든다.
큰골의 개천 물은 ‘두멍소’ 아래에서 야시대 개울과 합수를 이룬다. 큰골 어귀를 돌아 성산가든 뒤쪽으로 나오다가 묘비를 보았다.
봉암통훈대부사헌부감찰(鳳庵通訓大夫司憲府監察)을 지낸 박석주(朴奭周)의 묘소다.
무덤을 돌아보고 나서 길을 건너 다시 야시대 개울을 따라 쌓은 제방을 걸어 강가로 나왔다. 전날에 내린 비로 강물은 흙탕물이었다.
야시대 개울 내치기에서 강태공들이 앉아 낚시를 하고 있다. 어망에는 메기, 모래무지, 마자, 피라미, 빠가사리(동자개), 꺾지 등이 담겨있다.
‘빠가사리’라는 고기가 참 재미있다. 빠가사리란 이름은 빠각빠각 소리를 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매운탕의 맛을 더하는 물고기라 한다.
강태공들에게 ‘천렵바위’를 아느냐고 묻자 어리둥절 한다.
마을 사람들이 여름철에 나와 천렵을 하던 바위다. 바위가 넓고 천렵거리가 많아 여름에는 자리가 빌 날이 없었다는 이 바위는 제방공사로 사라졌다.
성산 앞뜰에는 ‘윗동산’, ‘아랫동산’이 있다. 윗동산은 면사무소 앞에서 ‘된가람’과 ‘발담’ 사이 외삼포로 이어지는 길옆에 있다. 지금은 성포교가 놓여있어 교통이 원활하지만 옛날에는 동산을 끼고돌아 강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이 길이 외삼포에서 배를 타고 건너 장을 보러오던 옛길이다. 길 끝에는 뱃터가 있다. 지금은 제방을 쌓아 그 흔적을 찾을수 없으나 성산과 외삼포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곳이다.
그러나 뱃터는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성포교가 놓이면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때 놓았던 새마을 사업의 상징처럼 지금도 다리가 남아있다.
윗동산을 중심으로 한 뜰이 ‘발담’이다. 발담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다. 성산에서 논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그래서 ‘답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답동을 아는 사람은 없다.
또한 발담의 유래를 아는 사람도 없다.
‘발담’은 어량(魚梁) 이라고도 하며, 물고기를 잡는 장치로서, ‘물살을 가로막고 물길을 한 군데로만 터놓은 다음에 거기에 통발이나 살을 놓는다’고 나와 있다.
아마도 야시대 개울물과 화양강이 합쳐 너른 뜰에 물이 넘쳐 들어오면 발담을 놓아서 고기를 잡았던 데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길을 건너면 ‘된가람’, ‘솔무정’, ‘구우람’으로 이어지는 농로가 ‘일건’까지 이어진다. 그 한가운데 ‘아랫동산’이 자리한다. 아랫동산을 ‘솔무정’이라 하는데 경지정리하기 전까지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울창창 들어서 있었다. 지금 아랫동산은 벗나무와 굴참나무, 잣나무가 들어서 있다. 아랫동산을 돌아 발담으로 가는 고샅길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된가람’은 아랫동산 위쪽이다. 밭을 갈 때 땅이 메말라 힘이 되다(힘이 들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정말 천수답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물이 귀했던 ‘된가람’에 물꼬를 튼 것은 ‘구우새보’다. 구우새보는 ‘구우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솔무정’ 아래 마을에 자식없이 단란하게 두 내외만 사는 80고령의 노부부가 있었다. 가난과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며 살아가는 할머니는 매일같이 성황당에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을 점지해 줄 것과 마을의 가난을 구제해 달라고 신령님께 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야시대’로부터 약 100여자나 되는 큰 구렁이가 강줄기를 타고 내려와 ‘작은말고개’ 밑에까지 와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할머니는 무서움에 떨며 멍하니 서있었는데 구렁이가 할머니를 보고 머리를 흔들며 마치 오라는 듯 하여 가까이 가보니 구렁이가 따라 오라는 듯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하였다.
강물에서 나온 구렁이는 뒤를 가끔 돌아보면서 ‘원평뜰’을 지나 ‘두멍소’ 바위 사이를 가로질러 가다가 멈추는지라 따라가 보니 바위가 튀어나온 곳을 몸으로 연결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그대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어 구렁이 등을 타고 건너갔다.
그제야 구렁이도 ‘성산뜰’을 지나 ‘일건’ 쪽으로 가면서 차차 작은 뱀으로 변하여 화양강으로 들어가 버렸다. 할머니는 구렁이를 찾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날이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아침을 먹고 할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하니 길몽처럼 느껴져 함께 강으로 나가보았다. 꿈속의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가 완연하게 나타나 있었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마을사람들에게 알리고 논의를 한 끝에 하늘이 우리 마을을 돕는 일로 해몽하여 야시대의 물을 끌어들이는 보를 내고 구렁이가 쉬던 바위사이를 귀새로 연결하니 물길이 절로 이어져 황무지였던 성산뜰이 가뭄에도 물이 넉넉한 논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들을 ‘구렁이들’로 부르다가 ‘구우럼’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구렁이가 알려준 보라 하여 ‘구우새보’, ‘귀새보’로 부르게 되었다. 구우새보는 지금 원평 사격장 앞쪽의 개울에 있는 보로 원평에서는 ‘어귀소보’라 부른다.
구렁이꿈을 꾼 노부부 내외는 10여년후 한날 같이 죽으니 마을사람들이 가난을 이겨낸 노인 부부를 생각하여 귀새를 놓은 바위산 위에 합장을 하고 묘각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이 사당을 무자당(無子堂)이라 하여 마을에서는 자손없는 노인들이 죽게되면 그 유산을 모아 매년 가을에 무자제(無子祭)를 지낸다.
전설이 서려있는 ‘구우람’을 돌아 ‘일건’으로 들어섰다.
옛 국도 한 옆으로 연못처럼 보이는 늪지가 있다. 한때는 물을 담았다가 논에 대기도 했던 이곳은 ‘샘통골’의 물이 흘러들어 늪을 이룬 곳이다. 샘통골(샘터골)은 4차선 국도가 나면서 묻히고 말았지만 그 물줄기는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일건(日乾)’은 ‘진등고개’ 넘어 ‘백이동’ 내치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산도 없고 하루종일 해가 든다. 마을 앞으로는 화양강이 흐르고 뒤로는 백이동 골짜기가 이어진다.
지금은 동서고속도로의 동홍천 인터체인지가 들어서는 곳이다. ‘진등고개’를 가로지른 고속도로의 교각이 대평뜰 한가운데를 지나며 톨게이트가 일건 쪽으로 세워지고 있다. 일건 강가에서는 중석기 시대의 유물 유적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직 발굴된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고인돌이 나왔다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이 삶의 역사가 선사시대까지 이어진다는데 놀라웠다.
일건에서 다리를 건너면 ‘대평뜰’이다. 물을 따라 돌아들면 60계단이라 부르는 ‘광대소’와 ‘뱀개소’, ‘군개소’가 나온다. 그 위로 고속도로가 지난다.
발길을 돌려 백이동으로 행했다.
‘백이동’- 구성포 지역이었다가 지금은 성산리로 편입된 곳이다. 마을 입구는 고속도로 진입로와 44번 국도가 교차하는 네거리를 이룬다. 배나무가 많아서 백이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잣나무가 많아서 백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골 안으로 들어서면 골짜기가 많다.
백이동 어귀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질 좋은 숯을 굽는 ‘(주)홍천참숯가마’가 있다. 이곳에서 숯을 구은지도 벌써 30년이 되어가는 ‘박형수’씨는 장인정신이 배어있다.
좋은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목재가 필요하다. 홍천참숯은 인제, 양구, 홍천 등지에서 자란 굴참나무와 굴피나무 등 참나무류의 목재만을 사용하여 전통재래식 가마에서 7일정도 탄화시키고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정련시켜 참숯을 생산한다.
숯이란 “신선한 힘”이란 뜻을 지닌 우리말이다. 목재를 섭씨 600~900도의 온도에서 일차적으로 탄화시킨 것을 말하며, 맛과 냄새가 없다.
숯은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하는 기능을 가졌는데 옛날 우리 민족은 그걸 알고서 간장을 담글 때는 숯 몇 덩어리를 간장독에 띄웠다. 또 아기가 태어난 집 문간에 금줄을 걸 때는 숯을 끼우고, 아기가 첫 외출을 할 때도 이마에 숯검정을 묻혔다. 숯의 검은 색에는 더러운 것을 물리치고 주변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백초상’, ‘송인묵’의 이름으로 약재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숯에는 음이온을 증가시키는 작용이 있고 원적외선 방사 효과, 전자파 차단 및 공기정화 작용, 정수·정화 탈취 작용, 항균 및 해독 효과, 조습 효과 등 다방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숲을 만드는 과정에서 활성탄 숯가루와 목초액을 얻을 수 있는데 친환경 농자재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홍천참숯가마를 지나면 백이동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숯가마 뒤의 ‘동막골’을 지나 ‘장재울’과 ‘정골’로 이어진다. 정골에서는 ‘절골’로 이어진다. 절골은 넓은 버덩을 이루고 있고 마을사람들이 고사리밭이라고 한다.
‘안산골’로 들어서는 비포장 도로는 가리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오지의 멋을 볼 수 있다.
‘사태골’ 어귀의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 먹는다. 조금 더 올라가면 ‘숯가마골’이 이어지는데 아마도 백이동어귀의 홍천참숯이 이곳의 명성을 이어가는 듯싶다.
‘세종골’, ‘닭바우골’, ‘딸기골’, ‘참외골’을 지나면 백이동의 뱀막인 ‘안골’로 이어지고 왼편쪽으로 임도가 ‘변가터’, ‘장재울’, ‘품걸리’로 이어진다.
딸기, 참외 등 먹거리가 붙은 골짜기를 만나니 군침이 돈다. 이제는 내려오면서 덩굴딸기와 오디를 따먹으면서 이 계절의 맛을 즐겨야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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