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대1리 ‘벌말’에서 개울과 함께 이어지는 길을 따라 ‘구마니(구만리)’로 내려온다.
개울가에 서있는 소나무는 푸른 그림자를 물속에 드리우고 물소리에 몸을 흔든다.
물은 그림자 하나 실어 나르지 못하고 그림자 주변을 맴돈다.
시간은 역사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간다. 들녘의 더덕밭에서 향 짙은 더덕냄새가 난다.
마을의 특용작물인 더덕은 온 들녘을 푸르게 물들인다. 개울 건너 ‘큰박골’ 어귀부터 ‘노재이(노장골)’, ‘붉은대기’, ‘솔재이’로 이어지는 뜰과 ‘행인나들이’에서 ‘샘통골’ 어귀 ‘큰말고개’로 이어지는 ‘행인교뜰’은 전부가 더덕 밭이다.
그러나 6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마을 청년들의 희생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구마니 마을 공원’ 화단에 서있는 ‘자유수호희생자추모비’는 당시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대변하고 있다.
때는 1949년 7월14일. 6·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은 전쟁준비를 마치고 게릴라와 정탐대를 침투시켜 남한의 동향을 살피는 등 남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게릴라들을 남파하여 남한의 정세를 정탐하였는데 그들의 한 무리가 가리산을 넘어 ‘야시대 가마대기’에서 숨어 있었다. 연락을 받은 홍천경찰서 기동대(기동대장 민중기) 70명과 야시대의 한청년단원 40여명과 합세하여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망을 보던 게릴라를 발견하고 사살하자 나머지 무리들은 ‘가리산’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고 게릴라들의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자 야시대 마을의 한청년 단원들만 곳곳에 보초를 세우고 홍천기동대는 철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밤 열시 쯤 게릴라들은 ‘가마대기’ 아래 ‘양지말’에서 보초를 서던 마을 청년을 체포하여 암호를 알아낸 뒤 곳곳에 잠복하여 보초를 서던 마을의 한청년 단원을 칼로 목을 베는 등 살인을 저질렀다.
그 당시 보초를 서다 현장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13명이고 부상당한 분들도 22명에 이른다. 당시 부상당한 분들은 대부분 작고하셨지만 ‘행인교뜰’에 살았던 ‘김난수(84. 홍천읍 연봉리)’씨는 지금도 당시의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 ‘큰박골’ 어귀에서 보초를 서던 김난수씨는 목덜미를 칼에 맞아 논두렁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게릴라들은 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다리를 내리찍고는 ‘큰말고개’, ‘더덕골’ 어귀로 갔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김난수씨는 몇 번이나 보훈처에 보훈대상자 신청을 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1999년 야시대리 자유수호희생자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7월13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그러나 자식을 잃고 아비를 잃은 가족들의 아픔은 형언 할 수 없이 크다.
야시대 구마니 마을공원내의 추모비를 돌아 내려오면서 내일이 현충일임을 생각한다.
막연히 하루 쉬는 날이라는 생각보다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희생한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하는 날임을 되새겨 본다.
‘빛난동산’ 안내판이 서있는 ‘큰박골’ 어귀까지 내려왔다. 다리 건너기 전 길옆에는 양계장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빛난동산 노인복지시설이 있다. 이곳이 김난수씨가 잠복하여 보초를 서다가 변을 당한 곳이다.
‘큰박골’은 골이 깊은 골짜기다. 그러나 골짜기 안으로 들어갈수록 수목이 우거지고 길은 사라진다.
골 어귀에는 ‘버드나무골’이 있고 좀 더 올라가면 ‘돼지골’이 나온다. 안으로 이어지는 ‘체주나무골’과 ‘서덕골’을 지나 ‘매주나무골’로 들어서면 골막이 나온다. 골막은 ‘바른골’이다. 등성이를 따라 오르면 ‘찰무랭이’ 능선으로 이어지는 가리산 줄기다.
큰박골 어귀에서 이어지는 더덕밭이 ‘행인교뜰’까지 이어진다.
‘행인교’는 야시대 개울에 놓여있는 다리다. 예전에는 나무로 놓아 목다리였다고 한다. 또한 ‘어여골’ 어귀에서 ‘철정’으로 가던 큰길이었다. 지금도 ‘큰말고개’를 따라 경운기나 사륜차들은 넘어 다닌다.
‘행인교’는 야시대의 중심지였다. 주막과 가게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철정’이나 ‘늘목’에서 장을 보러 다니던 사람들이 꼭 거쳐 갔던 길목이었다.
행인교는 ‘큰말고개’로 이어진다. 철정에서 ‘부목골’을 돌아 ‘새말’로 이어지는 ‘작은말고개’가 뚫리기 전까지 홍천에서 인제로 가던 합승도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따라서 야시대로 이어지는 길도 행인교를 건너 ‘샘통골’ 어귀를 지나 ‘큰박골’, ‘노재이(노장골)’, ‘붉은대기’, ‘솔재이’, ‘선가래터’, ‘귓말’로 돌아 다녔다.
그 길은 지금 ‘구미말(귓말)’의 ‘두멍소’ 아래 보에서 시작되는 봇물이 나있다.
‘성산 새말’에서부터 ‘벌말’로 이어지는 길은 일제 강점기 때 생긴 길이다.
‘벌말 안골’의 굿당 앞 ‘큰미룽골’의 금광을 개발하면서 신작로가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큰미룽골’ 어귀에는 금광굴이 남아있고 당시에는 금맥을 발견하여 채광을 하면서 전기도 들어왔다고 한다.
‘행인교’를 건너 ‘큰말고개’를 걷는다. 길은 흙길이 좋다. 발바닥에 와 닿는 촉감이 부드럽다.
그러나 누군가 버리고 간 건축물 쓰레기가 눈에 거슬린다. 버리면 그만일까?
‘큰말고개’ 어귀에서 ‘더덕골’로 들어선다. 더덕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품걸리 막골’ 어귀의 ‘말거리’에서 살던 ‘최계순(69. 공작산더덕농장 대표)’씨는 이곳에 터를 잡고 더덕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잠업을 시작했으나 지역 특성에 적합한 품목으로 더덕을 선택해 더덕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더덕골’은 최계순씨의 더덕 농사의 교과서였다.
‘더덕골’에 들어가 향 짙은 더덕의 토양과 주변 환경 등 생태조건에 맞춘 신 더덕농사법을 터득하여 1999년 품질인증을 획득하고 매년 6만평에서 100여톤을 생산, 백화점 등에 납품해 연간 4억원의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 고품질 재배기술을 도내 농가에 보급해 다른 농가의 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더덕’은 양유, 사삼, 백삼이라고도 부른다. 더덕은 숲속에서 자란다. 뿌리는 도라지처럼 굵고 식물체를 자르면 흰색의 즙액(汁液)이 나온다. 잎은 어긋나고 짧은 가지 끝에서는 4개의 잎이 서로 접근하여 마주모여 난다.
뿌리 전체에 혹이 많아 마치 두꺼비잔등처럼 더덕더덕하다고 해서 ‘더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봄에는 어린잎을, 가을에는 뿌리를 식용한다. 생약의 사삼(沙蔘)은 뿌리를 말린 것이며 한방에서는 치열(治熱)·거담(祛痰) 및 폐열(肺熱) 제거 등에 사용한다.
한방에서 사삼(沙蔘 더덕)은 모래땅에서 서식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산삼에 버금가는 약효가 있다하여 오삼 중의 하나라 한다. 오삼은 인삼(人蔘), 현삼(玄蔘), 고삼(苦蔘), 단삼(丹蔘), 사삼(沙蔘)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더덕의 약효는 ‘본초강목’, ‘신농본초경’ 등에도 기록이 되어 있으며 사포닌, 인우린 등이 들어 있어 비(脾), 위(胃)를 이롭게 하고, 폐와 간에도 영향을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천 야시대의 더덕은 입소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올해로 36년째 더덕농사를 짓고 있는 최계순씨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그 향과 맛이 산더덕과 다르지 않아 단골이 되었다 한다.
홍천 내면 운두령과 내촌, 두촌 등 해발 700m 이상되는 지역의 더덕농장에서 향 깊은 더덕을 재배하고 있다.
최근에는 저지대에서도 향 짙은 더덕을 생산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해 ‘홍천 야시대 더덕’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바람이 불자 줄기 하나가 부러졌는지 더덕냄새가 진동한다.
‘행인교’를 건너 ‘어여골’로 들어선다. 이름이 예쁘다. 마을에서는 ‘외골’로 부르는 작은 골짜기다. 골 둔덕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골안으로 들어서는데 트럭이 올라온다. 트럭을 따라 부랴부랴 골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분지가 나타난다.
어디선가 구수한 찐빵 냄새가 난다. 어려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냄새다. 무작정 길만 따라 들어 왔을 뿐인데 너무 반갑다. 이곳이 바로 입 소문난 빵공장이구나 생각하며, 좀 늦는다고 집에 전화하려니 통화권이탈이다.
산이 에두른 작은 분지에서 양지쪽에 자리 잡은 집 문을 두드리자 하얀 가운을 입은 아저씨가 나오신다. 길 따라 들어왔다 하니 들어오란다.
고유의 맛과 환경을 생각하는 ‘봉식품(대표 김봉석)’ 책임자라며 사장이란 명함을 꺼리신다.
‘봉식품’은 한살림의 회원 업체다.
친환경농업을 해오면서 2004년 단호박찐빵을 시작으로 한살림에 단호박술빵, 냉동감자떡, 보리찐빵을 공급하고 있다.
봉식품의 모든 재료는 한살림 생산자들이 재배하여 기른 우리밀, 단호박, 감자가루, 찹쌀, 보리쌀,녹두, 강낭콩, 소금 등을 구입하여 직접 만든다.
물론 보존재(방부제)와 색소제, 유화제 등의 화학첨가제와 동식물성 유지방(마가린, 버터, 우유, 계란) 사용을 금지하고 또한 환경호르몬을 유발하는 자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모든 것을 100% 국산 원자재를 사용하여 전통방식으로 만든다.
이 땅의 환경과 가족의 건강 그리고 고향의 땅을 정직하게 지키는 농민을 위하여 한살림운동에 동참해달라며 찐빵 한 접시를 내놓는다.
한 입 물자 단호박의 깊은 맛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어여골’을 내려오면서 맛을 찾아 여행하는 친구들에게 홍천의 먹을거리 지도를 만들어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원평’으로 들어섰다.
‘원평’은 성산 땅이다. 마을에서는 그 경계를 분명히 한다. ‘원토골’은 성산과 야시대를 가르는 골짜기이다. 어여골 아래로 ‘작은어여골’, ‘반작골’이 마을 뒷밭과 닿아 있다.
가리산 약수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아랫광산골’을 지나 ‘늘목’, ‘무지기’를 지나 ‘번개터’ 개울과 합치고 다시 ‘무레이’ 개울과 합쳐 ‘선가래터’, ‘벌말(벌촌)’을 지나 ‘행인교뜰’을 적시며 ‘안산’ 기슭을 파고 돌면서 ‘원평’ 뜰을 감고 돈다.
야시대 골짜기는 깊다. 지형이 야(也)자를 닮아 야시대라 부른다. 그런 까닭에 숨은 골짜기가 많다.
아직은 외지인의 왕래가 많지 않은 오지에 속하지만 산을 믿고 하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의 순박함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오지를 기행하면서는 편안함을 바라지 말라. 특별한 것을 꿈꾸지 말라. 오지는 눈에 띌만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하늘도 한뼘 만큼 열려있거나 흙길이거나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자유로워 보이는 곳이다. 더러는 뱀도 만날 수 있고 어슬렁거리는 개들도 따라다닌다.
그러나 문명의 그늘에서 비껴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고, 목마르면 그냥 엎드려 마실 수 있는 개울과 맑은 바람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바쁜 것은 나그네의 발길이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면 오지여행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야시대’를 돌아나와 ‘원평’으로 들어섰다.
‘원평’ 뜰은 넓다. 원평은 서원이 있었다 하며 고을 원님이 행차할 때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길 양편으로 펼쳐진 논에서는 모살이를 끝낸 벼들이 제법 푸른 물기를 머금고 있다.
‘원토골’ 어귀에 경로당이 있고 원토골로 들어가면 시골풍경을 즐기러 내려온 백발의 노인이 살고 있다.
골안으로는 ‘진골’로 이어진다. 원토골에 살던 사람들은 원토골 어귀에 모여살기도 하고 대처로 나갔다. 원토골 안으로 들어가면 ‘석장골’이다. 석장골까지 가다보면 왼편쪽의 ‘진골’과 ‘바른골’을 지나게 된다. 석장골 골막에서 능선을 오르면 ‘백이동’이나 ‘안골’로 이어진다.
원평에서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은 ‘광대’라고 한다. 그 내막은 알 수 없다.
원토골 아래 사격장은 둔덕을 이루고 있으며 원평뜰을 가로질러 개울로 나가면 제법 큰보가 있다. 원평에서는 ‘어귀소보’라 부르지만 ‘발담’, ‘된가람’,‘구우럼’, ‘일건’등 성산 본부락에서는 ‘구우새보(귀새)’라 부른다.
‘구우새보’는 원평 뜰을 가로질러 ‘두멍소’ 바위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데 바로 바위 사이를 ‘귀새’를 놓아 물을 끌어갔다 한다.
‘귀새’는 홈통의 강원도 사투리이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홈통(물이 흐르거나 타고 내리도록 나무나 쇠붙이따위로 만든 물건)’을 말한다. 나무에 홈통을 파서 돌이나 바위 등으로 물줄기를 트기가 힘들 경우 물을 대는게 나무수로이다. 바로 이 나무수로를 ‘귀새’라고 부른다.
지금은 ‘두멍소’를 지나 큰 골짜기를 건너는 시멘트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간다.
‘구우새보’ 어귀에서 보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사격장아래 ‘우물골(정동)’이 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 흘러 붙여진 골짜기다. ‘우물골’ 아래는 ‘거리나무골’이다
‘원평’ 뜰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은 44번국도 밑을 지나 ‘작은말고개’ 밑을 돌아 흐르는 야시대 개울을 건너게 된다. 야시대 개울물은 ‘큰골’ 개울과 합쳐져 ‘두멍소’를 이룬다.
야시대 개울에는 두멍소가 많다. 그만큼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바위를 만나면 두멍을 이루며 흘러 내렸다 한다.
‘두멍소’는 마을의 밤낚시 터였다. 지금은 다슬기를 줍는 사람들이 물가를 맴돈다. ‘큰골’과 합쳐진 물은 ‘새말’과 ‘발담’ 사이를 흘러 화양강에 몸을 싣는다.
떠나가는 애인을 바라보듯 달포가까이 함께 해온 야시대 개울물을 바라본다.
기억이나 하라는 듯 나뭇잎 배를 만들어 띄운다.
가서 다시 돌아올까?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간은 물처럼 흘러갈 뿐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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