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무르익어가는 오월 하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나라,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날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이 간간이 불었다.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자던 그 뜻이 살아나고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자던 그 꿈이 다시 부활하여 함께 더불어 행복할 수는 없을까?
‘야시대’ 길을 가면서 삶의 이면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갈공터’에서 내려와 다시 ‘변가터’로 올랐다.
최근에 운수납자(雲水衲子) 한분이 도굴을 짓고 수행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양지말’을 돌아 ‘무래이’로 들어설 지음 ‘변가터막국수’집이 보인다. 마당에는 함박꽃나무가 하얀 꽃을 터뜨리고 작은 연못에선 송어가 놀라 몸을 숨긴다.
‘변가터’에서 살다가 화전정리로 이곳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다가 산막에서 먹던 막국수가 생각나 해먹던 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막국수집을 열었다고 한다.
오고 가는 발길이 뜸한 지역이라 문간에는 벨을 세번 누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세번 누르니 옥상에서 주인아저씨가 대답한다. 투병 중이라 거동이 불편하다. 옥상으로 올라가 ‘변가터’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꺼내자 삶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비포장도로로 남아있던 ‘더래이’ 구간에 확포장공사가 시작됐다. 계곡으로 바위가 굴러 내리고 산을 깎아내리는 기초공사다. 조만간 길이 넓어지고 좋아지겠다.
‘품걸리’ 다리를 건너면 ‘무지기’다. 춘천 땅이다. 오래전에 포장된 길이 ‘품걸리’로 이어지고 둔덕을 올라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변가터’다.
이 골짜기가 ‘변가터’가 된 데는 비석이 한 몫 한다. 오래 전에 ‘변가터’ 길 어귀에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고 한다. 변가네가 이곳에 들어와 개간하였다는 내용의 비석인데 장마에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골짜기를 ‘변가터’라고 부른다고 한다.
‘변가터’길은 임도이며 비포장도로다. 토굴을 찾아 올라가는 발길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길과 함께 동행하는 계곡은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물소리만 들려온다.

나무는 나무의 길을 가고 물은 물의 길을 간다.
나도 마음대로 간다
아니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하늘이 따라 오고 땅이 따라 온다.
그렇구나 나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모두 더불어 가는 것이구나.

그게 사람처럼 사는 것임을 안다. 그게 행복임을 안다. 사람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발원을 안고 먼 길을 가는 것이다.
물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는 들려온다. 보인다고 전부가 아니듯이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바람을 보지 못했지만 바람의 존재를 인정한다.
계곡으로 내려가 물과 숲의 그늘 속으로 따라 오르기로 했다.
갈나무와 물푸레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길 사이사이 함박꽃이 수줍은 듯 드문드문 꽃송이를 매달고 아카시와 쪽동백이 짙은 향을 내뿜으며 꽃숭어리를 늘어뜨린다. 뿐만 아니라 층층나무가 꽃방석을 깔아놓은 듯 층층이 옅은 베이지색의 꽃을 피워 올린다.
어디만큼 올랐을까? 폭포소리가 들린다. ‘용소’가 가까워지는가 보다. ‘용소’는 물굽이가 세번 폭포를 이룬다고 했는데 내 눈에는 한줄기의 폭포만 보인다. 장마에 묻혔는지 모른다.
‘용소’에서 다시 길로 올라섰다. 길섶에는 나물 천지다. 배낭을 메고 허리춤에는 전대 같은 가방을 멘 사람들을 만났다.
나물 많이 했냐고 물으니 나물이 없다고 한다. 내 보기엔 길가에 널린 것이 다 나물인데 찾는 나물이 따로 있나 보다.
‘용소’에서 한함 올라가면 ‘바람부리’다. ‘잘뚜매기(잘록하게 굽이진 지형)’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변가터’의 반이라고 한다.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다. 장을 보러 다니던 시절, 변가터 아이들은 다 같이 모여 서낭당까지 마중 나오곤 했다. 무섭지도 않은지 구나무(갈나무) 아래서 숨바꼭질을 하며 기다리다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면 내쳐 달려와 장 보따리를 받아들고 갔다고 한다.
서낭나무를 지나면 ‘여우골’이다. ‘여우골’은 길이 없다. 그럼에도 그늘진 비탈이라 심마니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골이라고 한다.
‘귀잉(구유)골’은 귀잉(구유)처럼 생긴 바위벼랑이 어귀를 이루고 있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품걸리 막골’로 이어지는 임도가 나온다.
어느새 칠부 능선 까지 올라온 듯하다. 골짜기도 갈라지고 물줄기도 갈라지고 가늘어진다. 딱히 골짜기는 아니지만 합수의 머리를 이루는 이곳을 중심으로 왼쪽은 ‘장자울’과 오른쪽은 ‘두멍안’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나온다.
‘두멍안’으로 들어서는 임도 입구에는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다. 임도는 ‘고약골’을 지나 ‘품걸리 막골’로 이어진다.
‘두멍안’은 변가터의 중심이었다.
집들도 많이 모여 있었고 특히 ‘백림분교’(柏林分校:1976년 폐교)가 있었다. 합수머리를 중심으로 아랫말, 윗말에서 50여명의 아이들이 다녔다.
운수납자(雲水衲子)가 토굴을 짓고 수양하는 곳은 바로 ‘두멍안’ 어귀에서 오백보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판자에 관음선원(능조스님)이라 쓴 푯말이 엉겅퀴와 같이 서있다. 스님은 출타중이시고 여기가 토굴이라는 걸 말하려는 듯 풍경(諷經)이 운다. 여기저기 쌓아놓은 장작더미와 벽에 세워놓은 삽이며 괭이, 톱 ,낫, 도끼 등이 이곳의 삶을 보여준다.
뒤뜰과 앞뜰에는 밭을 일구어 고추, 파, 상추 등 골고루 심어놓고 돌배나무 아래는 토종벌통을 놓았다. 또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태양열 전지를 세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선원 뒤쪽 둔덕이 학교 터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돌배나무와 버드나무, 뽕나무, 잣나무 등은 아마 기억하리라. 세월만큼 굵었고 왼쪽 고라데이에 남아있는 우물에는 그때처럼 시원하게 샘이 흘러나고 있었다.
이 샘이 ‘변가터’ 계곡의 발원수가 된다. 실제로 ‘두멍안’은 샘터 위쪽 골짜기이고 ‘이문안’과 ‘홀록골’이 이어진다. ‘홀록골’은 ‘풍천리 치락골’로 이어진다.
능조 스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정년퇴직하고 수행차 내려오신 처사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그냥 단촐하게 혼자 몸이나 누울 정도의 토굴을 지으려고 했는데 터가 너무 좋아 납자들의 참선도량으로 만들려고 계획을 바꾸었다고 한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출가한 능조스님은 ‘강진 백련사 무문관’을 비롯해서 제방의 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했으며 ‘불국사 석굴암’에서는 하루 15시간 천일 정진기도를 회향했다고 한다.
수행의 참뜻은 깨어남이다. 참선과 염불수행은 깨어남의 발로라고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밝음이 현전하는 상태에서 모든 경계를 관찰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고정관념을 여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도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나와 너, 나와 우주 등 이 세상은 변화와 관계의 연속이기 때문에 연기법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지혜로운 눈이 곧 깨어있는 눈이며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 그 자체가 불국토라는 것이다.
깨어남이란 습관(업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둠에로의 습관이 아닌 밝음에로의 습관을 말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而)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늘 변하며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 고정불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면 매사에 초연해 온갖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처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산문을 나섰다. 발걸음이 가볍다. 내리막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변가터’에서 ‘무지기’로 ‘무지기’에서 ‘더래이’를 거쳐 ‘무래이’로 내려오는 중간쯤에 ‘성강사’라는 절이 있다.
산비탈에 터를 내고 최근에 불사를 이룬 듯하다. 목탁소리도 인기척도 없다. 제비나비와 벌들이 날개를 치며 오가고 법당 근처에 핀 꽃들이 법문인듯 향기를 내뿜는다. ‘멱재’ 들머리에서 ‘갈궁터’를 올려다보고 연못을 들여다본다. 장구애비가 놀란 듯 숨는다.
‘구미말(귓말)’은 야시대2리 초입의 마을이다. 산자락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을 따라 길이 휘돌아 이어지고, 드문드문 집들이 자리한다.
‘멱재’ 어귀에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능선은 ‘안산’이라 한다. 다리를 건너면 길가에 ‘박옥선(71)’씨가 산다. 일흔한살의 반장이다. 마을에 사람이 없다보니 돌아가며 반장을 보는 실정이라며, ‘무래이 찰무랭이’에서 뜯어온 참나물을 다듬고 계셨다. 마을에 놀만한 데가 있냐고 물으니 ‘두멍소’를 가리킨다. 바위 밑을 휘감고 도는 물이 시퍼렇고 지금도 두길이 넘는다며, 한여름 밤에는 메기 낚시꾼들로 쉴 날이 없다고 한다. ‘두멍’이란 큰 가마나 독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두멍소’ 아래 봇물은 ‘선가래터’로 흘러가고 보 아래는 물고기가 꼬이는 곳이라며 한번 놀러오란다. 특히 ‘두멍소’를 중심으로 ‘물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멍소’에서 봇물을 따라 ‘선가래터(선가네터)’로 들어선다. ‘선가래터’는 선씨가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살았다는데서 유래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선씨는 앉은뱅이였다고 한다. 하여 가마에 실려왔는데 이곳 어딘가에서 맑은 샘물을 먹고 휴양을 하면서 뜻밖에 다리가 펴졌다고 한다.
샘물을 찾아 나선다. ‘선가래터’에는 집이 세 채 있다. 그 중 한집은 빈집이다. 빈집 옆집에 들어가 문을 두드리니 할머니가 나오신다. 발가락하나에 붕대를 감고 있다. 생 발을 앓고 있다며 올해는 산에도 못 갔다고 하신다.
이곳에 허리 병에 효험이 있다는 좋은 약수를 찾아왔다고 하자 산모롱이를 가리킨다. 잣나무 밭 사이 어디쯤이란다. 봇물을 따라 산모롱이를 돌아 산으로 올라갔다. 풀섶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지지하게 물이 고인 웅덩이를 찾았다.
이곳이다. 물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메워져 물을 마실 수가 없다.
한때는 젊은 새댁이 초막을 짓고 술장사를 했다 한다. 저녁마다 사내들이 몰려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는지 어느날 소리소문 없이 새댁도 떠나고 샘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도 뜸해졌다.
다리를 건너 큰길로 나와 ‘절골’로 들어섰다. 절골은 골이 깊다. 안으로 들어가자 늙은 내외가 한밭 가득 무성하게 자란 개망초를 뽑고 있다. 뭐라도 심으려고 밭을 갈아달라하니 풀이 커서 갈 수 없다 하여 뽑는다고 한다. 키가 크면 로터리에 휘감겨 갈 수 없어 그러는 것이니 예초기나 낫으로 잘라주면 거름도 되고 갈 수 있을 거라고 하자 차를 몰고 집으로 내려간다.
골막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쪽으로는 염소농장이 있다. 풀을 뜯으면서도 음메에 음메에 우는 염소들. 선문답이다. 산비탈 바위벼랑을 오르며 풀을 뜯고 있다.
골막에서 경운기가 내려온다. 밭에 고추를 심고 내려오는 중이라며 뒤에 탄 아낙이 웃으며 소리친다. 경운기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려면 악을 쓰듯 소리쳐야 한다.
골안은 ‘터버덩이’와 ‘갈공터’로 갈라진다. ‘갈공터’로 이어지는 골은 ‘도화동, 복사골, 복상나무골’이라고 하며 ‘갈공터’는 그 위에 자리한다.
‘절골’의 절터는 ‘터버덩이’에 있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밭을 갈다보면 구운 기와가 나온다고 한다. 골 막창은 ‘층층나무골’을 지나 ‘가마봉’으로 이어진다.
‘절골’ 어귀는 ‘구렁말’이고, 안골 어귀와 개울 건너 ‘솔재이’, ‘붉은대기’, ‘노재이’를 합쳐 ‘벌말’이라고 한다.
‘벌말’에는 소문난 막국수집이 있다. 문간에는 소 구유에다가 꽃들을 심어 단장을 했고 문에는 발을 내렸다. 정자가 있는 시골스런 맛이 난다. 맛 뿐만 아니라 한 그릇을 둘이 나누어먹을 만큼 푸짐하다.
‘벌말’에는 ‘벌촌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폐교되고 그 터에 게이트장이 있다.
1953년 2월19일 화촌초등학교 벌촌분교장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같은 해 4월, 2학급으로 편성되어 개교됐다. 화전민과 주민들로 북적했던 마을에 학교가 필요했고 이에 뜻을 모은 주민 몇몇이 부지를 기증해 공사에 착수, 인근 미군 부대의 협조로 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화전정리와 이농현상으로 학생 수가 감소하여 1984년 3월1일자로 화촌초등학교 벌촌분교장으로 되었다가 1997년 2월1일 학교는 마지막 졸업생 2명을 배출과 함께 폐교되었다. 그리고 2003년 학교는 철거되었다.
다리 건너 ‘솔재이’는 ‘솔무정’이라 한다. 개울가에 큰 소나무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둔덕을 이루는 산등성이가 벌거벗어 비만 오면 붉은 진흙이 흘러내려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향 짙은 더덕이 잘 돼 농사짓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홍천 더덕은 향이 깊다. 자연환경에 맞는 토양에서 재배하기 때문이다.
‘노재이’, ‘붉은대기’, ‘큰박골’, ‘큰말고개’로 이어지는 더덕 밭을 걸어 나오니 몸에서 더덕냄새가 진동한다.
‘안골’은 ‘벌말’ 안쪽에 이어지는 골이다. 어귀에 ‘소주골’, ‘품목골’, ‘작은미룽골’을 지나면 ‘목련사’라는 기도도량이 있다. 일명 ‘굿당’이다. 가리산신을 비롯하여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다. 징이 울리고 신을 부르는 무당의 주술이 구성지다.
법당이 안골의 마지막 집이다. 그러나 골막으로 이어지는 계곡에는 무당개구리가 놀란 듯 몸을 감추고, 나물꾼들이 참을 먹고 있다.
골안으로 들어가면서 ‘큰미룽골’, ‘높은터’, ‘중방바위골’과 ‘섬바우골’로 갈라지고 ‘섬바우골’ 어귀에서 고개를 넘어 ‘백이동’으로 가기도 했다.
안골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야시대개울과 합쳐지면서 ‘두멍소’를 이룬다. ‘두멍소’ 위로는 ‘물안개소’와 ‘할미소’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의 수영장일 뿐만 아니라 한여름의 천렵장소였다.
벌말 뒷산에는 ‘곤드레골’이 이어진다. ‘소주골’에서 술을 마시고 ‘안골’에서 안주를 먹고 ‘곤드레골’에서 곤드레만드레 잠을 잤다는 어느 청산거사의 삶을 들먹이다가 자유수호희생자추모비 이야기를 꺼내자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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