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산은 신록의 콘서트다. 온갖 꽃들의 향연이다. 꽃밭이다. 진달래가 물들인 산기슭에는 철쭉이 한 풍경을 자아낸다. 철쭉이 붉게 타올라 봄의 절정을 이룬다.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마루가 노을처럼 붉다.
  가리산은 양쪽으로 큰 고개를 거느리고 저 홀로 우뚝 선다. 가리산 정상은 큰 능선을 내주고 능선마다 많은 골짜기를 거느렸다. 긴 능선 자락의 골짜기마다 마을이 들어섰다.
  ‘장구실골’ 어귀의 ‘큰평내’와 ‘차돌목이’에서 이어져 내리는 ‘작은평내’는 가리산 품안에 들고, ‘모로골’과 ‘향교골’, ‘흑둔지(자은리)’의 ‘미나리골’, ‘원동’의 ‘대대울’, ‘철정’의 ‘여내골’, 화촌면의 ‘야시대’, ‘늘목’은 가리산의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다.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오막살이에서 살았다. 가을이면 거두어들인 곡식을 가리가리 쌓아올렸다.
  가리산의 ‘가리’는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땔나무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둔 큰 더미’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또한 ‘산봉우리가 노적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가리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어린왕자에 나오는 모자처럼 생겼다.
  가리산(加里山)을 한자 풀이하면 의미는 달라진다. 가리(加里)는 ‘마을이나 거리를 더 한다’는 의미이다. 즉 ‘마을이 깊다’는 뜻이다. 
  ‘가삽고개’ 마루까지 이어지는 계단식 밭의 흔적이 남아있고, 마을사람들도 고갯마루까지 올라와 농사를 지었으며, 또한 드문드문 ‘마가리’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마가리’란 오두막을 말하며 북한말로는 ‘막처럼 비바람 정도만 막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꾸린 집’이다. 또한 ‘골짜기의 맨 끝자락’을 말하기도 한다. 
  가리산 골짜기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것도 한두 집이 아니다. 장사꾼들이 들어와 북적댔을 정도로 잡곡이 많이 났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몇 개 반을 이루었을 정도라 한다. 
  ‘가리산’은 영서 제일의 전망대이다. 동서남북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풍경이 아름다워서일까 누구 하나 글도 그림도 남기지 않았지만 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사람과 깊은 정을 나눈 산임에 틀림이 없다. 골짜기마다 전해지는 이야기도 전설도 많다.
  ‘한 천자 이야기’는 묘 자리에 얽힌 이야기다. 옛날 가리산(加里山 )기슭에 한(韓)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도승이 찾아와서 하룻밤을 묵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한씨 부부는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아들 방에서 같이 자도록 허락하였다.
  식사를 마친 도승은 자리에 눕기 전에 아들에게 달걀 세개만 달라고 하였다. 아들은 날달걀은 없고 참으로 먹으려고 쇠죽에 삶은 달걀이 있다며 내주었다. 도승은 달걀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아들이 자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들은 코를 골며 자는 체하자 도승은 삶은 달걀 세개를 들고 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들도 도승이 눈치 채지 않게 뒤를 따라 산을 올라갔다.
  도승은 삶은 달걀을 하나는 산 정상에, 하나는 산 중턱에, 하나는 산 밑에 묻고는 조용히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들은 도승보다 먼저 산을 내려와 자는 체하였다.
  도승도 방에 들어 자는 체 하며 무엇인가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동틀 무렵이 되자 산중턱에 달걀을 묻어둔 자리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정상에 묻어둔 달걀에서도, 산 아래 묻어둔 달걀에서도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누워있던 도승은 혼자말로 ‘축시(오전 1시~3시)에 울어야 제대로 된 묘 자리인데 축시 중에 울었으니 묘 자리가 맞긴 한데 시(時)가 맞지 않는구나. 천자는 못하고 임금은 하겠다’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도승이 떠나갔고 몇년 뒤 한씨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묘를 제일 먼저 운 산 중턱에 묻고 아들은 중국으로 떠났다.
  마침 중국에서는 천자를 뽑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천자를 뽑는 시험은 짚으로 된 북을 짚으로 만든 채로 쳐서 쇳소리가 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해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은 자신이 치면 꼭 쇳소리가 날 것만 같아 도전하였다. 아들이 짚으로 만든 채로 짚 북을 치니 정말 쇳소리가 났다.
  그리하여 천자에 오른 아들은 부친의 묘소를 찾기 위해 사신을 보내 부친의 묘소를 찾았으나 묘소가 한국에 있다고 전해지면 속국이 될까 두려워 ‘한국에는 지리산은 있어도 가리산은 없다’고 속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씨 묘소가 명당이라고 알려져 그 곳에 묻으면 후손이 출세한다고 해서 암매장이 성행했고 암장을 하다가 수많은 시체를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산삼을 캐러 가는 사람은 한 천자 묘소에 제를 드리고 벌초를 하기 때문에 묘가 묵는 일이 없다고 한다.
  또  ‘큰평내’에서 ‘판메디터(판메기리, 늘목, 널목)’로 가는 높은 ‘무쇠말재’는 옛날 이 일대가 큰 홍수가 나서 물바다가 되었을 때 무쇠로 배터를 만들어 배를 매어 놓았다 하여 무쇠말재라 하고,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다 죽고 송씨네 누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어느덧 오빠도 나이를 먹고 동생도 나이를 먹게 되자 결혼할 때가 되었으나 배필을 얻으려고 해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야, 이제 너와 나는 배필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도 없고 대가 끊길 것 같으니 씨라도 퍼뜨려야 한다. 맷돌을 하나씩 가지고 고리봉으로 올라가 굴려서 이것이 맞아 엎어지면 우리 둘이 사는 거고, 각자 가면 우리는 못 산다’
  하늘의 운에 맡기기로 했다. 오누이가 맷돌을 굴리니 이 맷돌이 산비탈 아래로 막 굴러갔다. 오누이가 내려와서 보니 맷돌이 딱 맞아 엎어져 있었다.
  ‘할 수 없구나. 너하고 나하고 살자’
  그리하여 이들 오누이는 함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 온다.
  ‘가삽고개’는 ‘큰평내’와 ‘가삽’을 넘나들던 고개로 ‘가삽’은 춘천시 북산면 물노리의 한 마을 이름이다. 가협리(加峽里)라고도 부르며, 가리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들어올 수 있지만 예전에는 모두 평내나 야시대, 풍천리, 원동으로 돌아 다녀야 했던 산골 중에 산골이었다.
  가리산 정상에서 바로 이어지는 골은 ‘성골’이다. 아직은 등산로가 개설되지 않았으나 골을 따라 내려가면 ‘비병초바위골’이다.
  무쇠말재로 접어들면 석간수 샘터길(가리산 약수)로 내려오게 된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흐리목골’과 ‘차돌목이’를 이루는 ‘수리봉’을 만난다. 등산로는 무쇠말재등을 따라 열려있다. 무쇠말재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에는 무쇠로 만든 말이 있었는데 어느날 엿장수가 가져갔다고 한다.
  가리산의 물줄기는 ‘비병초바위골’과 ‘무쇠말재’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만나 흐르다가 ‘가삽고개’의 ‘돌장작구렁’과 합수곡을 이루며 ‘큰장구실골’을 흘러내린다. 큰장구실골이 바로 가리산계곡이다.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다가 ‘용소폭포(가리산폭포)’를 만들어 낸다.
  ‘구멍바위’가 있다는 ‘작은장구실골’ 어귀의 지압로를 걸으며 피로를 푼다. 관리소를 지나며 ‘프랑스참전용사비’를 둘러본다. 가리산 부채뜰은 1951년 5월 미 2사단 23연대 소속 유엔군 프랑스대대 소속 지원병과 공병소대원이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관리소를 지나 ‘동막골’ 어귀 주차장에서 일행을 만나 용소폭포로 걸어 내려간다.
  매표소 아래쪽은 ‘작은동막골’이다. 맞은편은 ‘농바위골’ 어귀인데 골 안막에는 농처럼 커다란 바위가 우뚝 서 있다고 한다.
  ‘움묵골’은 골짜기가 움푹 들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어귀에 가리산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김용철(74)씨가 살고 있다.
  ‘가리산을 오르고 꼭 용소폭포에서 귀를 씻고 가라’ 한다. ‘그래야 가리산의 정기가 몸속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가리산폭포’라고 하는 ‘용소폭포’는 가리산의 또 다른 비경이다. 사방이 바위벼랑으로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가을에는 복자기나무와 지구자나무, 단풍나무가 아름다움을 더 한다. 10m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용소폭포 위로는 구름다리가 놓여있고 용소까지 이어지는 길이 나있다.
  길가인데다가 이정표도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가리산 입구 못 미처 왼편에 정자가 있는 곳이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가리산 정상과 폭포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마을에서 가뭄이 심해지자 용소에 호랑이 뼈를 넣고 기우제를 올리자 큰비가 쏟아졌다 하며, 최근에는 호랑이 뼈 대신 개를 잡아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소폭포에서 쏟아져 내린 물은 바위사이로 흘러내려가 ‘앞다리골’과 ‘고로쇠나무골’ 어귀로 이어진다. ‘고로쇠나무골’은 골이 깊다. 골을 따라 오르면 ‘솥골(소초골)’이 나오고 마가리에서 ‘가래나무송골’과 ‘농바위골’로 이어진다.
  골짜기는 신나무와 물푸레나무, 느릅나무, 황벽나무, 단풍나무 등이 숲의 터널을 이루고 있어 여름철 시원하고 조용한 물놀이 터가 된다.
  ‘큰평내’ 서낭당은 ‘무게골’과 ‘쉬엉골’ 어귀에 있다. 지금은 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물푸레나무가 신목이다. 개울 건너 ‘술농오지골’, ‘눈알바위골’, ‘굴바우골’과 송어장이 있던 ‘움묵골’을 지나면 ‘작은평내’ 어귀가 나온다.
  서낭당을 지나 내려오면서 ‘작은쉬엉골’, ‘큰밤나무골’, ‘작은밤나무골’, ‘큰자지방골’, ‘작은자지방골’을 지나 송어장을 지나면 ‘갈밭골’이다. ‘갈밭골’은 ‘모로골’의 ‘고갯골’로 이어지던 큰길이었다.  지금은 가리산으로 들어서는 큰길이 났지만 예전에는 역내리 평내에서 가리산 큰평내로 들어가는 길은 좁은 길이었다. 그러다가 ‘무쇠말재등’과 ‘판메기터’를 중심으로 중석광산이 개발되면서 큰길이 나게 되었다. 또한 ‘모로골재’를 지나면 경로당이 있다. ‘파골’은 큰평내 어귀의 첫골인데 고개를 넘으면 모로골 어귀의 ‘봇산골(보쌈골)’이다.
  ‘작은평내’로 들어섰다. ‘누더기골’이라 한다. 골막까지는 깊고 마가리에서 ‘차돌목이’를 넘으면 ‘야시대 물골’이다. 물골의 발원지는 ‘가리산 석간수’이다. 차돌목이에서 대능선을 오르면 ‘떡갈목’, ‘정자목이’, ‘수리봉’이 나오고 ‘정자목이’에서 ‘사냥봉’, ‘솥골(소초골’), ‘흐리목’으로 이어진다. 또 ‘차돌목이’에서 야시대 쪽으로 내려오면 ‘어동골’ 능선이 야시대 뒷능선으로 이어진다.
  ‘차돌목이’에서 내려오는 ‘작은평내’는 골짜기만도 스무 골짜기가 넘는다. 그중 이름이 남아있는 골짜기를 ‘작은평내’ 안막부터 찾아든다. ‘큰무성골’, ‘자작나무골(터골)’이 마주보고 있다. ‘자작나무골’로 들어서면 ‘엄나무골’이고 안막에서 보이는 봉우리는 ‘사냥봉’이다. 가리산에서 멧돼지사냥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 ‘작은무성골’을 지나 ‘큰어동골’과 ‘풀무덕골’이 마주하는데 ‘큰어동골’ 능선을 넘어 야시대로 넘나다녔고, ‘풀무덕골’에서는 쇠를 녹였다고 한다.
  다시 ‘작은어동골’을 지나 내려오면 ‘안서방해친골’과 ‘큰돌골’이 마주하고 조금 아래쪽으로 ‘사태골’과 ‘작은돌골’이 마주한다.
  그쯤에서 한참 내려오다가 ‘가는골’어귀를 지나 ‘성가마골’로 들어서게 되는데 안막으로 들어서면 ‘큰성가마골’, ‘작은성가마골’이 나온다. 또한 성가마골에서 능선을 넘으면 야시대가 나온다.
  ‘성가마골’에서 나와 내려오면 ‘곡아지골’과 ‘태비골(퇴비골)’이 마주한다. ‘증정박골’과 ‘능골’은 ‘곡아지골’ 어귀에서 조금 내려오면 나오는데 ‘능골’에서 고개를 넘으면 ‘갈밭골’ 어귀가 나온다.
  ‘능골 ’어귀에는 ‘천도교 가리산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21자의 주문을 외워 도를 깨닫는 수련법을 통하여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과 밖에 있는 한울님의 기운을 서로 통하게 해 자기가 한울님이라는 사실을 깨치게 하는 마음의 수도원이다.
  ‘능골’에서 구비를 돌아서면 ‘제천골’과 ‘천석골’ 어귀다. ‘제천골’은 골이 깊고 안으로 들어가면 ‘큰제천골’, ‘작은제천골’로 갈라진다.
  ‘작은평내’를 ‘누더기골’이라고 한 이유를 알듯 하다. 골짜기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골짜기가 누더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길고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사람의 기척이 두려워질 만큼 왕래가 없는 골짜기가 되었다. 
  작은평내 어귀의 ‘매봉재길’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창 물이 오른 나물을 뜯어 등짐을 지고 내려온다. 숲이 우거졌지만 나물만큼은 흔하다고 한다. 취나물, 참나물, 더덕, 으아리, 미나리싹(영아자)은 물론 고사리, 고비, 두릅 등 골고루 나물을 했다고 한다.
  시장기가 도는가보다. 두릅전이 먹고 싶어진다. 이참에 산 밑에서 미나리싹을 한줌 뜯었다. 상큼한 나물 쌈을 먹을 생각을 하니 걸음이 빨라진다.
  작은평내 다리를 건너 ‘쇠덕골’과 ‘터골’을 지나 ‘서낭당’까지 내려왔다. 돌 세개를 장승 옆에 놓고 침을 세 번 뱉었다.
  서낭당을 지나면 ‘역내리 평내’다. 좀 너른 버덩이다. 골짜기라야 개울 건너편의 ‘사당골’과 ‘승지골’, ‘옹망골’이 있을 뿐이지만 마을 앞으로는 큰 강(장남천)이 흐르고 뒤로는 가리산이 에두른 마을이다.
  폐교된 평내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2008년 7월19일에 개관한 ‘청소년수련원’이 있다. 야영장에는 울창한 잣나무 숲속에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36개의 야영시설과 극기시설물 및 인라인트랙 등이 있어 극기 훈련과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 특히 국도를 끼고 있어 접근성이 좋고 가리산을 등 뒤로 하고 있어 자연 속에서 펼치는 다양한 숲 체험 프로그램으로 여가와 휴식을 겸한 생기충전의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평내 어귀에서는 향토 음식점에서 막국수와 토종닭삼계탕과 산채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가리산을 내려와 돌아보니 가리산 삼봉이 수반처럼 떠오른다. 산이 사람을 품고 사람이 산을 찾아드는 산.
  가리산은 먼듯하면서도 가까운 첫사랑 같은 산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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