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할 가(加) 마을 리(里) 가리산.
가리산에 봄이 왔다.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땔나무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둔 큰 더미’를 뜻하는 순우리말로서, 산봉우리가 고깔 모양의 노적가리처럼 생긴 데서 이름이 붙은 가리산에 들어선다.
1,051m의 가리산은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와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를 경계로 하는 산이다.
햇살이 산마루를 넘는 여섯시쯤 가리산으로 들어섰다.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산의 아침을 맞이하려는 생각이다. 무작정 오르고 내려오는 산행이 아니라 산의 품에서 칭얼대는 별들의 노래와 휘파람새의 울음을 귀담아 듣고, 산의 어둠과 산의 아침을 이어가는 산의 고요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철정검문소를 지나 가리산 입구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가리산으로 들어서면 ‘홍천군청소년수련원’이 나오고,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가리산을 향하여 길을 오르다보면 서낭당이 나온다. ‘역내리’와 ‘천현리’의 경계를 이루는 서낭당이다. 서낭당은 성황당의 한글표기이다. 원래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신 신당(神堂)을 말한다.
성황당(城隍堂)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선왕당, 천왕당, 국수당, 국시당 등으로 불린다.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개 마루에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神樹) 또는 장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낭당은 지역 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시 석전(石戰)에 대비하여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마을수호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민간종교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서낭나무에 입던 옷의 저고리 동정이나 5색 헝겊 조각을 걸고 치병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거나, 새집으로 이사할 때 옛 집의 잡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옷을 찢어 걸어놓기도 하는 속신이 있다.
서낭당에 올리는 제의(祭儀)에는 마을수호와 질병의 예방을 위하여 마을 굿의 형식으로 해마다 지내는 서낭제와 잡다한 개인적 소망을 기원하는 개별적인 제의가 있다.
평내의 서낭당 신목은 느릅나무다. 서낭당을 지날 때에 누석단에 돌 3개와 솔개비를 얹어놓고 침을 3번 뱉은 다음 왼쪽 발꿈치로 땅을 3번 구름으로써 행로의 안전과 행운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느릅나무의 푸른 그늘과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면 멀리 가리산의 정상이 보인다. 여기서 오리쯤 더 올라가면 가리산 입구다.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에 들어서니 가리산휴양림을 찾아온 차들이 몇대 보인다.
주차장 아래 골짜기는 ‘작은동막골’이다. 주차장입구에서 관리소로 들어서는 길과 등산로로 이어지는 길이 나누어진다. 등산로로 들어서서 ‘큰동막골’ 다리를 건넜다. 큰동막골은 골이 깊고 안막에서 ‘등골산’으로 오르거나 능선을 넘어 ‘모로골’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작은장구실골’을 건너 ‘큰장구실’로 오른다. 관리소는 ‘작은장구실골’을 건너 둔덕에 자리한다.
‘가리산휴양림’은 등산과 휴식을 겸한 테마 휴양지이다. 꽃이름과 새이름의 펜션은 새의 노래 소리와 꽃의 향기에 취해보라는 의미가 담긴 듯하다. 방갈로 야영장과 취사장, 넓은 주차장, 텐트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다목적광장, 미끄럼틀 등의 놀이시설과 풋살장, 배구장, 족구장 등의 체육시설과 물놀이장, 구름다리, 야외교실, 건강지압로, 캠프화이어장, 씨름장이 마련되어 있어 가족 및 동호회의 모임 장소로 많이 찾는 산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햇살도 산을 넘어가며 눈시울을 붉게 적신다. 어둠속에서 산들도 푸른 눈을 뜨고 서로를 껴안는다. 금새 어두워진다. 가리산의 봉우리들이 머리를 들고 어둠위로 뜨는 별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일단 펜션에 들어 저녁을 먹고 밤 산책을 나왔다. 어둠 사이로 나무들이 걸어 나온다. 나무들이 내미는 작은 잎새에 이슬이 맺히고 달빛이 반짝인다. 달빛을 받은 개나리꽃과 산괴불주머니가 흰빛을 내뿜는다. 멀리 홀아비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소쩍새가 애달프게 운다. 산과 하늘의 경계일까? 무채색의 굵은 선 하나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살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으며 산 너머로 사라진다. 별이 쏟아진다.
시원하다 싶더니 서늘하다 이내 춥다. 홀아비새는 새벽까지 이어질 것 같다. 그때 건너편 펜션에 든 일행이 술 한잔 하라고 손짓을 한다. 산에 올랐다가 나물을 뜯고 준비해온 삼겹살에 복분자술이 있다는 것이다. 일년에 네다섯번은 가리산을 찾는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여섯시.
산은 안개가 깊다. 안개 속을 흐르는 것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와 계곡을 흘러가는 물소리다. 나무와 나무사이를 안개처럼 산책을 한다. 바람꽃을 만나고 흰제비꽃을 만나고 개별꽃을 만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난 가장 맑은 웃음이다. 웃음에서 향기가 난다.
안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푸레나무가 푸른 눈을 뜨고 참꽃이 붉은 입술을 연다. 눈발처럼 날리는 산벚꽃잎이 개나리꽃 위에 내려앉는다. 개나리 그늘 속에 산괴불주머니가 노란 향낭을 터뜨린다. 저만치 앉아있던 앉은뱅이꽃이 수줍게 고개를 든다.
가리산은 멀리 있어 더 푸르다. 푸른 봄 바다다. 푸른 향기가 출렁인다. 푸른 고요의 산이 새들을 불러 노래한다. 산은 제 몸에 품었던 눈물을 발치에 흘려보내며 바람의 노래, 물의 노래를 듣는다. 푸른 안개를 풀어 아침을 열고, 햇살을 받아들인다.
가리산은 큰 날개를 가졌다. 김광림 시인의 ‘산’을 가리산에서 다시 읽는다.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드려 있다가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속으로 간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 철학과 사색과 고독과 삶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듯 말을 아끼는 산.
멀리 가리산 봉우리가 수반처럼 떠오른다. 가리산은 넓은 하늘을 가졌다. 동서남북 탁 트인 가슴을 가졌다. 가슴을 펼치면 푸른 음악이 쏟아져 나온다. 길 없는 시간의 노래를 듣는다. 천년의 바람소리에 귀를 연다. 산은 책이다. 푸른 행간을 걸어가며 삶의 향기에 취한다.
나와 하룻밤을 보낸 ‘큰장구실골’ 계곡을 따라 길을 나선다.
산은 몸으로 보아야 한다. 산을 즐기려면 산을 알아야 하듯이 가리산 휴양림 숲 해설사 김효영씨의 숲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 올라갔다.
고추나무와 딱총나무가 꽃망울을 내민다. 병꽃나무는 가지마다 꽃망울을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바위 아래선 연분홍빛의 이스라지(물앵두)와 흰빛의 말발도리가 단장을 하고 서있다. 산기슭에서는 개복숭아꽃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온몸에 가시를 두른 음나무와 두릅은 총알 같은 새순을 밀어 올린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리를 건넌다. 다람쥐가 조르르 앞서 달려간다. 겨울에 숨겨놓았던 먹이를 찾는지 바위굴마다 들락거린다. 날다람쥐도 봄볕을 맞으러 산수유 나무를 기어오른다. 개별꽃이 작은 눈을 깜빡인다.
계곡에는 귀룽나무가 하얀 꽃을 피워낸다. 신록의 아침을 여는 꽃의 향연이다.
등산로로 이어지는 길섶에는 개별꽃과 졸방제비꽃, 남산제비꽃 등 봄꽃이 마중 나온 듯 한창이다. 제비꽃은 바이올렛, 반지꽃, 앉은뱅이꽃, 오랑캐꽃으로 불린다. 이름이 많은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합수머리까지 올라왔다. 여기서 ‘무쇠말재’로 오를 것이냐 ‘가삽고개’로 오를 것이냐 발길을 정해야한다. 무쇠말재골의 물줄기가 더 크지만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험해 ‘가삽고개’로 오르기로 했다.
‘가삽(加揷)고개’는 ‘큰평내(가리산 어귀의 마을)’에서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참배나뭇골’로 가는 큰 고개다.
고개길로 접어들자 온갖 참나무들과 물푸레나무, 느릅나무 숲이 이어진다. 새순을 내미는 나무들이 신비롭다. 봄을 여는 생장의 힘이 느껴진다.
완만한 고갯길 중턱쯤 올라서자 낙엽송 밭이다. 이곳에 낙엽송을 대대적으로 심은 까닭은 불이 나 황폐해졌거나 화전민들이 떠난 뒤 산림녹화사업으로 심은 나무들일 것이다. 이제는 하늘을 찌를 듯 자라 숲을 이루었다.
가삽고개를 오르면서 물줄기도 가늘어지고 또 너른 버덩에 물푸레나무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룬 지대를 오르게 된다. 가리산 계곡의 발원지면서 늪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삽고개의 완만한 경사지가 모두 인위적으로 꾸며진 듯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참나무 숲을 이룬 이색적인 정취가 느껴진다. 이곳은 한때 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돌담과 두렁은 이곳이 화전밭을 부쳐 먹던 흔적임을 말해준다. 마을사람들은 ‘가리산에서 나온 잡곡이 수백 가마가 넘었다’며 ‘가을이 되면 이곳에는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가삽고개로 오르는 이 구렁은 ‘돌장작구렁’이다. 완만한 경사지를 올라 능선에 들어선다.
참나무로 만든 나무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다리를 쭉 뻗고 눈을 드니 가리산 정상이 나무 사이로 비껴든다.
가삽고개등을 타고 오르는 길의 또 다른 손님은 노랑제비꽃이다. 고개 마루까지 노랗게 물들이며 피어나는 노랑제비꽃이 군락을 이루고 이제야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있다. 진달래가 지면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철쭉이 봄의 절정을 예고하고 있다.
능선에 올라서면 말 등을 올라탄 기분이다. 터널을 이루는 숲길과 발밑에 밟히는 낙엽이 푹신푹신하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갈나무 숲길은 가리산으로 이어지고, 다른 능선은 멀리 ‘새덕고개’ 쪽으로 향한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북산면의 마을들과 소양호수는 또 다른 풍경이다.
돌각사리가 조금씩 이어지고 샘터와 정상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2봉과 3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에 오르면 동서남북의 조망이 푸른 바다처럼 펼쳐진다. 능선과 능선이 이어지는 선의 아름다움과 초록으로 짙어오는 계곡이 담채화처럼 다가온다.
2봉에는 ‘큰바위얼굴’의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다. 1봉과 2봉사이의 천길 낭떠러지의 깊은 계곡에선 소양호의 푸른 바람이 올라온다.
가리산 정상을 오른다. 더 넓은 조망이 들어온다. 정상을 알리는 가리산 표지석이 서있고 삼각점이 박혀 있다. 강원 내륙의 고봉준령은 물론 멀리 소양강댐까지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강원도 제1전망대’라는 명성에 걸맞게 장쾌하고 아름답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무쇠말등’-‘수리봉’-‘차돌목이’로 이어지는 능선과 ‘가삽고개’-‘등골산’-‘동막골’로 이어지는 능선이 요람처럼 감싸 안은 ‘가리산휴양림’과 ‘평내’가 고요하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멀리 백우산, 백암산, 쇠뿔산, 가마봉, 응봉산, 점봉산, 운문산, 공작산, 오음산, 태기산, 연엽산, 대룡산, 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정상에서 ‘무쇠말재’로 향하는 내리막은 가파르고 바위길이다. 한발 한발 내려놓으며 ‘무쇠말재등’으로 들어서서 내려오다가 ‘샘터’로 돌아간다. 샘터는 ‘가리산약수’다.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샘물은 가랑잎을 타고 흘러내린다. 가뭄에도, 한겨울에도, 우기에도 샘물은 변함이 없이 목을 축이리 만큼 흐른다.
‘무쇠말재’를 넘나들던 광산꾼들과 ‘늘목’으로 넘나들던 사람들이 우연히 발견한 이후 ‘아들 낳는 물’이라고 하여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가리산약수는 ‘야시대’ 계곡의 발원지를 이루며 흘러간다.
정상에서 이어지는 ‘비병초바위골’은 이름처럼 아름답지만 아직 등산로가 개설되지 않았다. ‘비병초’는 홍천에서만 불리는 ‘비비추’의 다른 이름이다.
‘무쇠말재’는 길고 가파르다. 그러나 길을 따라 피어나기 시작한 철쭉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숲 사이로 피나물과 홀아비꽃대, 당개지치가 꽃을 피운다. 즐겁게 넘어지며 미끄러지며 내려와 다시 합수머리에 들어섰다.
합수머리에서 관리소까지 이어지는 트래킹은 가리산의 크고 작은 폭포와 계곡의 또 다른 비경을 엿볼 수 있다. 계곡 양편으로 피어난 말발도리 꽃이 마음속에 환하게 비쳐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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