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행은 ‘시골’부터 ‘복골’, ‘여시골’, ‘놋점골’을 돌아보는 여정이 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하늘이 맑은 아침, 카메라와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철정검문소에서 내렸다. 우선 ‘시골’을 찾아 올라간다.
철정검문소를 지나 팜파스휴게소 앞 ‘홍천향교터’ 못 미쳐 왼쪽으로 보이는 골짜기가 ‘시골’이다.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골짜기는 깊지 않지만 왠지 으스스 하다. 꼭 원한 깊은 영혼들을 만날 것 같다.
죽은 죄인들이나 처형당한 시체를 묻었다는 ‘시골’이다.
마을에서도 부르기 꺼리는 골짜기지만 골짜기는 남아 있고, 길이 있다.
예전에 두촌면장이 새로 부임해오면 길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다치’부터 ‘천감’까지 길은 똑바른 편이었는데 유독 이 구간에서 사망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그 자리가 ‘시골’ 어귀라는 이야기가 있고 또 그 자리에서 길 고사를 지냈다는 사실로 봐서 ‘시골’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고사가 아니었겠냐는 생각이 든다.
‘복골’을 가려면 ‘역내리 가래뜰’ 끝자락을 지나야한다. ‘홍천군지 역내리’에 대한 기록에는 ‘쇠덕(예전에 쇠를 캐던 곳)’이란 마을이 있다하여 수소문해 보았지만 마을에서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새덕’(원동에서 춘천시 조교리로 넘는 고개)과 ‘서덕’(복골 안막의 너른 버덩)이 있음을 밝혀둔다.
향교골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역내리를 지나 강을 건너면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은 ‘철정리 복골’, 오른쪽은 ‘놋점골(놋적골)’이다. ‘철정뜰’을 둘러보면서 복골로 들어섰다.

복골로 들어선다
집집마다 외양간이 있고
외양간에는 누렁소가 매어 있다.
하루에 한번 걸인대로 소똥을 쳐내고 새 짚을 깔아준다.
논두렁을 걸어갈 때에는 껌 풀을 뜯어 씹고
찔렁순을 꺾어 먹는다.
버드나무 꺾어 호드기를 만들어 불기도 하며
환남이네 설익은 고야를 따 먹기고 하고
뱀딸기 멍석딸기를 따 먹는다.
봄이 오는 게
그렇게 가난하고 쓸쓸하게 남아있는 거름냄새
망우냄새가 싫었지만
비로소 땅이 가까워지는 나이인가
바람에 망우냄새 거름냄새가 풍기는
밭 언저리를 걸을 때면
양말을 벗고 바지가랑이를 걷고
망을 켜고 옥수수 감자 고구마도 심고
상추 쑥갓도 뿌리고
더덕, 도라지를 심고
이 봄 땅에 뭐든지 심고 싶다.
심을 게 없다면 그 속에 당장 나를 묻고 싶다
사람의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사람이 될까
- 복골에서 -

막연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진정성을 찾고 싶은 갈망이다.
‘복골’로 들어가면서 불현듯 어린 시절의 한 대목을 이끌어 낸 것은 더덕냄새와 거름냄새 때문이었다.
길가의 텃밭에 밑거름을 뿌리고 있는 할머니와 더덕 밭을 매고 있는 여든의 할아버지를 만났다.
고개 넘어 ‘드렁골 조상아터’에서 시집와 떠나지 못한 것뿐이라는데 왠지 그 삶에는 거름냄새가 눈물처럼 배어있다.
여든의 할아버지는 농사에 이골이 나 주름살이 깊어졌지만 묵밭으로 남겨지는 게 자신의 생 같아 지난해 더덕 씨를 뿌렸다고 한다.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이지만 몸에 밴 땅의 삶과 생명의 의미를 깨달은 부처 같은 마음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아니다. 산을 떠나지 않은 나무가 산을 지키는 것이다. 결국 농촌의 현실이지만 남부럽지 않은 부농을 키워가고 있다.
복골 어귀에는 아직도 서낭당이 있다. 금줄도 매어있다. 미신이니 샤머니즘이니 토템이즘이니 하는 말보다 더 간절한 것은 영혼의 믿음이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지만 날마다 지나다녀야하고 또 그 길을 믿어야 한다. 그 길은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며 밖으로 나가는 길이다. 길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알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안녕과 풍년과 무병장수의 제를 올린다.
서낭당을 지나 올라가면 ‘복골’과 ‘절터메기’로 갈라진다.
복골은 둔덕을 이루는 너른 밭이며 비가 와야 물이 흐르는 도랑 같은 골짜기가 있지만 어디를 파든지 물이 나서 곡식이 잘 된다고 한다. 복골 어귀는 복주머니처럼 좁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너른 버덩이다.
복골의 안막은 ‘뒷골서덕’이고, 낮은 능선을 넘으면 ‘된덕’이다. 된덕에서 고개를 넘으면 ‘조상아터’다. 조상아터는 ‘드렁골’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인데 바로 복골과 왕래가 많았던 길이다.
복골에는 사단법인 ‘호수의 집’이 있다. 부모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아이들과 정신지체아들이 마음을 다독이며 사는 집이다. 부모 노릇을 해줄 수는 없지만 함께 사는 마음은 나누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호수의 집 건너편 산 능선은 ‘능넘’인데 고개를 넘으면 ‘조상아터’나 ‘서덕’으로 이어진다.
복골에는 집집마다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서있다.
대추나무는 늦게 잎이 돋지만 열매가 일찍 열리는 나무다. 열매가 많이 열리는 대추는 풍요와 다산의 의미가 있으며, 또한 관혼상제 때 필수적인 과일로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상징물로서 폐백에 쓰인다.
재목이 단단하여 판목(版木)이나 떡메, 달구지 재료로 쓰인다.
일설에 보통의 대추나무는 물에 뜨는데,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물에 가라앉는 것이 특색이라 이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도장을 새겨서 쓰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보석처럼 여긴다고 한다.
또 속담에 ‘대추나무 방망이’라는 말은 어려운 일에 잘 견뎌 내는 모진 사람을, ‘대추씨 같은 사람’은 키는 작으나 성질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람을 가리킨다.
대추나무의 유래는 한자의 대조목(大棗木)에서 대조나무, 대추나무로 된 것으로 추정되고 한방에서는 산조인(酸棗仁)이라 부른다.
집집마다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많다는 것은 대추나무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온 집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대추나무가 미치지도 않고(대추나무 빗자루병) 해마다 대추가 잘 달린다고 한다.
복골 어귀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는 ‘절터메기’는 막혀있다. 집이 막고 나무와 숲이 막는다. 한때는 한 개 반이 살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또 절이 있었다 하여 ‘절터메기’이지만 골 안 버덩은 산이 에둘러 싸고 있어 어둑어둑하다하여 ‘어두어니’라 한다. 이곳 어두어니에 소나무정자가 다섯이 있었다 하여 ‘오송정’이라 하기도 한다.
아름드리 소나무 다섯 그루 사이에 아담한 정자를 짓고 마을사람들이 올라가 쉬던 정자는 보이지 않고, 여든의 할아버지도 보지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다고 한다.
어두어니는 ‘작은어두어니’와 ‘큰어두어니’가 있고 안막은 ‘목넘이’인데 고개를 넘으면 ‘가나무재’가 나오는 드렁골 뱀막이다. 여기서 다시 고개를 넘으면 ‘답풍리 숯고개’와 ‘화상대 붕대(부엉대)’로 이어진다.
또 다른 고개도 있다. 절터메기의 큰어두어니에서 ‘자작고개’를 넘으면 ‘화상대 솔골’이 나오고 ‘일령재등’을 넘으면 ‘지장골’이 나온다고 한다.
그 많은 길들이 지금은 사라진 걸까? 발길이 끊어지면 마음 또한 멀어지고 잊혀 진다. 다만 잊혀 질 뿐 길은 남아있다.
수많은 길들이 길을 이루었고, 수많은 길들이 길을 잃었다. 길을 이룬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루어왔고 길을 잃은 것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일 뿐이다.
모든 길은 길로 이어진다.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무작정 가고 보는 것이다.
복골을 돌아 나온다. 복골 개울물이 큰 강으로 흘러든다.
복골 어귀부터 시작되는 철정뜰은 강을 따라 넓고 길게 펼쳐진다.
복골 개울 건너편은 ‘드렁골’ 내치기이고, 길 따라 내려오면 ‘여시골’이다. 드렁골에서 살던 사람들이 더러 드렁골 어귀 비탈 둔덕에 자리 잡고 산다.
‘여시골’은 죄지은 여자들을 가두어 두었던 골이라고 한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시대에 여자들이 지은 죄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며 골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한 채가 있다. 복골처럼 골 어귀는 좁지만 안은 넓고 산이 높다. 아늑하고 편한 기분이 들었다. 꼭 자궁 같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그러나 한때 철정이 홍천현(縣:지금의 군)의 소재지였다는 근거(홍천향교지)로 볼 때 ‘시골(죄를 지어 감옥에서 죽거나 곤장을 맞아 죽은 죄인의 시체를 묻은 골)’이나 ‘역두골’, ‘여시골’은 꼭 필요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걸상골’은 ‘여시골’ 아래다. 걸상골 어귀는 ‘한세울’이다. 한세울 앞쪽은 ‘북밭자리’이다.
한세울을 지나 ‘철정뜰’을 가로질러 ‘놋점골’ 어귀를 돌아 이어지는 길에는 ‘손주목다리가’ 있었다.
‘놋점골’은 놋그릇을 팔던 곳이라 한다. 놋그릇을 팔 정도였으면 장이 섰다는 이야기가 되며 철정의 중심이었다고 여겨진다. 또 놋점골 앞뜰에 철정초등학교가 처음 이곳에 세워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갔다.
놋점골 어귀의 둔덕은 ‘가치래기’고, 가치래기를 돌아 내려가면 철정 ‘앞나들이’다. 육군 철정병원 뒤쪽이 된다.
가치래기에는 대장간이 있었으며 또 기와를 굽던 곳이었다.
‘놋점골’과 ‘용회골’ 사이는 너른 뜰을 이룬다.
놋점골을 돌아들면 ‘원진조각미술원’이 나온다. 내가 찾아간 날은 화가도 조각가도 집을 비운 날이었다.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나비의 날갯짓이 고요를 깨뜨린다. 하나하나의 조각품에 담긴 의미를 더듬어보며 둘러보고 있는데 두 대의 차가 들어왔다.
한분은 서양화가 ‘박석환 화백(80)’이고 한분은 조각가 ‘박기환(70)’씨이다. 박석환 화백은 홍천 출신(1929)으로 사실주의적 화풍을 바탕으로 색채의 미학과 향토성 짙은 작품을 통하여 자연적 존재로서의 의식을 그려낸 한국의 원로 서양화가 중 한사람이다.
또한 박기환 조각가도 이곳 출신으로 1999년 이곳에 ‘원진조각미술원’을 열었다. 양지바른 산 밑으로는 오래된 밤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있고 그 앞으로 이티(E.T) 모형의 작업실과 작업 중인 전시실이 하나하나씩 공간을 자리하고 있으며, 우물과 잔디밭 위에 잘 다듬어진 향나무와 조각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홍천의 돌과 수원 돌, 강화도의 돌들을 채석하여 빚어낸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의 삶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동심의 세계와 공간을 만날 수 있는데 인간의 삶속에 내재해 있는 그리움과 시간의 영원성을 원형의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예술은 멈춤이 없는 작업이다. 상상의 세계는 곧 형상을 드러내고 그 형상은 우리들의 삶의 한 형태로 다가온다.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찾는 이도, 찾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다. 이정표도 안내판도 없다. 그러나 꼭 한번 찾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정검문소를 지나면서 강 건너를 건너다보면 황금색의 이티(E.T) 모형의 건축물이 멀리 보이는 곳이다. 원진조각미술원으로 가는 길은 향교골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다리를 건너 갈림길에서 홍천 쪽으로 따라 내려가면 된다.
어느새 철정다리목까지 내려왔다. ‘아우라지고개’를 넘어가면 내촌이고 길을 건너 똑바로 가면 ‘북창’ 가는 길이고, 다리를 건너면 ‘철정검문소’다.
나는 다리를 건너 ‘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하루쯤 머물면서 봄이 가기 전에 ‘가리산의 봄’을 특집으로 다룰 요량이다.
‘가삽고개’와 ‘삼형제봉’, ‘석간수’, ‘무쇠말재’, ‘평내’를 돌아내려오는 등반을 통하여 ‘홍천9경’중 2경인 가리산 산악기행이 될 것이다.
가리산은 지금 꽃의 향기가 안개처럼 깊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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