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산’에는 지금 개나리와 진달래가 볼만하다. 알싸한 동박꽃(생강나무) 향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흰제비꽃이 드문드문 피어나고 노란 산괴불주머니와 현호색이 연한 남보라 빛을 내뿜으며 금세 깨어난 듯 기지개를 펴고 있다.
골짜기를 들어서자 뿔나비가 떼를 지어 놀란 듯 날아간다.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다시 만나니 반갑다.
산벚나무는 꽃망울을 매달고 금세 터뜨릴 기세이긴 하지만, 가리산의 봄은 철쭉이 꽃을 피워 온산이 꽃불로 산화하는 시기가 절정이다.
가리산의 봄을 특집으로 꾸미기로 하고 발길을 돌려 향교골 사거리를 지나 역내리로 들어섰다.
이번 기행은 ‘역내리’와 ‘철정리’를 오가는 기행이다. 다리도 몇 번은 건너다녀야 하고, 국도도 몇 번은 건너다녀야 한다.
우선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역내리 ‘가래뜰’로 들어간다. ‘추평마을’이라고도 하는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누군가 가래나무를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뜰 한가운데 농가에 사람들이 모여 못자리를 하고 있다. 멀리 나가 있던 아들이 오고 또 두레패들이 와 모판에 흙을 담고 씨앗을 넣는다. 이곳저곳의 마을 이름을 물어보면서 ‘혹시 이곳에 샘이 나던 논이 있었냐’고 물으니 손짓을 한다.
손짓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가보니 우물의 흔적이 있다. 논둑아래 시멘트 관으로 가둬놓은 샘통에는 물이 고여 있다. 마을에서는 그 우물물을 먹었다고 한다. 그 우물 옆에는 이백년도 넘는 큰 고목이 서 있었다고 한다.
나무는 경지정리하면서 잘랐는데 그 중등거리의 토막을 다듬어 농막에 놓고 탁자로 쓰고 있다. 그 나무가 가래나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물가를 지키던 나무였다는 사실과 추평마을의 전설이 서린 샘이었을 것 같다.
우물의 물은 마시기에 너무 오염이 되었지만 전설을 가짐 샘을 다시 찾았다는 것만으로 흡족하다.
다시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데무데미’로 들어섰다. 가리산 입구에서 홍천 방향으로 내려오다보면 두개의 골짜기와 둔덕위에 한옥이 보이는데 이곳을 ‘데무데미’라고 한다.
‘데무데미’는 떼놈들이 많이 죽어 무덤을 이룬 곳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많이 죽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불리어졌다고 한다.
데무데미골 어귀로 국도가 확장하면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1980년경에 경지정리를 하면서도 ‘데무데미’, ‘가래뜰’ 일대에서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데무데미골에서 내려오면 ‘역두골’이고 ‘큰구렁’과 ‘때까치골’을 지나면 ‘향교골’이다. 역두골은 역적을 가두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 골막에서 능선을 오르면 ‘깃대봉’이라고 한다. 골은 깊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추평마을은 데무데미와 가래뜰을 합쳐 부르는 말이 되었지만 마을사람들은 데무데미와 가래뜰은 엄연히 다르다고 한다. 가래뜰은 역두골과 큰구렁, 때까치골 앞 뜰을 말한다.
가래뜰로 흘러드는 ‘추평보’는 모로골 앞 강에서 시작된다. 봇물이 실하게 흘러내린다. 못자리를 해야 하고 또 논을 갈아 물을 가두어야 한다.
제방을 따라 ‘부채뜰’로 갔다. 큰 강에 흐르는 물도 예전 같지 않다. 하천은 정비되었지만 크고 작은 소(沼)들은 메워지고 바위는 다 깨서 제방을 쌓았다.
‘부채뜰(선평:扇平)’을 마을사람들은 선평이라 하지 않고 ‘부채돌’이라고 한다. 우선 부채돌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역내리 숯고개골’ 어귀의 논에서 못자리를 하고 있는 노인네들을 보았다. 참을 드시는 중이었다. 눈치도 없이 끼어 앉아 건네는 농주 한잔을 받아들고 부채돌 이야기를 꺼냈다.
‘부채돌’은 마을의 서낭당이었다.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가람밸리 리조트 안에 있었다. 리조트가 들어서면서 마을사람들은 그대로 보존해 줄 것을 건의했고 가람밸리 리조트에서는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바위 위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고 소나무가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방치된 상태였다.
바위에는 잡풀이 얼크러져 있고 주변이 어수선하였다. 서낭당이 서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시골풍경을 자아낼 수 있는 좋은 테마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드렁골’로 내려왔다. 드렁골 어귀에는 ‘됫박소(퉁퉁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드렁골은 ‘복골’ 뒤편이면서 도랑처럼 길고 좁다하여 붙여진 골이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너른 둔덕이 드러누운 듯한 버덩이 나온다.
이곳에도 화전민들의 삶이 남아있고 그 자리를 낙엽송이 하늘을 가릴 듯 쭉쭉 뻗어있다. 뱀막에서 능선을 오르면 내촌 화상대의 ‘부엉바위’가 있는 ‘봉황대(부엉대)’이다.
드렁골 안으로 들어서서 ‘조상아터’로 들어서면 ‘능넘이’를 넘어 ‘복골’로 이어진다. 드렁골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넘던 ‘드렁골고개’에는 오백년쯤 된 동갈나무가 있다. ‘동갈나무’는 갈참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을 내어 한번 찾아가기로 하고 다시 강을 건너 ‘향교골’로 들어섰다.
향교골 어귀는 ‘지다치’다.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향교골은 향교가 있었던 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향교가 들어서있던 자리는 팜파스휴게소 앞 산 둔덕이다. 44번국도 확장 공사를 하면서 산자락이 잘려 나갔지만 산위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둔덕까지 오를 수 있다.
향교가 서있던 자리에는 낙엽송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향교(鄕校)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일명 교궁(校宮)·재궁(齋宮)이며,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을 때에는 향학이라 불렀다.
고려의 학제(學制)는 중앙에는 국자감·동서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국자감을 축소한 학교인 향학(鄕學)을 설치하여 지방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다.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여 강당으로서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었으며, 교사는 조교(助敎)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에 여러 도(道)와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목·군·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에는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한국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서양무·동서양재(東西兩齋)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兩舍)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훈도(訓導) 각 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었으며, 또 교예가 속하고 있었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그 공수(公需)를 위하여 정부에서 학전(學田) 7결 5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으나,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매수 등에 의한 많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 합격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高級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고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홍천군지의 읍면지 철정리에 관한 기록에는 ‘철정은 옛날 조선조 초기 군청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약 400여년 전에 유학의 전당인 홍천 향교가 두촌면 철정리에 건립되었다고 적혀있다. 그 후 화촌면 삼포리로 옮겨졌다가 현 위치인 홍천군 희망리에 옮겨진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홍천현(군청)소재지였음직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어디서 발췌했는지도 나타나 있지않아 무작정 향교골로 들어갔다.
향교가 이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철정이 홍천의 현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언제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향교골을 중심으로 ‘향교데미’, ‘향교뒷구렝이’ 등의 지명이 남아있고 향교가 있었다는 터에는 아직도 기와가 나온다고 한다.
향교골로 들어서면 큰 골짜기가 양편으로 갈라진다. 왼편골짜기는 ‘작은향교골’이고 오른쪽 골은 ‘큰향교골’이다.
작은향교골 안막으로 들어가니 마을 공동 취수 탱크가 놓여있다. 그러나 개울에 흐르는 물이 적어 마음고생이 크다고 한다.
큰향교골로 들어서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가운데 엄익성(90) 노인이 살고 있다. 엄 노인은 자칭 ‘짚공예 기능보유자’다. 홍천의 각종 문화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자신이 만든 맷방석이며 똬리, 종다리끼, 짚신, 주루목, 채반 등 짚공예와 싸리나무로 엮은 물건들을 전시도 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허름하지만 방마다 가득 채워진 수공예품들은 문화체험장이자 전시실이다.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물건들을 보면서 겨울 양지쪽에 앉아 대자리를 엮던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했다.
골 안으로 들어갈수록 집들이 드문드문하다. 개울 건너편으로 보이는 ‘늑동골’을 지나 구비를 돌아 오르다보면 ‘가리산 관음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관음사는 홍천 철정에서 태어나 산문(山門)에 들어 고행정진하며, 1978년 이곳에 터를 잡고 불사를 이룬 인목(忍牧) 스님의 거처이다.
마음을 닦는 것이 곧 극락의 이치가 아닐까?
108계단이란 자신의 마음을 닦는 길이자 세상으로 통하는 문(門)일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일주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다보면 왼쪽에 굴이 있다. 금광을 캐던 굴이다. 그 위에 종무소 겸 요사채가 있고 맞은편에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의 추녀 끝을 돌아서면 ‘지장암’이 있다. 금광굴을 그대로 살려 그 안쪽에 안치하였다.
지장암부터 범종누각(梵鐘樓閣)까지 계단이 이어진다. 그리고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계단을 올라서야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옆으로는 팔각 석탑과 산 밑으로 가리산 약수가 있다. 신도들은 기도물이라고 하는데 물을 마시기전에 불전함에 돈을 넣고 기도를 한 후 물을 마신다. 그 까닭은 물을 지키는 물할머니께 물을 잘 마시겠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산신당은 절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용왕신, 가리산산신, 부처님 등이 모셔져 있다.
관음의 경지는 어디일까? 말없이 피었다 지는 노루귀와 바람꽃은 알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나’는 누구일까?
스스로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보이는 걸까?
얼마만큼 닦아야 마음의 소리를 볼 수 있을까?
관음사를 뒤로하고 향교골 안막으로 오른다. ‘달롱바위골’을 지나 ‘집골’ 어귀의 향교골 마지막 집을 지나는데, 집 앞밭에서 비료를 뿌리고 있던 할머니께서 허리를 펴시더니 대뜸 ‘약물 받으러 가느냐?’고 묻는다. 그리로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자 저 산굽이 돌아 개울을 건너면 된다며 예전에는 치성도 드리고 물 맞으러 오는 부인네들이 많았다고 한다.
폭포를 이루며 흘러나오는 약수라 보물이라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시집 온지 육십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살아 이골이 났지만 이제 가면 어디로 가겠냐며 다녀오란다.
약수는 골짜기의 바위를 흘러내리며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오른쪽 바위벼랑에는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 갔는지 주발과 대접이 놓여있다.
약수골 안막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약수골 건너편에는 집터의 흔적이 남아있고 원골을 따라 오르면 ‘물안골’과 ‘절두골(절뒷골)’, ‘굴골’이 이어지고 뱀막(골막치미)은 가리산 능선 너머 ‘늘목’으로 이어진다.
약수골의 부처바위와 물안골, 절두골에는 현몽으로 부처를 모시게 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물안골에는 물레방아가 쉬지 않고 돌아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화전을 부쳤는데 어느날 물안골에 사는 처녀가 물레방아를 찧고 있었다.
절두골에 사는 젊은 중이 우연히 이 처녀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겁탈하였는데 그날 밤 처녀는 목숨을 끊고 이승을 떠났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절두골 암자로 돌아온 젊은 중은 저녁 공양을 하고 자리에 들었는데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호랑이가 들이닥쳐 젊은 중을 물고 굴골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안 마을사람들이 암자로 몰려가 불을 지르고 부처를 약수골 안막의 바위밑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늘목(야시대)에서 이사를 온 김동기라는 사람이 잠을 자는데 ‘폭포수가 떨어지는 골 뱀막으로 들어가면 광배 같은 바위 밑에 부처가 묻혀있으니 모셔오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 꿈에서 일러준 대로 가보니 바위가 있고 그 밑을 파보니 부처가 있어 집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그 후 폭포에서 목욕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드렸는데 시름시름 앓던 병도 나았다고 한다.』
관음사의 인목 스님이 말씀하신 향교골의 정교암이라는 암자가 약수골 근처였다는데 혹시 김병기가 짓고 부처를 모신 암자가 아닐까 생각하며 향교골을 내려와 복골로 향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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