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리는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왼쪽으로 ‘경수마을’, ‘새말’, ‘샛골’, ‘쇠판이’, ‘황다리골’, ‘샘재’와 강 건너 쪽으로 ‘모로골’, ‘평내’, ‘가리산’으로 나뉜다.
‘모로골’은 모르고 지나간다 하여 ‘모로골’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모노동(毛老洞)’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두촌 흑둔지’나 ‘정골’, ‘원동’ 등지에서 가리산을 가려면 모노동을 거쳐 고개를 넘어 다녔다는 이야기만 확인할 수 있었다.
샘재에서 모로골로 가려면 역내리를 거치거나 흑둔지를 돌아 옛날 국도를 따라 들어서야 한다.
샘재를 돌아 내려오는 길이니 두촌휴게소를 지나 갓길로 빠져 ‘역내리 산골막국수’ 앞을 지나 다시 굴다리를 빠져나와 강을 따라 오르다가 왼쪽 모로골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펜션 ‘흙이랑 별’에서 세운 솟대가 이정표를 대신하여 서있다.
골 어귀에 고물상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토박이는 세집 정도이고 나머지는 최근에 이곳이 좋아 찾아든 사람들이다.
골막은 ‘가리산 가삽고개 능선’에서 이어지는 ‘등골산’ 줄기가 양편으로 길게 뻗어 내리고 있다.
마을 어귀부터 ‘봇산골’, ‘잼박골’, ‘논골’, ‘밤나무골’, ‘상아리골’, ‘고갯골’, ‘중아지골’, ‘봉토지골’, ‘섬박골’, ‘동바지골’, ‘품목골(부목골)’, ‘원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다.
많은 골짜기 중에서 ‘고갯골’은 아직도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고개다. 고개를 넘으면 작은 평내 어귀인 ‘갈밭골’이 나온다.
‘원골’ 안막으로 들어서면 두촌 원동 ‘다릿골’이 나온다. ‘원골’과 ‘품목골’은 모노동의 마지막 골이다.
물은 급경사를 이루며 세차게 흐른다. 원골 안막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저 하늘만 믿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비만 내리면 물난리를 겪었던 탓이다. 그런 까닭에 마을 입구부터 쌓아올린 제방은 깊고 두텁다.
품목골과 원동으로 갈라지는 계곡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고 원골에는 시골의 정취에 잘 어울리는 ‘흙이랑 별’이라는 펜션이 자리한다.
한여름에도 얼음바람이 나오는 ‘바람굴’이 있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과 풀장은 계곡과 함께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곳이다. 화전민이나 산촌생활을 엿볼 수 있는 농기구와 가마니틀,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시골 풍경과 잘 어울린다.
품목골과 원골의 막창까지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로골은 산과 계곡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뒤로는 가삽고개 능선에서 이어지는 산마루가 행상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둘러서고 계곡에선 암반위로 흐르는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다만 자연과 함께 이웃과 함께 오래도록 사람의 정이 깊어지는 마을이기를 길을 돌아 내려오면서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모로골에서 큰 길로 나선다. 모로골을 흘러온 개울물이 ‘무둘이구방’을 돌아 흘러 온 강으로 흘러든다.
모로골을 돌아나오면서 만나는 골짜기는 ‘윗목골’이다. 이 골짜기부터 ‘역내리’다.
‘가래뜰’, ‘소서낭거리’, ‘쇠덕’, ‘숯고개’, ‘천감’, ‘평내’를 합쳐 ‘역내리’라 한다. 조선시대에 보안도(保安道)에 딸린 천감역이 있었다고 하여 역내리라 한다고 홍천군지에는 기록하고 있다.
역이 있었던 마을은 ‘천감(泉甘)’이다. ‘품앗골’ 어귀가 된다. 품앗골로 넘어가면 작은 평내의 ‘갈밭골’이 나온다.
‘천감’은 국도를 끼고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역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졸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한다.
역졸은 관헌에서 부리던 하인들이며, 역(驛)이란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으로 주요 도로에 대개 30리마다 두었다고 한다. 이곳에 역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증거가 되며 또 역졸들이 살았다고 해도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리산 입구의 두촌휴게소가 예전의 역관 노릇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산골막국수가 자리하고 있는 그 일대가 마을의 중심이었다.
산골 막국수. 시(詩)적이기보다 소설속의 이름 같다. 길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허름한 시골집을 그대로 살려 손님을 맞이한다.
4차선 국도가 뚫리기 전에는 막국수 한 그릇을 먹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정도로 맛집으로 소문이 났던 집이다.
1983년에 영업허가를 냈다는 영업허가증이 걸려 있지만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막국수를 눌러 먹다가 그 맛이 남달라 허가를 내고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메밀을 심어 국수틀에서 직접 눌러 면을 뽑았다. 거의 삼십년 전 일이지만 부엌에서는 연신 허연 김이 구름처럼 몰려나오는 풍경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특별한 메뉴는 없다. 막국수와 촌두부, 동동주, 편육이 전부이다. 어느 막국수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메뉴이지만 아직도 원조 막국수 집다운 명성 그대로 찾는 사람이 꾸준하다
그 후 마을 어귀마다 막국수집이 들어서게 되는데 지금은 어느 집에 들르던지 간에 구수하고 담백한 막국수를 먹을 수 있다.
막국수의 주원료는 메밀이다. 그러나 메밀을 심었어도 지금과 같은 면발을 뽑아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손쉽게 해먹을 수 있는 전이나 묵을 많이 쑤어 먹었다. 특히 메밀을 반죽하여 칼국수를 많이 해먹었다.
막국수의 ‘막’은 ‘보편적인, 대중적인’이란 뜻이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해먹을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막국수란 어원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메밀에 대한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조선 인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황폐해져 흉년이 들었는데 기근으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끼니를 연명하자, 나라에서 구황작물로 메밀 재배를 권장하며 호구책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산촌 농민들이나 태백산맥 화전민들이 메밀을 반죽해서 메밀수제비를 먹었다는 기록에서 가난한 농민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목숨을 연명하고자 먹던 음식이 지금은 암, 위장병, 성인병을 예방하는 건강식품이며, 여성피부에 좋은 미용식품이며, 비만, 당뇨병치료에 좋은 치료식품이며, 시원하면서 톡 쏘는 맛과 쫄깃한 면발이 별미인 미각식품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메밀을 원료로 조리해 먹는 방법과 이름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긴 겨울밤에는 ‘메밀묵 사려~’라고 외치는 메밀묵장수가 있었고, 주막집에서는 ‘메밀전병’이 있었다. 정선에 가면 ‘콧등치기국수’가 있다.
춘천에서는 막국수를 테마로 축제를 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메밀로 반죽을 만들어 구멍 뚫은 바가지에 넣고 눌러서 빠져 나오는 국수발을 끓는 물에 받아 이를 굳혀 먹었다 한다.
춘천 막국수 박물관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요선동 소양고개 길 마루턱에 ‘방씨막국수’라는 음식점이 있었다고 하며, 뜨거운 육수를 넣은 온면 형태로 많이 먹었으며, 동치미 국물을 넣어 차게 먹기도 했다』고 한다.
김유정의 소설 ‘솟’에는 ‘저 건너 산 밑 국수집에서는 아직도 마당의 불이 환하다. 아마 노름꾼들이 모여들어 국수를 눌러먹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산골막국수 집에서 막국수를 먹고 역이 있었다는 터를 찾아 내려왔다. 멀지 않았다. 길옆에 붉은 지붕을 한 집 그 일대였다고 한다. 그 후에는 마방을 하고 주막거리를 이루었다가 지금은 시골의 여느 농가와 다름이 없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두촌휴게소’다. 휴게소 못미처 ‘능골’과 ‘도르래골’이 있다. 능골 안으로 들어가면 ‘석장골’과 ‘작은능골’로 갈라진다. 마을에서는 능골로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옛날에 ‘고려장’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가리산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이다.
휴게소를 지나 ‘가리산’으로 들어간다. ‘평내’다. 평내란 마을 앞에 큰 냇물이 흘러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마을 안쪽에 편안히 쉴만한 터가 있어 평내라 한다고 덧붙인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은 급물살도 없이 넓고 평평하다. 큰 강을 가졌으면서도 소도 별로 없다. 다만 바른골 어귀의 ‘됫박소(퉁퉁소)’가 있었으나 제방을 쌓느라고 다 메워져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평내 어귀에는 평내초등학교가 있었다. 1953년 세워졌다가 1992년에 폐교되었다.
지금은 ‘홍천군청소년수련원’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적 숙박시설을 갖추고 젊은이들의 체험활동과 휴식공간으로써 활용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호연지기와 진취적 기상을 기를 수 있는 자연권 종합 수련시설을 갖추고 있다.
가리산 입구 사거리를 지나면 ‘가래뜰’이다. 가래뜰은 ‘추평(楸平)’이라고 하고 ‘데무데미’라고 한다.
마을에는 큰 가래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래나무는 추자목(楸子木)이라고도 하고 열매를 추자(楸子)라 한다. 산기슭의 양지쪽에서 자란다. 높이가 20m 정도이며 나무껍질은 암회색이며 세로로 터진다. 잔 톱니가 있고 잎맥 위에 선모(腺毛)가 있다. 열매는 핵과로서 달걀 모양은 타원형이고, 9월에 익는다. 노인들의 손 놀이 감으로 많이 쓰인다.
한방에서는 봄에서 가을 사이에 수피를 채취하여 말린 것을 추피(楸皮)라 하며 수렴과 해열, 눈을 맑게 하는 등의 효능이 있다. 열매는 날 것으로 그냥 먹거나 요리하여 먹고,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한다.
이 마을이 ‘추평’이라 붙여진 데는 과거시험 보러가는 선비와 깊은 인연이 있다.
지금부터 이백여년 전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이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피로로 매우 지쳐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목이 말라 마침 그곳에 있던 우물의 물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선비가 물을 마시자 잊고 있었던 공부한 것들이 거의 다 생각 날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선비는 이곳에서 며칠을 더 묵고 과거시험을 보아 장원급제를 했다.
그 후 선비는 잊지 않고 다시 우물을 찾아와 고마움의 표시로 우물 옆에 가래나무 네그루를 심고 마을에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역내리는 4차선 국도 확장 공사기간중 지표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의 집터와 원형 구덩이가 발굴되었으며, 삼국시대의 주거지와 고분군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한 곳이다.
가리산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면 ‘철정리 부채뜰(선평)’ ‘설통바위골’ 어귀이다. 역내리와 철정리의 경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구분한다면 ‘숯고개골’부터 ‘모내골’까지 역내리이다. 그러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일단 다리를 건너 ‘숯고개골’로 올랐다. 골이 깊고 길이 포장되어 있다. 이 길은 ‘내촌 답풍리 숯고개’와 연결된다. 지금은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이길로 들어섰을 때는 경칩 무렵이었다. 골어귀의 농가 마당 빨래줄에는 빨래가 잔뜩 널려있고 숯고개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는 비닐천막의 빨래터에서 아낙이 빨래를 한다. 아직 물이 찬데도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를 비벼댄다. 무슨 심사일까?
얼음이 풀리듯 마음의 응어리가 확 풀어지길 빌며 골짜기로 올랐다. 골짜기로 이어지는 길은 포장되어 있다. 안막으로 이어지는 길은 별장형의 주택으로 이어지고 길은 산길로 이어진다.
숯고개길에서 ‘되찬이’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더욱이 서낭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어 ‘소서낭거리’다. 되찬이는 길이 없지만 넓은 개울을 이룬다.
‘도르래골’은 깊지 않지만 천현리와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이다.
천현리 새말부터 철정리 부채뜰까지 이어지는 뜰은 넓다. 너른뜰에 두엄을 내고 땅을 갈아엎는다.
‘모내골’에서 발길을 돌려 강둑을 걸어 내려온다. 강에는 바위도 없고 큰 돌도 없다. 여름이면 햇살을 피해 들어설만한 나무도 없다. 강에는 모래사장도 없다. 그저 비가 오면 물 빠짐이 원활하도록 직선화 되었다. 너른 강을 두고 강에서 물놀이 할 곳이 없다는 것은 좀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어느덧 가리산 입구 다리까지 내려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강둑을 따라 내려가면 ‘가람벨리 리조트’가 자리한다. 야외수영장과 캠프화이어장 등 부대시설과 다양한 형태의 펜션을 갖추고 있다.
가람벨리를 지나 내려가면 강가에 바위가 펼쳐진 소가 나오는데 ‘됫박소(퉁퉁소)’다. 지금은 다 메워졌고 버드나무와 달뿌리가 무성하지만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곳이다.
됫박소 아래는 ‘드렁골’ 어귀다. 아직 포장되지 않았지만 골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버덩이 나온다. 그래서 드렁골인데 한때는 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타작이 끝나면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짊어지고 장을 보러 갔다. 드렁골에서 설통바위골로 넘는 고개를 넘었는데, 고갯마루에는 오백년 정도 된 동갈나무가 서있다.
드렁골 아래는 ‘복골’이다. 마을이 복주머니처럼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 또 문씨성을 가진 사람이 은항아리를 발견했으므로 복 받은 골이라 하여 복골이라 한다. 밖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골짜기를 이루는데 들어가면 너른 뜰이 나온다. 알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듣기만 하여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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