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래소’에서 ‘용소간’으로 이어지는 물소리 때문일까?
오랜만에 물 꿈을 꾸었다. 용소간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흘러오는 물을 바라보다가 흘러가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때였을까? 흘러오는 물결이 갑자기 물살을 일으키며 내 몸을 휘감았다.
소리소리 지르다가 깨어났다. 죽는 줄 알았다. 참 이상도 하지. 밤의 거처까지 따라온 걸 보면 용소간에 대한 감동이 깊었나보다.
용소간을 돌아나오면 ‘장자울(쟁이울, 장탄)’이다. 그러나 바위벼랑이라 갈수가 없다. 다시 돌아나와 ‘돌고개’를 넘어야 한다.
수태 ‘절터’를 중심으로 용소간까지 남아있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가야겠다.
절터를 중심으로 하여 ‘수태(수타동, 수대동)’라고 한다. 공작산 수타사가 처음에 이곳에 세워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하지만 알 수 없다. 다만 용소계곡 깊은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절터 건너편 뾰족한 봉우리는 ‘깃대봉’이다. 깃대봉에서 거북이가 머리를 늘어뜨린듯한 봉우리는 ‘딴봉’이고 고갯마루는 딴봉고개다. 딴봉고개 맞은편은 ‘굴아우’다. 굴아우를 돌아 내려오면 바위등강에 소나무가 서있다. 고개를 넘지않고 바위를 따라 돌아 내려가면 아름다운 소가 있다. ‘소나무소’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의 고집이랄까. 그래서 붙여졌는지 소나무들이 물속으로 비껴든다. 물속의 소나무들도 물결에 흔들린다.
바위 벼랑을 돌면 삼십명은 족히 앉을 너래 반석이 깔려있다. 반석 여기저기 메기 낚시를 하고 갔는지 지렁이통이 버려져 있다.
물속을 바라보니 아직 물고기들의 움직임은 없고 크고 작은 바위들이 편안하게 놓여있다.
소나무소를 돌아 개울을 따라 내려온다. 넓은 계곡 한쪽으로 버드나무와 갈대가 길게 늘어서 있다.
물살이 지나간 흔적은 역역한데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선 것은 군락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물살을 돌려놓을 만큼 그들의 힘은 견고했다.
물은 산 밑을 따라 길게 흘러간다. 바위와 바위가 엉켜있다. 소를 이룬 곳도 없이 여울을 이루며 흘러간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진소’다.
진소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 수천의 물소리를 들었다. 바람과 섞이기도 하고 나무와 섞이기도 하고 바위와 섞이기도 하고 하늘과 구름과 별과 나비와 벌과 물속의 메기와 피라미와 꺽지와 동자개와 쉬리와 …….
내 알지 못하는 생명들과 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는 소리 같았다. 아마 내 마음의 변화가 그렇게 많았다는 걸 감추진 않겠다.
진소 아래는 ‘퉁퉁소’다. 퉁퉁소는 물이 깊어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바위 사이를 뚫고 흘러가는 듯 소리가 퉁 퉁 퉁 들린다. 이름 따라 귀를 기울이니 꼭 그렇게 들린다.
퉁퉁소에서 내려오다가 다리를 건너기전에 ‘학소’가 있다. 학이 앉아있는 바위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학이 자리를 잡고 무심히 기다리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에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들은 학모가지처럼 긴 바위 사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목숨을 건 여행이다.
살면서 정말 목숨을 걸만한 일은 무엇일까?
경수마을로 들어서서 차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빈집과 조립식건물이 들어서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다.
멋들어진 소나무가 서로 기대어 서있고 소나무 아래로 소가 이어진다. 이름은 없다.
물은 여울을 이루며 ‘골계골(흔계골)’ 어귀를 돌아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산 밑에 자리 잡은 집이 두채가 있다.
집 앞에 널어놓은 나뭇등걸을 잘라 쌓고 있다.
봄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구나. 밭 설거지도 하고 두엄도 내고 또 갈아엎고 씨앗을 넣어야 한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가서야만 한다. 그래서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하지 않았던가.
다리를 건너면 ‘용소간’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그늘 깊은 계곡을 지나 용소간으로 이어진다.
용소간으로 들어서면서 깊이 생각에 잠긴다. 전설의 고향의 배경이 되었던 이곳은 마땅히 내려가는 길은 없다. 따라서 아무데로나 갈 수 있다. 좀 더 편한 곳은 ‘헌터골(헌덕골)’에서 내려서는 것이 좋다.
또한 내려서도 길은 없다. 바위를 안고 나무뿌리를 잡고 오르내려야 한다.
바위나 물이 이루어내는 생이 우리네 삶과 너무 닮았다. 그래서 아름다운가?
괘석리는 경수마을로 이어진다. 경수마을은 ‘개동편’ 뜰을 중심으로 ‘장여울’, ‘품목골’, ‘무레이골’, ‘샘재골’, ‘담배밭’을 아우른다.
돌고개를 넘어 ‘장여울(쟁이울)’로 들어선다. 쟁이울은 개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개울 이름 따라 마을도 그리 부른다. 산 아래 버덩을 이루고 논과 밭이 있다.
용소간을 돌아 쟁이울이 이어지는 여울에 쟁이울 보가 있다.
돌고개를 넘어 내려오다 보면 연안 이씨 숭모각이 있다.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조상에 대한 배려인지 모른다.
쟁이울은 말 그대로 물살이 잔잔한 여울이다. 긴 여울 한가운데 작은 소가 하나 있다. 바닥에는 암반이 깔려 있고 물이 깊지 않아 물놀이 하기에 좋다. 다만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맘대로 드나 들 수는 없다.
쟁이울 건너편은 ‘품목골’이다.
품목골 길은 개동편 뜰에서 들어선다. 기도원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한때 화전으로 터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떠난 뒤 세월이 흐른 지금 물 좋고 경치 좋은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 다시 들어온다. 품목골 안으로 들어서면 ‘지당터’가 있다.
경수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천의 제방공사와 도로 확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한동안은 개동편 뜰로 돌아 다녀야 한다.
‘경수(鏡水)’는 거울 같이 맑은 냇물이 흘러간다고 하여 ‘경호(鏡湖)’라고도 불리운다.
개동편 뜰을 중심으로 다문다문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개동편’이란 말보다 ‘개등편’이란 말을 많이 한다. 개등편이란 말은 ‘샘재골’에서 ‘샛골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이 개가 길게 누워있는 형상이라서 불리는 말이라고 한다.
개동편 뒤쪽으로 이어지는 ‘샘재골’은 골이 깊으면서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를 넘으면 ‘모로골’ 건너편의 ‘샘재골’로 이어진다.
‘천현리’는 이 고개에서 온 지명이다. 원래는 천치(泉峙)였다. 그러나 어감이 좋지 않아 천현리로 개명을 했다.
천치란 지명 때문에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았다. 마을 체육대회때 응원을 해도 ‘천치 이겨라 천치 이겨라’, 일등을 해도 ‘천치가 일등을 했대’ 등등 좋은 일에도 지명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1983년 천현리로 개명하니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개동편 뜰은 경수마을의 중심이지만 개울을 중심으로 ‘샘재골’ 쪽은 ‘응달말’, 경로당이 있는 곳은 ‘양지말’이다.
양지말에는 고석등의 능선에서 이어져 내리는 골짜기가 있다.
‘무레이골’을 들어서서 능선을 넘으면 ‘정골’이고 막치기는 ‘깃대봉’으로 이어진다. 골이 깊어 사람들이 화전을 하며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골짜기를 따라 좁은 길이 나있을 뿐이다.
무레이 아래 골짜기는 ‘정골고개’로 정골로 넘나들던 고개가 있다. ‘화채골’도 있다.
왕래가 많았던 골은 ‘나가정고개’로 중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경수에는 ‘담배밭’이란 곳이 있다. 경수골에서 나가정고개 어귀의 천여평 정도의 너른 밭이다. 일백여년 전 효자 박종호(朴種鎬)가 잘 피우던 담배를 끊고 모은 돈으로 밭을 샀다하여 붙여진 밭 이름이다.
경수마을 들어서는 어귀에는 ‘청주양씨열여비각(淸州楊氏烈女婢閣)’이 있다.
1960년 문중에서 건립한 이 비각은 청주양씨의 정열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인 우종철씨에 의해 세워졌다.
청주양씨는 현숙 단정하였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병들어 임종 시기를 당하게 되었다. 하여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고자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생명은 삼일간 연장되었다.
사망 후 삼년상을 치르고 슬픔에 잠겨 지냈다. 그러던 첫 제삿날 저녁 일성대곡하고 방으로 들어가 남편을 따라 세상을 버리고 자결하였다는 내용의 비가 세워져 있다.
경수를 돌아 나오면서 경수처럼 맑고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다. 물이 맑은 것보다 마음이 맑은 사람들의 삶이 경수골의 물처럼 흐르기를 기대하면서 발길을 ‘새말’로 옮겼다.
경수골로 들어가는 길은 국도에서 두촌면 자운리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오직 한 길이다. 국도 아래로 연결된 길을 나와 다리를 건너 흑둔지 앞뜰 강둑을 따라 내려온다.
용소계곡을 흘러온 물줄기가 ‘장남천’과 만나 ‘항아리소’를 이루고 다시 ‘무들이구방’을 돌아 흘러간다.
나는 다리를 건너 새말로 들어선다. ‘새말’은 경수 다음에 새로 세워진 마을이다. 4차선 국도가 나기 전에는 ‘밤골’과 ‘보습골’, ‘새골’을 넘나들던 고갯길도 있었지만 길이 길을 끊어 놓았다. 새말 둔덕을 이룬 곳엔 큰 양계장이 있고 둔덕아래쪽으로는 뜰을 이룬다.
새말뜰을 가로질러 걷다보면 국도아래 굴다리를 빠지기 전에 ‘쇠판이’가 있다. 국도는 쇠판이 한가운데를 지난다.
두촌은 전국 최대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다. 철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름이 많다. 그중에서 ‘쇠판이’, ‘쉰패랭이’ 등은 최근까지 철광석을 캐냈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쇠판이는 길에서도 훤히 보일정도로 철광석을 파던 곳이었다. 광맥을 따라 굴을 뚫지 않고 그대로 캐어 실어냈다. 굴을 뚫어 철광석을 캐던 곳은 ‘쇠판이골’이다. 특히 ‘쉰패랭이’는 갱도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는데 광부들이 벗어 놓은 패랭이가 쉰개가 되었다하여 쉰패랭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쇠판이는 지금 밭으로 바뀌었다.
쇠판이에서 새골로 들어선다. 국도 밑의 굴다리를 지나기전 왼쪽으로 돌아 윗 굴다리를 빠져 예전에 넘던 고갯길을 따라 산등성이로 오른다.
새들이 많이 날아와 ‘새골’이라고도 하며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다하여 ‘샛골’이라고도 한다. 정말 많은 새들이 날아다닌다. 새골 막치미에는 한가구가 사는데 새들이 날아와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골 막치미에서 고개를 넘으면 ‘경수 개동편’이다. 새골에서 흐르는 물이 연못을 이루고 논과 밭을 적신다. 그러나 무논과 묵밭이다.
새골에서 내려와 국도의 굴다리를 빠져나오면 ‘쇠판이골’이다. 한때는 철광을 캐내느라고 요란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길조차 찾기 어려운 골이 되었다. 골막에 있다는 쉰패랭이도 굴이 막혀 찾을 수가 없다.
쇠판이를 지나면 ‘황다리골’이다. 황다리골은 황새다리와 비슷하다하여 붙여졌다. 길에서 보면 지금은 공동묘지와 집을 짓기 위해 돌로 축대를 쌓은 골짜기가 되었다.
황다리 골짜기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작은 연못 윗쪽 계곡에는 용이 되어 승천하기를 기다리는 구렁이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김재욱이라는 사람이 소꼴을 베려고 황다리골 골짜기에서 지게를 받쳐놓고 낫으로 꼴을 베려고 하는데 갑자기 풀섶이 양쪽으로 쫙 갈라지더니 큰 구렁이가 골짜기 위쪽으로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용천하려는 구렁이를 사람이 보면 용천 할 수 없어 마을에 우환을 준다는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따라 서낭당을 짓고 제를 올렸다 한다.
지금은 서낭당도 없어지고 제도 올리지 않는다. 다만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는 황다리골 지나기를 좀 꺼린다고 한다.
황다리골 아래는 ‘샘재골’이다. 경수골 개동편과 넘나들던 샘재가 있어 처음에는 ‘치(峙)리’라고 부르게 된 골짜기이다. 샘이 나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짓기에 더없이 좋았던 이곳은 어귀에만 몇집이 모여 있다. 혹시 샘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지만 샘은 없고 골짜기 안으로는 너른 밭이다.
이 샘재가 최근에는 복 터진 골이라 하여 ‘복마을’로 달리 부른다. 이유인즉 우리나라 복권 사상 최고액의 복권이 터진 곳일 뿐만 아니라 일등 복권도 종종 나온다하여 그리 부르게 된 것이다.
쇠판이나 황다리골이나 샘재골에서 이어지는 앞뜰은 너른 논이 펼쳐진다. ‘샘재 앞뜰’이다. 구보와 새보에서 흘러드는 물이 샘재 뜰의 물고를 따라 흘러든다.
개울은 앞뜰을 활처럼 휘돌아 흐른다.
복은 땀 흘린 자들의 몫이라 한다.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 또는 그에 따르는 기쁨을 복(福)이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행복이나 길운(吉運)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복은 일상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즉 ‘아내를 잘 얻는 것도 복이다’, ‘누구든지 자기 복은 지고 태어난다’는 등 우리들은 복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실제로 깨닫지 못하고 복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삶의 중심에는 복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으며 또 복이 오기를 꿈꾼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반드시 꿈을 갖고 땀 흘린 자에게만 찾아온다.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정말 복 받을 사람이다.
‘가리산’을 오르면서 그 꿈을 만나기를 고대한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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