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리’로 들어서는 어귀에는 공원이 둘 있다.
도관리 ‘우렁골’ 어귀를 지나 ‘가족이고개(가족현:可足峴)’마루에 조성된 ‘자그로마을’ 공원과 두촌 ‘괘석리’로 들어서서 ‘노루목재’를 돌아 다리를 건너 ‘장가터’에 마련된 ‘자그로공원’이다.
공원에는 장승과 함께 ‘자그로마을’이라는 표지석이 공원 한가운데 자리하고, 이곳까지 찾아오시느라 힘들었다고 장승이 손을 내미는 아담한 시골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비탈인 산촌마을의 풍경이다.
공원에서부터 길을 따라 새농어촌건설운동 노란 깃발이 나부끼고,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된 깨끗하고 조용한 마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처음 답사했을 때 받은 풍경을 떠올리며 경칩이 지난 토요일 아침 다시 길을 나선다.
‘화양강 휴게소’를 지나 ‘철정삼거리’에서 어느 쪽으로 들머리를 잡을까 망설이다가 451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가족이고개’를 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광암리’라는 산촌의 이미지를 깊이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아우라지’ 고개를 넘어 ‘지르매재’를 넘어 ‘오형제고개’를 넘어 ‘벼룩재’를 지나 ‘떼소’를 거쳐 내촌면 소재지인 ‘도관리’에서 ‘안말’로 들어서서 ‘당벌’에서 잠시 멈추었다.
개울 웅덩이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을 들어 ‘백우산’을 바라보니 햇살에 바위가 하얗게 빛난다.
눈 덮인 ‘백우산’의 모습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햇살에 이마를 들어낸 백우산의 모습은 창공을 나는 한 마리 학 같다.
다시 발길을 ‘거주개’로 향한다. 한때 물을 막았다고 하는 ‘포왕저수지’의 흔적인 듯 깊은 골짜기를 바라보며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우렁골’어귀를 지나 굽이굽이 ‘가족이고개’를 오른다.
돌과 돌이 포개지고 바위와 바위가 늘어선 이 고개는 좁고 가파르지만 길을 나선 나그네에겐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숨이 차다. ‘반야사’를 지나면서 섰다 오르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지나온 길을 정상에서 바라보니 아득하다.
지나간 모든 생이 다그러하듯 멀고 힘든 것만은 아니다. 한발 한발 내딛은 그 걸음이 나를 정상에 올렸다고 생각하니 아름답게 느껴진다.
정상은 아직 비포장도로다.
‘자그로마을’의 표지석과 장승이 서있는 고갯마루 작은 공원에는 백우산 어깨너머로 햇살이 비껴든다.
하지만 해발 580m의 바람은 아직 차다. 백암산 등반의 들머리이며 쉼터인 공원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자그로마을’은 ‘광암리’의 다른 이름이다. ‘너벙바위’에서 ‘광암리’란 이름이 생긴 것처럼 ‘광암리’에는 돌과 너벙바위(넓은바위)가 많다. 해발 450m이상의 고지대이면서 바위와 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산악지대임을 뒷밭침하는 뜻이리라.
탑처럼 쌓아놓은 괘석(卦石)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런 까닭에 ‘광암리’를 ‘괘석리’라고 부른다. ‘웃괘석리’, ‘황철동’, ‘싸리재골’, ‘벌아우’, ‘느와터’, ‘덕무터’, ‘너벙바위’, ‘장가터’, ‘점바우터(점방아터)’, ‘다락터’, ‘샛골’, ‘영가대’, ‘광산골’, ‘가족이’, ‘작은군넘이’, ‘큰군넘이’를 합쳐 광암리라 한다.
그중 ‘윗괘석리’, ‘황철동’, ‘싸리재골’, ‘벌아우’, ‘느와터’, ‘덕무터’와 ‘너벙바위’의 일부가 군부대지역으로 수용되어 모두 이주하여 사람이 살지 않고, ‘작은군넘이’는 화전정리로 마을사람들이 모두 떠나 길마저 끊긴 상태다.
골이 얼마나 깊고 많았던지 너벙바위 안쪽에만도 5개 반이 있었고, 너벙바위 어귀에 학교가 세워졌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래서 ‘두봉산 이시미’ 같은 이야기가 생겨날 정도였다. 이시미는 용이 되지 못한 커다란 구렁이를 말한다.
이 이야기는 너와집이 많아 ‘느와터(영와대:靈瓦垈)’라 불리는 골짜기(아랫느와터, 윗느와터, 덕무터)중에서 ‘덕무터’에 살고 있었던 한 여인과 이시미의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150여년 전 ‘덕무터’에 김씨(이덕호씨 모친)라 불리는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느와터 골짜기를 따라 바라다 보이는 큰산을 ‘두봉산(頭奉山)’이라 불렀는데 그 산에는 이시미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어느 따뜻한 봄날 김여인은 두봉산으로 나물(두봉산에는 참나물과 나물취가 많았다고 함)을 뜯기 위해 다래끼(싸리나무로 타원형으로 엮은 바구니)와 점심을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두봉산에는 소문대로 참나물과 나물취가 이곳저곳 많이 있었다. 정신없이 나물을 뜯으며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김여인은 커다란 고목을 발견하고 이를 넘으려 하다가 그만 고목을 꾹 밟았다. 순간 커다란 고목이 꾸물거리고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김여인은 소문으로만 듣던 이시미로구나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김여인은 억지로 이시미를 보려 했으나 몸통만 보일 뿐 머리와 꼬리는 볼 수 없었다.
김여인은 혼이 나가 온 산을 헤매다가 어둑해져서야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여인은 원인 모를 병이 들었는데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지만 병세는 더욱 심해져만 갔다. 급기야는 무당을 불러다 굿도 몇 차례 해 보았지만 3년 동안을 시름시름 앓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또한 내촌사람들은 괘시기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만큼 많은 사람들이 괘시기에 살았다. 대부분 화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고 살길이 없어지자 정부에서는 화전을 허가해 주기도 했다. 그후 토지개간사업 집도 지어주고 삶의 터를 마련해주다가 화전정리 사업을 하면서 대책 없이 내몰았다.
다행히 너른 버덩을 이루었던 ‘윗괘시기(괘석리)’와 ‘황철동’, ‘느와터’ 일부지역에는 사람이 살았지만 군부대지역으로 수용되면서 강제 이주하게 된다.
그 후 주민들 간에 갈등을 겪게 되면서 광암리는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된다.
광암리는 산과 맑은 물과 기암괴석의 계곡, 무엇보다도 청정 자연을 바탕으로 한 무공해 산나물이 풍부하다. 이것은 마을의 동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 삶이 어우러진 삶의 터전을 만들자’는 것을 목표로 마음을 모았다.
마을에서 제일먼저 시작한 일이 365일 태극기 게양이다. 또한 금연운동을 펼치면서 산촌의 맑은 공기와 건강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작목반을 결성하여 마을 특화작물을 선정하여 소득을 높이는 한편, 노는 땅에 다양한 산나물을 심어 도시민들과의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마침내 새농어촌건설 우수마을로 선정된다.
대를 이어 광암리를 지켜온 토박이와 외지에서 광암리에 삶의 터를 잡은 사람 모두가 힘을 합쳤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자그로마을’로 바꾸었다.
‘자그로마을’이란 ‘자연 그대로’라는 뜻이다. 자연에서 쉬고 자연에서 먹거리를 찾고 자연에서 즐길 수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믿음이다.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하고 이를 위하여 농약살포를 금지하고 숯 농법과 목초액살포의 방법을 사용하여 병해충이 없는 무공해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또한 마을 자체적으로 공동퇴비장을 설치하여 나무를 이용한 톱밥을 발효시켜 퇴비로 사용하는 등 친환경농법으로 정성껏 기른 농산물을 도시민들의 식탁까지 오르도록 힘쓰고 있다.
광암리의 보물은 단연 ‘백우산’이다.
백우산은 눈 내린 겨울이 진경을 이룬다. 도관리, 답풍리, 화상대리에서 보면 두개의 봉우리와 좌우로 이어지는 능선이 날개를 펼치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하다. 그러나 광암리에서 보면 선이 부드러우면서 위엄을 갖춘 산으로 꼭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가족이고개’ 공원에서 땀을 식히고 발길은 백우산 아래 자리한 ‘다락터’로 향한다. 자그로마을 공원에서 조금 내려와 왼쪽으로 산자락을 끼고돌아 올라간다. 산자락 비탈에 집들이 다문다문 서있고 비닐하우스가 길게 늘어선다.
‘다락터’로 들어서면서 밭이 산 밑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로 잘록한 고갯길이 보인다. 가족이고개가 열리기전에 넘나들던 ‘우렁골고개’다. 화전 밭에서 거둔 곡식을 이고지고 내촌장에 나가 팔았다. 비료도 사고 생선도 사고 다시 ‘우렁골고개’를 넘어야 했다.
다락터는 백우산의 한 골짜기를 이룬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아랫말에서 보면 ‘다락’같다하여 붙여졌다. 다락골은 골이 깊다. 골짜기에는 아직도 좁은 산길이 남아있다. 이 길은 ‘군넘이(군유동)’로 이어졌다.
다락은 향수를 불러오는 말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다락터에 휴양촌이 들어섰다.
산촌지역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2004년 5도2촌(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산촌에서)’을 슬로건으로 산림청 공모과제에 선정되어 조성된 ‘백우산 휴양촌’은 백우산을 중심으로 산악형 분지 형태를 갖춘 무공해 청정지역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의 향수뿐만 아니라 생기를 충전할 수 있는 휴식터가 될 것이다. 전통숙박시설과 체험장을 비롯하여 다락골의 골짜기를 정비하여 산책로를 만들고 산책로 주변에는 돌배나무와 산약초와 산나물, 야생화를 심어 자연의 향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자연은 곧 숲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우러진 백우산 휴양촌을 둘러보며 비탈길을 휘휘 돌아 ‘가족이(가족동)’로 나왔다.
가족동은 ‘웃가족이’, ‘아랫가족이’로 나뉘었지만 지금은 뭉뚱그려 ‘가족이(가족동)’라고 한다. 가족동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은 백우산 자락의 다락골에서 시작된다. 마을에서는 이곳에서 제당을 짓고 제를 올렸다.
가족이고개에서 큰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오른쪽 산 아래 널부러진 너벙바위(너른바위)가 있다. 이름도 없지만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다. 이 바위 뒤쪽의 골짜기는 ‘영가대’다.
영가대를 지나면 포장도로가 시작되고 오른편 비탈에 빽빽이 늘어선 비닐하우스가 ‘점바우터골(점방아터)’ 안까지 이어진다. 점바우터에는 복바위라고 하는 ‘점바위’가 마당 한가운데 있었다한다. 땅이 팔리고 새 주인이 들어오면서 집을 지으며 바위를 파 옮겼다고 하는데 그 후 주인은 마을을 떠나고 폐가만이 흉물스럽게 남아있었다. 점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점바우터에는 옛길에 아직도 남아있다. 영가대로 넘던 고갯길과 샛골로 넘는 고갯길이 숲사이로 이어진다.
샛골에는 지금도 한 집이 살고 있다.
‘점바우터’에서 내려와 마을회관에 들렀다. 마을회관은 가족이의 중심이다. 회관마당에서 아이들이 돌탑 쌓기를 하고 널다리를 건너 발방아(디딜방아)를 찧으며 놀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을 아낙들이 모여 윷놀이를 한다. 한쪽 벽에는 자그로마을 새농어촌 건설운동 현황판이 걸려있다.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열두괘시기(괘석리) 타령’이 나온다.
“두촌에서 두두두 걸어서 거리뒷골을 지나 안뒷골에서 암탉을 잡아 너덜골까지 너덜너덜 걷다가 대명어터에서 대명이오 소리치고 달음재를 달음박질쳐 넘어 범의터에서 범을 잡고 웃괘시기(괘석리)에 와서 우쭐대다가 너벙바위에 넙죽 엎드렸다가 물굽이에서 물어서 가족이고개에서 가죽을 벗고 도관리로 들어서 도관으로 쏙 들어가네”
이 타령에는 열두 지명이 나온다. 두촌에서 내촌 도관리로 가는 여정의 지명이다. 혼자가는 길이 아니라 여럿이 가는 길이면서 하는 길놀이이자 시름을 덜어보고자 하는 노래다.
광암리와 괘석리에는 ‘터’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열둘이나 있다. 대명어터, 범의터, 잘부터, 느와터(샛느와터, 웃느와터), 덕무터, 장가터, 점바우터(전방아터), 다락터, 절터, 새터, 영수터, 금산아터다. 그래서 ‘열두 괘시기’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넘나드는 고개가 열둘이나 된다하여 열두 괘시기라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이야기하든 괘시기(괘석리) 하면 촌중에 촌으로 여겼다. 그만큼 살기 힘든 곳이었지만 장날 괘시기에서 나온 보따리는 서로 가지려고 싸우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살기는 어려웠어도 화전 해 먹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그때는 조이밥(조밥)이라도 나누어 먹을 만큼 인정이 두터웠으나 요즘은 돈이 최고인 시대라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도 빼앗는 시대라 더 무섭다고 한다. 그게 병인데 그걸 치료하려면 자연을 배우는 것 밖에 없겠다.
마을에서 펼치는 5도 2촌이 바로 그 사업이라 한다. 닷새는 도시에서 살고 이틀은 촌에서 사는 삶이다.
마을회관에서 나와 아이들과 같이 돌탑을 쌓고 널다리를 건너며 놀다가 다시 길을 내려왔다. ‘점바우터’ 건너편은 ‘광산골’이다. 지금도 금광을 캐던 굴이 남아있다. 금광까지 오르려면 비탈 밭을 걸어 올라가야한다. 가파르고 힘들지만 밭에 산나물을 심어 놓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물을 뜯다보면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갈 수 있도록 ‘산나물 체험장’을 만들었다.
‘광산골’에서 능선을 넘으면 ‘작은군유동(작은군넘이)’이다. 한때는 삼십호 정도 살았다고 한다. 화전정리로 모두 떠나고 낙엽송을 심었는데 요즘 간벌을 한다고 해 들어가 봤더니 베어 넘긴 나무가 얼크러져 다니지도 못할 정도다. 지금은 ‘작은군유동’으로 가는 길은 모두 끊기고 나무가 잔뜩 우거졌다.
‘점바우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마을회관 아래쪽 골짜기로 흐른다. 아직 얼음이 하얗게 덮혀 있지만 얼음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에서 봄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길을 걸어 내려오다가 샛골로 오르는 밭 둑서리에 높게 쌓인 탑이 보였다. 혹시 하여 가 보았더니 밭에서 나온 바위를 쌓아 올린 탑이었다. 괘석리에서는 돌탑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찐빵 같기도 하고 보름달 같은 바위를 얹어놓은 괘석도 있다.
처음 답사를 했을 때는 메밀밭 가운데 초가집이 있어 보기 좋았는데 다시 들어갔을 때 보니 초가집은 보이지 않았다. 약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물구비’까지 내려왔다. 가족동과 너벙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구비구비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산모롱이를 도는 길이다. 괘석리의 유일한 가게이다. 담배 가게로 더 알려졌다. 오래되기도 하였지만 마을의 안내소이기도 하다.
군유동으로 가려면 물구비에서 개울 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가족이를 가르며 흘러온 개울과 달음재, 범의터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윗괘석리에서 흘러온 강으로 흘러든다.
물구비를 돌아 ‘장가터’로 간다.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마을에 장가를 들지 못한 노총각이 홀로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한밤중에 집도 부모도 잃은 처녀가 찾아와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청하여 노총각은 방이 하나뿐이어서 재워줄 수가 없다고 하자 처녀는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느냐고 마루라도 좋으니 재워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음씨 좋은 노총각은 방을 내주고 자신은 부엌의 덤불더미에서 잠을 청하였다. 그때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깨 내다보니 방에서 자던 처녀가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혹시 구미호가 아닐까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숨죽이고 있는데 처녀가 다가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고 애원하였다고 한다. 노총각은 반신반의 하였지만 마음대로 하라고 승낙했다고 한다.
이튿 날 아침이 되자 처녀는 물을 길어와 밥을 하고 뒷밭에 나가 나물을 뜯어 반찬을 만들어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 맛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밥을 밥답게 먹은 노총각은 처녀와 혼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내의 내조로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아들 둘을 낳았다. 마침내 살만큼 재산이 늘었다. 게다가 아내의 배가 또 불러오고 비로소 노총각은 세아이를 보게 되었다. 오랜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처녀는 ‘셋째아이의 성을 자신의 성인 장씨로 지어줄 것을 부탁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장’가가 나온 곳이라하여 ‘장가터’라 부르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장가터는 마을의 입구이자 출구이다. 다리를 건너면 두촌면 괘석리 탑거리이고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들면 윗괘석리로 오르는 ‘너벙바위’다.
아직은 괘석리다운 말씨가 남아있어 정겨운 마을이다. 가족이, 괘시기, 점방아터, 물귀비, 너벙바우, 능와터, 범우터, 벌아우 등 많은 골의 이름들이 옥씨기(옥수수), 배차(배추), 무수(무), 나생이(냉이), 쏙새(씀바귀) 같은 말들과 어울려 입안에서 감돈다.
정감 어린 말들이 아닌가? 괘시기를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용수계곡의 물길처럼 맑고 싱그럽다.
이제 광암리와 괘석리의 백미를 이루는 용소계곡으로 들어선다.
활개를 치며 흘러내리는 용소계곡을 따라 길을 간다. 그 시발점은 ‘연애바위’다.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바위사이로 흘러가려는 것이다.
아직은 물이 차다. 바위와 물이 이루어내는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흐르는 물은 뜨겁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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