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괘세기(괘석리)는 어디일까? 어디를 가야 만날 수 있을까?
두촌면 괘석리 ‘달음재’를 넘어 산양목장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다. 지난번에 답사를 하지 못한 괘석리 폐사지를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탑동’으로 들어섰다.
괘석리 폐사지(掛石理 廢寺地)의 흔적들을 찾는다. 기록에도 없고 자료도 없다. 마을에서도 고향산(관향산) 기슭에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뿐이라며 절이 있던 터가 어디인지 꼭 짚어주질 못한다.
과연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구전일까? 반신반의하며 절터를 찾아 올라갔다. 절터를 찾아 오르는 길 둔덕에는 ‘범의터’에서 이사 나와 집을 짓고 사시는 어르신네가 밭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이 부근에 절터가 있었다는데 어디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여쭙자 ‘나를 따라오라’며 앞장서 산으로 오른다.
요즘에도 밭을 갈다보면 기와도 나온다는데, 대학이다 뭐다하며 답사를 온 사람들이 다 주워가고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며 말끝을 흐린다.
탑동으로 오르며 궁금한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현재 홍천군의회 옆 공원에 세워진 ‘홍천 괘석리 사사자탑’이 이곳에 서있던 탑을 이전한 것이며, 절이 언제까지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르신네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군청(탑을 이전해 올 당시에는 홍천군청이 지금 홍천상하수도사업소 건물이었다. 홍천군청-홍천읍사무소-홍천상하수도사업소) 앞에 세워진 홍천 괘석리 사사자탑은 이곳에서 이전했으며, 절터는 밤나무 뒤쪽이라고 하신다. 거기에는 지금도 구들장을 놓았던 돌들이 있다고 하셨다.
어르신네가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가 둘러본다. 구들장은 물고랑이 나면서 들어나게 된 것이고 도랑 건너는 돌각사리 밭이었다. 아직 밭에는 걷어내지 못한 비닐이 그대로 덮여 있었다.
구들장이 놓인 곳으로 올라가 둘러보다가 받침으로 놓였을 법한 석물을 하나 찾았다. 어르신네는 여기서 처음 본다며 놀라워하신다. 절터 주변에는 이렇다할 유물은 찾지 못했다.
지금 폐사지로 전해지는 절터 뒤쪽 고향산 중턱에도 절이 있었다고 하신다. 절을 옮긴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나면서 불에 타 없어지고 그 절에 있던 석불(?)이 바위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가보니 없어졌다고 한다.
탑동 뒤 ‘절재’를 넘으면 ‘벌아우’ 어귀가 나온다.
어르신네와 폐사지를 둘러보며 ‘그때 왜 탑을 그리로 옮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어르신네의 안내를 받으며 들려주신 이야기를 메모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노루목’을 돌아 두촌 괘석리와 내촌 광암리의 경계의 다리를 건너 광암리 ‘장가터’로 들어섰다. 괘석리는 두촌 괘석리와 내촌 괘석리가 있다. 황철동 윗괘석리는 내촌 괘석리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은 황병재로 이어지는 윗괘석리 길이었다. 길은 이정표와 함께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윗괘석리 길이다. 포장이 되지 않은 좁은 샛길이다.
참 오랜만에 걷는 오붓한 길이다. 암반이 깔린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에 섞여 맑고 시원하다.
조금 올라가면 계곡으로 내려가는 옛길이 있어 내려가니 다리가 놓여 있다. 지금은 다니지 않는 다리다. 이 다리는 두촌 괘석리와 내촌 괘석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다. 두촌 괘석리에서 협성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건너다녔던 다리였으며 윗괘석리로 가던 다리목이었다.
다리에서 바라보면 너른 바위와 바위사이로 흐르는 푸른 물빛의 물소리가 들린다. 일명 ‘연애바위’다. 아이들에게는 여름철 물놀이터였고, 동네 처녀 총각들에게는 연애를 나누던 밀애장소였으리라.
다시 윗괘석길을 걸으며 개울 건너 산위를 바라보니 산마루에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선바위’ 혹은 ‘독바위’라고 하는 바위다. 산마루를 따라 잘록한 산마루에는 탑거리에서 넘나들던 고개가 있다. 학교가 생기면서 아이들이 개척한 고개인데 ‘탑거리고개’라 한다.
탑거리고개를 바라보며 길을 좀 더 오르면 개울 건너 둔덕에 학교가 보인다. 내촌초등학교 협성분교다. 지금은 페교되었다.
협성초등학교의 전신은 ‘갈잎학교’다. 마을의 유지들에 의해서 세워졌던 갈잎학교는 범의터를 넘는 작은양병소 아래 세워졌지만 광암리에서 다니는 아이들이 더 많아지자 학교를 너벙바위 근처로 이전하게 된다. 그러다가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고 오늘에 이르게 된다.
학교에 오르는 길 옆 한가운데는 큰 바위가 놓여있다. 어떤 사람은 그 바위가 너벙바위라고도 하기도 하는데 서른명 정도가 둘러앉아 놀 수 있을 만큼 넓다. 그 바위를 지나 올라가면 폐교안내문이 서있고 학교 현판을 뗀 교문이 서있다. 작고 아담한 운동장에는 시이소오, 미끄럼틀, 늑목, 철봉, 축구골대가 녹이 슨 채 그 자리에 서있고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은 온갖 풀들이 한길씩 널브러졌다.
학교 앞 화단에는 향나무가 긴 가지를 내밀어 ‘책 읽는 소년 소녀’의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이승복 동상은 조금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이순신장군은 숲속에 숨어 적을 응시하는 듯 하다. 창문너머 교실 안을 들여다보니 칠판에 이름이 쓰여 있다.
그리운 이름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학교를 다시 찾아 왔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그 옛날처럼 학교 길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학교로 들어가는 길은 막혀있다.
다시 길은 너벙바위로 향한다. 펜션을 지난다. 이 펜션은 방앗간과 가게가 있었던 자리다. 느와터와 황철동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곡식을 타개거나 빻는 일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창구였다. 가게는 세집이 있었다.
펜션을 지나면서는 쑥대밭이 널부러진다. 창고와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팻말과 차단기가 설치돼 있지만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물레방아터’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군수용지역으로 묶이면서 모두 이사를 하였다. 골짜기에 펼쳐진 버덩치고는 무척 넓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고 본다. 이곳 어딘가 너벙바위가 있다. 광암리(廣岩理)가 너벙바위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듯이 너벙바위를 찾아 나선 길이니 만큼 꼭 찾아보고 싶다.
너벙바위는 느와터 가는 어귀 밭 가운데 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 갈림길에 섰다. 오른쪽은 ‘느와터’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윗괘석리로 가는 길이다.
느와터로 들어서서 너벙바위를 찾아본다. 너벙바위는 넓은 바위를 말한다. 넓은 둔덕의 오르막을 지나 산 밑으로 돌아드는 길에 서서 버덩을 둘러본다.
쑥대밭을 이룬 버덩 한가운데 큼직한 바위가 놓여있다. 바위로 다가가보니 말로 들어 상상한 만큼 크진 않다. 협성분교 앞에 놓여있는 바위보다 조금 더 크다고 생각된다. 밭 가운데 놓여있어 사람들이 놀러오거나 이곳에서 천렵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밭일을 하다가 참이나 점심을 차려 먹는 정도였다고 한다. 바위로 올라가보니 삼십명 정도 둘러앉을 정도다.
너벙바위를 지나 느와터 길로 들어섰다. 언 땅이 녹아 질척하다. 그런데도 바퀴자국이 많이 나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에 누가 무엇을 하러 들어왔을까? 그런데 지프차가 내려온다. 바퀴에는 진흙이 말이 아니다. 어디 다녀오느냐고 물어보니 오프로드(Off Road) 탐사하러 나왔다고 한다.
이곳이 오프로드(Off Road) 랠리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군부대로 편입이 되면서 골짜기에서 살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다. ‘김부리’, ‘갑둔리’ 지역은 포장되어 있지만 ‘가마봉’, ‘소뿔산’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문내치(문안고개)’와 ‘황병재’, ‘싸리재’를 넘던 길은 비포장인데다가 경관이 아름다워 오프로드 매니아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군부대지역이고 출입통제 지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이곳은 청정 자연생태계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환경에 피해를 주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느와터로 들어선다. 개울이다. 계곡의 얼음이 녹으며 덧물져 얼음위로 흐른다. 하얀 얼음위로 흐르는 물빛이 옥빛이다. 물소리 또한 맑다.
개울을 건너면 ‘가리장골’로 들어선다. 가리장골은 느와터 어귀다. 너벙바위 갈림길에서 ‘염탱이’ 어귀까지인데 골이라기보다는 너른 버덩이다.
지도와 마을사람들이 알려준 지명과는 맞지 않아 지도상의 지명을 잠시 따라간다. 너벙바위에서 느와터로 오르는 길은 지도에는 황철동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을에서 황철동이라고 이야기하는 골짜기는 싸리재골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를 따라간다. 황철동으로 들어서서 ‘백암산’과 가마봉사이의 고봉준령은 ‘문내치(문안고개)’다. 또 윗괘석리로 들어서서 황병골로 넘는 고개는 황병재고 오미자골로 넘는 고개는 지명이 나와 있지 않다.
어느 것이 맞느냐 하는 것보다 일단 길을 따라 오르기로 했다.
느와터골을 따라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는 ‘염탱이’다. 놀리는 말인 듯한데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며 염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던 골짜기가 아니겠느냐고 덧붙인다.
염탱이를 지나 올라가면 왼쪽으로 제법 넓은 길이 나 있다. 이 골짜기가 ‘샛느와터’다. 느와터는 ‘웃느와터’와 ‘샛느와터’가 있다. 느와집(너와집)이 많았다 한다. 한 스님이 ‘두봉산’에 산당을 지어야 동네가 화평하다 하여 산당을 느와집으로 지었다 하여 ‘느와터(능와터)’ 또는 ‘영와대(榮瓦臺)’라고 한다.
샛느와터를 지나 골막은 ‘덕무터’다. 다시 능선을 넘으면 ‘아래황철골’이다.
윗느와터를 따라 골막으로 들어서면 두봉산 뒷자락인데 두봉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고개가 있다. 왼쪽으로 넘는 고개는 ‘큰고개(서곡리 괘석골)’로 넘게 되고 오른쪽으로 넘는 ‘작은고개(느와터고개)’는 ‘전방아터’를 거쳐 도관리로 이어진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 어느 원님이 넘어 갔다 하여 ‘원너미고개’라고도 한다. 느와터에서는 작은고개를 넘어 내촌중학교를 다녔다.
다시 길을 돌아내려와 ‘윗괘석리’로 들어섰다. 갈림길에서 둔덕을 넘어가니 너른 버덩이 펼쳐진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밭 가운데 서 있는 밤나무가 쓸쓸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너른 버덩을 감돌아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 고향산(관향산) 능선이 소등처럼 이어진다. 그 사이로 절재로 넘는 고갯길이 보인다.
길은 다시 계곡과 만나고 다리를 건넌다. 시멘트 다리가 놓여진 걸로 봐서 계곡의 깊이와 사람들이 얼마나 살았는지 짐작이 간다. ‘벌아우’는 ‘싸리재’ 어귀까지 이어지는 곳이다. 싸리재에서 ‘샛골’로 들어서면 범의터 ‘댓골’로 이어진다.
벌아우 다리를 건너면 길은 다시 윗괘석리와 황철동으로 갈라진다. 그 중심에는 ‘양지황철봉’이다. 마을에서만 부르는 가마봉과 소뿔산 사이의 봉우리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황철동(지도상에는 싸리재골)이고 곧장 올라가면 윗괘석리다. 윗괘석리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개울을 이룬 계곡에는 바위와 너래바위가 깔려있다. 계곡의 바위틈에 둥지를 튼 물까마귀가 낯선 발자국 소리에 놀라 날아간다.
황철동 골짜기는 어둔 그림가가 서려있다. 숲이 무성하다.
황철동으로 들어섰다. 황철동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버덩이 시원하게 열린다. 숲속임에도 경치가 좋다. 예전에 구리원료를 생산하는 철광이 있었다고도 하며 ‘황청골’ 또는 ‘황정골’이라고도 불려진다.
황철골에는 ‘신바위골(흰바위골)’과 ‘잘부터’가 있다. 능선을 사이에 두고 골짜기를 달리하지만 골막에서는 다시 만난다. 어느 골짜기로 들어서든지 길은 ‘문내치(문안고개)’로 이어진다. 문내치를 넘으면 인제 상남 ‘문안골’이다.
‘잘부터’는 ‘절구터’라고도 하는데 남의 눈을 피해 연애를 하러 드나들던 부락 사람들이 성사가 잘 이루어지거나 아기가 잘 들어서 붙여진 골이다. 이곳에서 연애를 한 사람들이 마을에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괘석리에서는 서로 챙겨주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신바위골’에는 흰바위가 솟아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내치로 오르는 고갯길은 심마니들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각구생’이니 ‘각후봉’이니 하는 이름의 골짜기가 있다.
이곳에 한때는 목장이 다섯군데나 있었다 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픈 생인가? 구비를 돌면 신바위가 보일까 하는 기대감에 젖어 보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다시 윗괘석리로 접어든다. 길이 만만치 않다. 여기저기 파인 웅덩이에 물이 고여 질척하다. 신발이 한 짐이다. 눈 앞에 소뿔산이 나타난다. 치마를 두른 듯한 바위봉우리는 누룩바위다. 봉우리를 바라보며 계곡을 따라 오른다. 능선과 능선이 만나 이루는 선이 부드럽다. 독바위는 소뿔산 등산로 옆에 있다. 세 길은 됨직한 커다란 바위는 비스듬히 놓여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줄을 둘러매서 당기면 움직일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나쁘게 먹은 사람에게는 꿈쩍도 안하고 착한 사람이 당기면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개울가에는 버들강아지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윗괘석리 막창은 황병재로 이어지고 재를 넘으면 인제 김부리다. 고개 중턱 그쯤에서 물이 길을 열어 용소계곡을 이룬다.
황병재 아래는 너른 버덩을 이룬다. 한때는 소들을 놓아기르던 목장이 지금은 녹음방초가 되었다. 그때 소들을 관리하느라 타고 다니던 말들을 그대로 풀어 놓고 목장은 문을 닫았다. 어느덧 그 말들은 야생마의 무리를 이루며 골짜기를 누볐다.
말들은 나물을 뜯으러 갔던 사람들을 따라다녀 놀래키기도 했다. 그런 소문이 신문과 TV를 타고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말들이 사라졌다. 어인 일일까?
그 길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길이지만 말들은 사라졌고, 바퀴자국만 깊다.
홍천강의 한 지류를 이루는 용소계곡은 광암리 윗괘새기(괘석리)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황철동(싸리재골)과 느와터(영와대)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쳐 비로소 용소계곡의 비경을 만들어낸다. 그 물줄기를 따라 ‘자그로마을’로 들어선다. ‘자그로’ 그 뜻은 뭘까?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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