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지방도로를 따라 괘세기(괘석리)로 들어간다. 괘석리면 괘석리지 왜 괘세기일까? 마을사람들도 괘석리라는 말보다 괘세기란 말에 익숙하다. 괘석리에 들어와서 느낀 감회지만 촌스럽다. 그러나 그만큼 삶의 고달픔이 묻어나는 듯하여 오히려 정겹다.
괘석리 기행은 광암리와 함께 용수계곡을 따라 내려갈 생각이다.
길을 나서는 아침 바람이 한결 누긋하다.
봄이 가까이 오고 있는 탓일까? 어치나 개개비의 울음소리도 맑고 콩새와 때까치 지바귀의 날갯짓이 가벼워 보인다.
괘석리로 가려면 내촌면 도관리를 지나 ‘가족이고개’를 넘는 길과 지금 가고 있는 내후동을 지나 ‘달음재’를 넘는 길 뿐이다.
괘석리에서는 내촌장이나 두촌장을 주로 보러 다니지만 홍천장에서 나물이나 약초 열매 등을 이고지고 나오는 사람들 중 괘석리에서 나온 사람들은 스스로 촌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오지 중에 오지였다.
2001년 수해가 나고 길이 확포장 되었지만 아직도 내촌면 도관리에서 광암리로 가는 길은 좁고 포장되지 않은 길도 감내해야 한다.
괘석리는 두촌면 괘석리와 내촌면 괘석리로 갈라진다. 그 경계는 강을 이루는 계곡이다.
용소계곡이라 불리는 이 물줄기는 산과 바위와 물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가히 한국의 알프스라 부를만하다.
괘석리의 자랑이라면 산악 고원지대다. 소뿔산과 가마봉과 백암산과 백우산이 괘석리와 광암리를 에두르고 있다. 높고 험한 준령들이 만들어낸 계곡마다 암반을 이루고 있고 그 위로 흐르는 물줄기는 폭포를 이루다가 여울을 이룬다.
보름동안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계곡의 얼음은 녹고 그 위로 물이 흘러내린다. 골짜기마다 푸른 물빛이 산울림을 한다.
물소리가 그립다.
그리움은 찾아오는 생물이다. 살아있는 몸짓으로 온다. 버들강아지처럼 자신의 눈을 열고 온다. 여린 입술을 오물거리며 울며 온다. 제 살을 찢고 몸을 밀어 올리는, 그 힘이 불끈불끈 내 몸 어딘가를 더듬는다.
괘석리를 찾아가는 들머리는 ‘외후동’이다.
‘원동 삼거리’에서 갓길로 접어들어 ‘외후동(거리뒷골)’을 지나고 ‘내후동(안뒷골)’을 지나 ‘대명어터’로 접어든다.
괘석리와 만나는 어귀는 ‘철물나들이’다. 철물인지 첫물인지 나를 받아들이는 어감이 좋다.
괘석리와 내후동의 경계는 ‘속사메기’이다. 암반으로 깔린 계곡이라 가파르고 넓다. ‘가마봉’과 ‘수리봉’, ‘건니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의 한줄기다. 몇 년 전까지는 조그만 다리였지만 수해가 난 이후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놓고 ‘괘석교’라는 이름을 달았다. 계곡은 깊다.
내후동(안뒷골)을 지나 대명어터로 들어서면 개울건너 산그림자가 서늘하다. 뒤로는 ‘대명산’이 있고 대명산에서 금맥을 캐내던 ‘대명광산’이 있었다. 당시 전국 금광 가운데 채광량 제일을 자랑하던 광산이었다.
대명광산(동양 홍천 금광)에 금을 캐러 찾아드는 사람들로 ‘신흥동’으로 불리게 된다. 홍천군에서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오고 금광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금광굴은 지난 수해로 모두 붕괴되었다. 길가의 작업대기소가 금방아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대명산을 중심으로 곳곳에 금광의 흔적만 있을 뿐 문을 닫은 상태다.
또한 대명어터는 ‘마의태자’와 관련이 깊다. 마의태자가 신라 국권 회복이라는 큰 뜻을 품은 데서 대명(大明 혹은 大命)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또한 어(御)라는 임금을 뜻하는 말이 붙어 대명어터가 된다. 따라서 ‘대명어터’는 큰 뜻을 품은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대명어터는 ‘달음재’를 넘는 너른 둔덕을 이루고 있다. 일설에 큰 뱀이 많았다 한다. 지금은 10가구가 채 되지 않지만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는 한 집 밖에 없다. 몇 번이고 찾아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마을에 대한 부분적인 지명이나 골짜기에 얽힌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명어터는 ‘너덜골’과 ‘괘석골’이 있다. ‘너덜골’은 ‘큰너덜이’, ‘작은너덜이’로 갈라진다. ‘너덜’이란 원래 ‘너덜겅’이다.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을 말하는데 줄여서 ‘너덜’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돌무더기가 많고 골짜기도 갈래갈래 갈라진다. 그 중심에는 대명산이 있다.
‘괘석골’은 ‘너덜이’ 건너편 골짜기다. 지금은 아무도 안 살지만 ‘인제 어론’으로 넘나들던 고갯길이었다.
‘대명광산’은 ‘금방아터’ 건너쪽으로 띠를 이룬 산비탈이 보이고 그 사이로 작은 골짜기가 보인다. 수해로 무너진 굴을 따라 방천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작은 골짜기를 따라 들어서면 금을 캐던 굴로 이어진다.
지금은 다 매몰되었거나 수해에 쓸려 나갔다.
금방아터가 있었던 작업대기소를 지나 ‘전나무골’ 어귀에 들어선다. 골을 따라 산마루가 ‘작은가마봉’으로 이어진다.
‘달음재’ 고갯마루 못미쳐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길 어귀에는 누군가 집을 지으려는지 터를 잘 닦아 놓았다.
전나무골 어귀는 ‘마답터’다. 말을 풀어놓고 기르던 자리였는데 아마도 마의태자가 신라 국권회복을 위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말을 기르던 곳으로 여겨진다.
전나무골은 골이 깊다. 들어갈수록 골짜기도 많지만 아쉽게 골짜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골막은 ‘가마봉(작은가마봉)’으로 이어진다. 그 골짜기에서 물이 시작되고 흘러내린다.
대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전나무골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고 내후동을 적신다.
계곡을 이루는 수많은 돌들과 바위들은 괘석리 사람들 삶의 단면을 말해 주는듯하다.
대명어터의 고갯마루는 ‘소뿔산(우각산)’과 ‘대명산’ 사이에 있는 ‘달음재’다. 마을에서 꽃동산 소공원을 조성하였다. 잔디를 심고 정자와 비석이 하나씩 세워져 있다. 비는 박구장원약기념비(朴區長元若紀念碑)이다. 비의 왼쪽 부분에는 영숙 흥학(營塾 興學)이라는 글이 보이고 그 아래 부분은 파손되었다.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숙식을 하며 흥학을 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좌측면에는 소화칠년 구월 일(昭和七年 九月 日), 우측면에는 괘석리 유지( 掛石理 有志)라고 쓰여 있다.
‘달음재’의 다른 이름은 ‘다은동(多隱洞)’, ‘월림골’, ‘월림동(月林洞)’, ‘월은동(月隱洞)’이다. 달음재는 달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달음재의 옛길은 길고 멀었다. 수많은 골짜기를 지나고 능선사이를 지나야 했다. 특히 달이 뜬 밤에도 달은 산에 가려 숨었다 나왔다 반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환한 달밤에도 고개를 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대명산이 대명(大明)이든 대명(大命)이든 간에 꿈이 서린 터임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서는 달처럼 숨어서 몸과 마음을 닦아야만 했을 것이다. 지나친 유추일까?
달음재를 넘으면 ‘달음재마을’이다. 고개를 넘어서자 왼편쪽으로 감자저장고가 있다.
산기슭에 터를 잡은 집들과 우사가 눈에 띈다. 조용하다. 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괘석리 표지석이 있다. 또한 ‘범의터’로 가는 길과 함께 산양목장의 초원이 보인다.
목장을 가다보면 서낭당 같은 둔덕을 지나게 되고 길 아래에는 비석들이 서있는 묘역을 지나게 된다. 서낭당 같은 둔덕은 박구장의 송덕비가 세워졌던 터다. 무너지고 숲이 우거져 있다.
송덕비는 원래 고갯마루 지금의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박구장의 집 뒤쪽으로 ‘갈잎학교’를 세우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간직할 수 있도록 오가며 볼 수 있는 이곳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수해복구와 함께 길이 확포장 되면서 원래의 자리로 간 것이다.
마을에는 이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비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고 한다.
비석터 아래 묘역은 원래 박구장의 집이었다. 대궐 같은 큰집이었다. 양조장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훈학을 하다가 땅을 희사하여 학교를 지은 것이다. 집이 먼 아이들은 이 집에서 머물며 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단양 우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갈잎학교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갈잎학교 뒤쪽은 ‘양병소’다. 지금은 숲으로 우거져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마의태자가 군사를 모아놓고 훈련시켰다고 한다. 양병소는 범의터에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 왕건의 눈을 피해 군사들을 훈련시키기에는 좋은 자리였다.
길을 따라 ‘범의터’로 간다.
축사에서 나온 산양들이 무리를 지어 나와 눈 녹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다. 푸른 잎사귀의 풀잎은 보이지 않는데 뭔가 뜯어먹는다. 어린 양들은 서로 이마를 맞대며 힘껏 부딪힌다. 그러다가 다시 바위투성이의 산위로 뛰어 올랐다가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줄달음쳐 내려온다. 어미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던 무리들도 집으로 내려온다. 어미를 따라 가다 서다 한다. 어미는 땅에 끌릴 듯한 큰 젖통을 매달고 무리 속으로 달려간다.
괘석리 산양목장의 풍경이다.
30여가구에 6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괘석리는 ‘소뿔산(1,118m)’, ‘가마봉(1,191m)’, ‘백암산(1,099m)’의 삼각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선 처음엔 젖소를 사육했다. 1982년 농림부로부터 초지 조성자금을 지원받아 천연림에 초지를 조성했다. 사육 여건은 좋았으나 우유 수송에 문제가 생겼다. 우유는 신선도가 생명인데 당시만 해도 서울까지는 6시간이나 걸렸다. 이후 한우를 사육했으나 90년대 초반 소값 파동으로 생산기반을 모두 잃었다.
산양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92년부터다. 해발 700m의 산악지대인 지형조건과 산양의 특성을 살려 홍성기(전 홍천군의원)씨가 뉴질랜드에서 산양 50마리를 들여왔다. 이를 바탕으로 1996년엔 작목반이 결성되었다.
산골 오지의 괘석리가 자연과 인간이 어울리는 고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성기열 덕산농장 대표 등이 산양 사육에 뛰어들면서 괘석리가 산양마을로 자리를 잡게 됐다. 60만평의 초지에 2,000여마리의 대규모 산양이 사육되는 고장으로 우뚝 서게 됐다. 하지만 산양유, 비누 등 가공품 사업이 실패하고, 산양유 공장도 타지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목장들이 타지로 이전하고 사육두수도 줄어, 현재는 초원목장 등 2곳만이 운영되고 있다. 산양도 250마리~300마리 정도로 줄었다.
한때 마을에서는 우리민족 서로 돕기의 일환으로 매년 1,000마리의 산양을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괘석리 산양은 현재 ‘금강산 인근 온정리’ 야산에서 사육되고 있다. 산양을 금강산 온정리로 보내면서 당시 북한 어린이들의 영양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참고로 이곳의 산양은 우리산천을 뛰어놀던 산양과는 다르다. 또한 대관령 양떼 목장의 양들과도 다르다.

‘산양은 1968년 11월20일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몸집이 작다. 안선(顔腺)이 없고 암수 모두 뿔이 있다. 겨울털은 회색을 띤 노란색이다. 주둥이에서 머리 뒤쪽으로 검은색을 띠고, 머리 옆과 입술은 회색을 띤 갈색에 검은색이 섞여 있다. 입술의 다른 부분은 희고, 뺨은 검은색이며, 목에는 흰색의 큰 반점이 있다.
귀는 길고, 겉면은 엷은 쥐색이며, 밑부분은 어두운 초록색을 띤 갈색이고, 안쪽은 흰색이다. 몸 뒤에는 짧은 갈기가 있으며 검은색을 띤다. 어깨로부터 무릎에 이르는 곳에 검은색의 띠가 거모(距毛)까지 이어져 있다. 꼬리의 윗면은 갈색이고, 아랫면은 흰색인데, 꼬리 끝에는 흑백의 긴 털이 있다.
설악산·대관령·태백산과 같은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산림지대에 서식하며,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2∼5마리가 모여 군집생활을 한다. 바위이끼·잡초·진달래·철쭉 등의 잎을 깔아놓고 4월에 2∼3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산양목장은 범의터로 오르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 산양 목장의 뒤편 봉우리는 소뿔처럼 뾰족하다. 이름은 없다. 마을에서는 ‘치마바위산’이라고 한다. 바위가 치마를 두른것처럼 산뿌리를 감싸고 있다.
‘달음재’에서 ‘범우터’로 넘는 고개는 ‘국수당고개’다. ‘국수당’은 ‘서낭당’이란 평안도 지방의 방언이다. 그럼에도 그 말뜻을 아는 사람도, 서낭당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고개를 오르는 구비가 가파르다. 얼음은 다 녹았지만 지난 겨울 내린 눈길에 뿌린 모래가 고개 마루까지 흩어져 있다. 지금은 오르는데 미끄럽기까지 하다.
고개에 올라서면 산 아래쪽으로 넓은 밭이 펼쳐진다. ‘큰양병소’다. 그냥 내팽개친 배추포기들이 누렇게 말라있다. 고춧대와 옥수숫대가 마른 대궁을 창처럼 세우고 있다,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살던 집들은 모두 비어있다.
양병소 둔덕을 따라 내려오면 길옆 묵밭에 바위가 하나 놓여있다. 마을에서는 ‘개구리바위’라고 한다. 뭔가를 삼킨듯한 표정의 개구리바위에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부자집에서 소를 매어 놓고 저녁때 끌러 가보니 소가 없어졌더란다. 다만 주변에 커다랗게 개구리 발자국이 나있어 따라가 보니 집채만한 개구리가 소를 삼키고 있더라구. 주인은 무서워 집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 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개구리를 닮은 커다란 바위가 지금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개구리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개구리바위를 지나면서 산 위에서 들려오는 산양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괘석리에서 처음에 이곳에 산양을 방목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전을 하지 못한 몇 가구만이 아직 산양들과 함께 살고 있다. 언젠가는 떠나겠지만 낯선 방문객의 발자국소리에 개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짖어 댄다.
목장으로 들어서자 젊은 처녀가 나와 누구며 온 이유를 묻는다. 길 따라 여기까지 왔으며 양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들어 왔다며 사진 좀 찍겠다고 하자 사장님이 안 계신다며 안된다고 한다. 그러면 둘러만 보겠다고 하자 얼른 둘러보고 가라며 집으로 들어간다.
산양들은 나를 모른다. 나도 산양들을 본 적이 없다. 낯설게 다가가자 낯설게 운다. 산양들이 울며 다가온다. 내 몸집에 갑절은 될 듯한 짐승의 울음. 그 울음만큼 떨리는 가슴이 철망을 사이에 두고 바라본다.
산 밑까지 오르는 비탈진 목초지에도 산양들이 몰려다니며 풀을 뜯는다.
양떼 목장과 탑골 사이는 ‘새버덩’이다. 돌을 캐내고 밭으로 일구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새들이 날아와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탑골’은 소뿔산에서 ‘치마바위(산양목장뒤 봉우리)’와 ‘고향산(관향산-괘석리사지가 있다)’ 사이를 지나 ‘탑거리(괘석2리)’로 이어진다.
활처럼 굽은 새버덩 길을 따라 걷는다. 떠나고 남은 이곳의 관리인이라며 쉰은 넘어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온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장작더미와 컹컹 짖어대는 개, 간단하게 끓여먹을 수 있는 살림살이가 봉당에 널려 있다.
관리인의 집 옆으로 좀 넓은 골짜기는 ‘이마터’다. 골짜기 이름보다는 지형이 사람의 이마를 닮았다고 한다.
개울을 지나 길이 끝나는 데까지 걸어가자 빈 집 앞에 자가용이 서있고 젊은 사내가 트렁크에 뭔가 싣는다. 이곳에 살던 사람이냐고 물으니 날씨가 좋아 냉이를 캐러 왔다고 한다.
범의터 길의 마지막 집이다. 이곳 또한 양병소다. 양병소는 ‘인제골’을 따라 소뿔산으로 이어지는데 골짜기를 오르다보면 ‘독바위’, ‘누룩바위’가 있다 한다.
길은 산으로 이어지고 비포장이다. 범의터에서 ‘상괘석리’로 넘는 이 고개가 바로 ‘웃괘석고개’고 고개를 넘어가면 ‘대골’이다. 대골을 따라 내려가면 ‘너벙바위’ 위쪽 ‘싸리작골’ 어귀로 나온다.
‘이마터’, ‘인제골’, ‘대골’의 물은 윗괘석리로 흘러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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